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무진기행, 김승옥
나에게도 김승옥 소설 속의 무진과 같은 곳이 있다면, 그곳은 부산이지 않을까.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딱딱한 관료의 사회나 낯선 상황에 적응해야 할 업을 앞두고 있을 때 즈음, 공교롭게도 내가 찾은 곳은 항상 부산이었다. 이는 여름날 황급히 몸을 구겨 넣은 새벽의 서울발 부산행 열차에서 문득 든 생각이었다. 나는 예매한 자리를 다시금 확인하며 짐을 두고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옷맵시를 가다듬고서는, 이런 식으로 떠나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임을 지각했다. 이국은 몇 번이고 방문해도 도통 이국이 아니기가 어렵듯이, 나에게 부산은 언제나 방문해도 새로운 기대감을 주는 이국 같은 곳이다. 그럼에도 약 세 시간가량의 고단한 이동에 대한 각오를 다질 때에, 나는 무엇으로부터 압박감을 느껴 부산으로 향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의 서두를 떠올리며, 부산과 무진을 교차로 대비하며, 무진의 퇴폐성을 내가 인지하는 부산이 얼마나 닮아있는지를 가늠해보았다. 물론 이내 멈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빠져들었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사실 부산은 그 지역적 특성과 더불어 그 단어의 기의가 주는 전체적 인상은 무기력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나에게 부산은 생생한 파랑의 색감과 분방한 젊음이 한계를 모르고 활개를 치는 도시라는 인상이 강하다. 도심과 가까운 외곽의 드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 비릿하게 올라오는 짭짤한 소금 기운과 이따금의 새 울음소리. 나는 서울에서 멀리 벗어난 색다른 공간적 여행지로서 부산을 택한 뒤, 주변에 부산 바다를 보러 가게 되었다고 손쉽게 말할 수도 있었다. 누구나 쉽게 공감할만한 행선지로서의 부산. 적어도 이러한 이유에서라면 부산은 음습한 성질의 무진과 닮아있지는 않아 보인다. 부산과 무진을 곧바로 대응하여 비교하기보다는, 김승옥이 무진기행에서 무진에 주입한 의미를 매개로 이 둘을 이해해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따라서 "이국으로서의 무진"이라는 맥락에서 나의 부산 여행은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얼마나 상응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고 이에 대한 대답을 고민하며 소설을 이해해봄직 하다.
색다른 공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 낯선 장소에 당도하였을 때, 그리고 적응하여 얼마 동안 지내야 할 때, 그간의 우리 각각이 일상에서 전시해왔던 자신다움, 충족시키려 노력했던 타인들의 누적된 기대, 스스로를 압도했던 책임과 성공이란 강박에서 그제야 비로소 벗어나기도 한다. 물론 낯선 환경이 주는 새로운 긴장감에 압도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와 별개로 생경한 장소가 자아내는 묘한 분위기는 분명히 우리를 낯선 상황에 배치함에 따라 역설적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든다. 또한, 타지에 이방인으로 속하며 그곳을 탐색적으로 혹은 방관적으로 관찰하며 지내는 동안, 내가 익숙해왔던 것과는 동떨어진 방식과 맥락이 나를 둘러쌓게 되므로 나는 나 스스로를 더욱 첨예하게 지각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동시에 이국의 현지인들을 모방하는 데에 혼란스러움이나 거리낌이 없이, 자아가 훼손될 걱정을 할 필요 없이 더욱 도전적일 수 있다. 혹은, 내가 동경해왔던 혹은 분출하고 싶어 왔던, 하지만 일상에선 실현할 수 없던 어떤 면모들을 원래의 내 것 마냥 표현할 수 있는 용기도 생기게 된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러한 듯하다.
