렛미인트로듀스마이셀프

by 오마이줄리안

갑자기 글을 쓰려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 싶었지만, 고민이 많고 문장에 대한 고집이 세다보니, 남들이 공감할만한 글은 잘 쓰지 못함을 깨닫고, 더이상 내 글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아, 평생 글로 먹고 살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시 글을 쓰고 싶다, 느끼는 순간들이 삶의 구석구석에서 이따금씩 찾아왔는데, 주로 신변에 그리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경우에 그러했습니다. 기록을 남겨 기억하고 싶었고, 내 감정을 객관적으로 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어 느 순간, 내 생각을 또렷하게 말할 기회가 없어 억울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불특정 다수에게라도 제발 나를 이해해달라고 말하고 싶어졌습니다. 그 불특정 다수 속에 나를 이해하는 사람도, 공감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 같아서요. 내가 구체적으로 아는 누군가보다는, 익명의 사람들 속에 익명의 나를 내보이고 싶다는 욕망같은 것 말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욕망입니다. 말없이 조용히 있어도 되는데 말이죠. 글을 쓰는 일이 욕심을 부리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욕심에는 또한 화가 따르는 법이기도 하지요. 그래도 두렵기도 합니다. 남의 글을 비판하기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일보다 훨씬 쉽고 잘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도 고민이 됩니다. 내 문장에 대한 고집을 버리고 보통의 글을 쓸 수 있을까 되묻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꼭 그럴 필요는 없어도 되지 싶네요. 그래서 계속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제 제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지만,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공부를 잘하는, 잘하는 게 시험보는 거 밖에 없는 한국형똑똑이로서, 재수를 거쳐 관악산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학벌만 믿고 신나게 놀았지만 4년 뒤 돌아온 건 88만원세대라는 별칭과 함께 맞딱드린 취업난이었고, "네가 서울대면 어쩔건데?" 정도의 푸대접을 받고 취업시장에서 도망나왔습니다. 역시 잘하는 게 시험보는 것 밖에 없던 저는, (특히 객관식에 강합니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해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서울대생이 7급으로 들어왔다고 수군거림이 있었고, 왜그랬냐고 묻는 사람이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다들 고시를 통해 5급이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니까요. 시간이 지나자 학교 후배가 직장 선배가 되는 사례도 늘었습니다. 아쉬울 게 없이 잡은 직장이지만 조금은 서운한 마음도 들어, 미국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학력이라도 높이려는 간사한 취지로요. 쉽지는 않았지만 운이 좋게 미국 아이비리그 중 한 대학에 입학하여 석사를 간단하게 마쳤습니다. 역시 시험에는 강합니다. 조금은 쓸데없는 학위지만요.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있을 때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좌절이 찾아왔습니다. 갑자기 저는 암환자가 되었습니다. 양쪽 유방에서 암이 발견되었고 한쪽은 상당히 진행이 된 후였어요. 군대도, 입학도 아니지만 암환자들도 기수가 있죠. 1기 2기 3기 말기. 늦게 발견된 암 덕분에 선배기수로 배당되어, 갑자기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똥꼬가 찢어져 아픈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수술도 했고, 뉴클리어(핵)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인 방사선치료도 했죠. 모든 치료들이 암을 치료하기 위함이었지만, 그 자체로 병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무서운 과정이었습니다. 암덩어리는 아프지 않았지만, 암을 치료하기 위한 약은 몸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나마 당시 내가 한 가장 잘한 일은 "그저 감기같은 것"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아이가 없었다면 암 이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까지 충격이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아플수도 있지, 치료법이 있는 세상에 태어난게 다행이지 아닌가, 남은 회사일 책임있게 마무리하고 입원해야겠지? 남들은 죽지만 나는 괜찮을 거야, 라며 치료를 시작했겠지만... 아이를 생각하면,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암환자인 아이를 생각하면, 온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며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눈에 계속 눈물이 차서 앞이 뿌옇기만했고 목소리를 낼수가 없었습니다. 자식을 낳는 것은 책임감이구나, 이 험한 세상에 애를 내놓을 만한 능력과 부담을 가져야만 자식을 가질 권리가 있구나, 나는 아파서 그 자격이 박탈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지배하던 때였습니다. 나의 죽음보다 남겨진 사람을 걱정하느라 고통스러웠습니다. 나는 남들보다 빨리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30대 초반 여성이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잔인한 두려움이 올라올때쯤, 나도 모르게 뭔가를 적어놔야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유방암 극복기를 1년이상 연재한 블로그를 보니 삶의 희망같은 게 뭉글뭉글 올라왔고, 환희같은 게 느껴지기까지 하더군요. 당시에는 1년만 저렇게 더 살아도 좋겠다, 아픔을 극복한 사람의 일기 글은 다른 이에게 희망이 되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서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글도 공유되기를 희망하며,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말을 다 끌어내서 쏟아낼 수 있게 되길 기대하며, 내 글이 삶이 연속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면, 병을 이겨내고 끝까지 살아남아, 계속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투병의 연대기가 될 수 있다면, 글이 좀 재미없어도,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할지라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치료가 끝나고 나는 예전의 몸으로 돌아왔다고 믿지만, 건강이란 인간이 감히 확신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요양차, 휴가차 조금 더 쉬다가 돌아갈 것입니다. 회사에서는 경단녀가 되어 복직후 돌아오는 불편함이 걱정도 됩니다만, 아파서 쉬면서도 육아를 담당하면서 졸지에 독박육아 당사자가 되어 여성의 육아이데올로기에 대해 설파하게 되는 것도, 건강을 되찾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 목소리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저와 남편은 직업 때문에 해외에 자주 돌아다닙니다. 남편을 따라, 뉴욕에 이어 세르비아로 왔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곳입니다. 유럽 중에서는 한국과 교류가 적은 곳에 속할 겁니다. 멀지만, 새롭습니다. 한국과 관련된 것을 찾기는 힘들지만, 그렇게 이질적인 사회는 아닙니다. 어딜가든 "미국적"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릅니다. 평균신장이 2미터는 족히 되지만, 선한 눈의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싶습니다. 세르비아는 관광명소가 별로 없지만, 도시 곳곳의 삶의 흔적이 생각할 거리가 많습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이곳에서의 삶이 주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새로운 곳에서, 더이상 아프지 않은 몸을 사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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