부산과 서울은 비록 시차는 없더라도, 이동에 소요하는 시간과 더불어 한반도 내에서 겪을 수 있는 꽤나 먼 이 물리적 거리감은 나로 하여금 부산이 그간 소속되어있던 서울과는 매우 다른 곳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무진이 주인공의 고향이었던 것과 달리 부산은 나의 고향도 아니고, 퇴폐적인 안개가 그곳의 특산물도 아니다. 하지만 소설 무진기행 속 무진이 탈일상의 환상적 공간으로서 배치되어 독특한 지위를 갖듯, 부산은 나에게 있어 명백한 타지고 심지어 이국이며 더 나아가 나의 일상에서 완벽히 떨어진 궁극의 도피처쯤으로 대상화되어 있는 듯하다. 무진기행 속 화자가 처가에서 전시하던 페르소나(사회적 자아)에 환멸을 느껴 무진으로 도피하듯, 나는 나의 페르소나에 지쳐 부산이라는 낯선 곳으로 피난을 갔던 것은 아닌지 싶다. 막중한 책임을 요하는 과업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실감하고자 "이국"으로 잠시 떠난 뒤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이 내가 이해한 무진기행의 요약이기에.
무진기행의 주인공은 일상 속에서 써야만 하는 가면에 의해 억눌린 자아를 지니고 있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중견기업의 고위직이지만 알고 보면 처가의 입김으로 오른 바지사장에 지나지 않다. 중책으로서의 무게감을 등에 진 동시에 허울뿐이라는 머쓱한 가벼움을 감내해야 하며, 조직에서는 위악을, 가정에서는 위선을 전시할 위치일 것이다. 이런 설명만으로도 그의 양가적이고도 혼란스럽고 억눌린 상태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서울의 일상에서 억압되어온 자신의 여러 욕구를 우연히 다시 방문한 고향 무진에서 비로소 실현한다. 그는 당시의 가부장제 사회라면 더욱이나 강조되었을 남성성에서는 여러 면모로 일탈된 자이지만, 무진에서 만난 그녀를 욕망하는 엄연한 남성이다(이성애). 동시에 그는 무진의 그녀와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한다(동성애 및 자기애). 이윽고는 결말 즈음 그녀와 같이 떠나기로 한 약속을 달랑 편지 하나로 파기하는 배신을 했는데, 즉 이는 결과적으로 자기파괴적인 욕구와 더불어 여러 성애의 욕구를 무진에서 비로소 해소한 것과 다름없다. 무진은 무기력감, 수치심, 죄책감, 비능률성, 반사회성, 퇴폐성과 결부된 공간이며 그에게 있어 타지이고 이국이리라.
이후에 무진은 그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을지 궁금하다. 그는 무진이라도 있기에 서울을 견딜 수 있게 될까? 그렇다면 무진은 환상과 일상 모두를 지키는 기능을 하는가? 이렇게라도 해서 환상을 지키려는 태도는 꼭 무슨 험악한 일을 하고 있는 야쿠자가 자신의 가련하고 청순한 애인을 어디 밀실에다가 숨겨놓는 모습 같기도 한데, 아마 어쩌면 이와 정확히 일치하는 이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무진의 존재로 인해, 오히려 서울과 무진의 간극은 넓어질 것이다. 그 상이한 공간 모두에 거주하는 그의 자아는 연속상에 있지 아니하고 더더욱 해리되어 분열되는 비극이 예상된다. 그는 서울에서 무진으로 도망쳤듯이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무진에서 서울로 도피한다. 앞으로 서울에서의 그는 그간의 일상적 모습과 변함이 없는지 독자는 출간된 글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데, 이처럼의 열린 결말은 묘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김승옥 소설의 정수를 느끼게 한다. 내 생각에 그는 서울로 돌아갔지만 이전처럼 가면을 쓰고 언제고 살아갈 순 없을 것이다. 기필코 또다시 무진을, 아니면 적어도 무진과 상응하는 다른 곳을 방문할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자기와 동일시되는 무언가를, 어쩌면 자기 자신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일은 어쩌면 당시 김승옥 소설의 정서상 자유의 행위로 묘사되고 해석될지도 모르겠다. 무진기행 속 서술과 결말은 왠지 모르게 그러한 암시를, 깊은 우울을 내재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