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클로저(closer, 2004)
너를 안고 있어도 외로운 이 느낌.
삶에 대해 아직 배워가는 중이고 아마 평생을 배울 예정이지만, 왠지 어느 순간부터 나는 각 인생 마다의 길이 있다고 믿었다. 각자도생 같은, 철천지 외톨이 같은 수식어는 내 삶에서 극구 사양이지만, 위의 말을 각자만의 개성과 자율성을 존중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이해해본다면, 이는 나 또한 그렇게 존중받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 나의 삶이 예기치 않게 변화되는 것과,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월권과 불확실성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꽤 오래된 일이지만, 한때는 관계 맺기의 갈증을 겨우내 축이는 선에서 최대한 독립적으로 살고 싶었고,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삶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것에 대한 그 당시 나의 생각은 단호했다. 고마워하지도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일 희생, 설사 그 시작은 그렇지 아니했다고 해도, 나는 그러한 결말이 무섭고 싫었다. 누군가에게 기꺼이 쏟아왔던 열정과 젊음을 포함한 모든 비용이 아까워서 더욱더 상대에게 목매는 그런 장면은 공허하고 처절하며 혹은 반대의 경우에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 모든 인간은 각자의 인생이 있는 것이라고 무정하고도 단호한 태도로 말할 수 있었다. 인생들의 지향점과 속도가 다 다를 수 있는 것인데, 감히 내가 너의 인생에 영향을 주고 너는 또 감히 나의 인생에 영향을 준다니? 너무나도 나는 조심스러웠다. 내 삶에 누군가가 불쑥 들어올까 봐, 그리고 내가 누군가의 삶에 본의 아니게 쳐들어갈까 봐. 너무 무겁게 생각하는 것일 수 있겠지만,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것이 부담이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까지도 책임지고 상대에게 내 인생 일부의 책임을 묻고 싶지도 않았다. 성격상 이미 벌어진 일들의 책임을 면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 상대방이 꽤 괜찮은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따라서 이기적이게도 나는 관계에서의 상대방과의 거리감을 필요에 따라 조율할 수 있기를 원했다. 내 삶의 주도권을 아무나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나 내 삶에 애착이 큰 편인 것도 아니었는데, 난 꽤나 신중하고 까탈스럽고 그랬던 적이 있다. 이런 나는 분명 누군가를 외롭게 만들었을 수 있다.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무튼 그런데 요즘 문득 나야말로 외롭다는 느낌이 든다. 왜일까? 나에게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외로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사랑하는 그이를 자주 볼 수 없어서? 편지로든 메시지로든 전화로든 만날 수야 있지만, 몸이 떨어져 있어서? 아마 맞을 수도 있다. 내 삶에 해야 할 과제들이 많은 시기가 현재이지만 이 업들을 다 무시하고 싶을 정도로, 그를 생각하는 데에도 시간과 열성이 부족한 시기가 또 지금이다. 이러한 것들이 내가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요인일 수 있다. 나를 이렇게 만드는 단 한 명의 사람이 당장 내 눈 앞에, 내 옆에 없다는 사실이 나를 외롭게 만드는 이유, 아마 맞을 것이다.
한편,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일차적으로는 자기만의 세계에 골몰하게 만드는 일 같기도 하다. 그러한 면에서 외로워지고 고독해지는 것이란 생각도 든다. 너를 사랑하는 일은 사실상 나에게 맺힌 너를 사랑하는 일일 테니까. 나에게 맺힌 너는 실제 너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유사할 것이다. 나에게 맺힌 어느 시점의 너는 네 전부는 아닐지라도, 너의 일부는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네 실제와 전부를 알고 싶기에, 그 간극에서 갈증과 고독을 느끼나 보다. 욕심을 버려야 하나? 그런데 잘 안 버려지는데. 나는 그래서 이런 갈증을 느끼고 있다.
영화 클로저에서는 유독 낯선 이(stranger)라는 단어가 주제어처럼 등장한다. 앨리스가 댄을 만났을 때 건넨 첫마디는 "Hello, stranger."였고, 사진작가 안나는 외부의 낯선 사람들을 포착한 순간을 주제로 사진전을 열었다. 사진기 렌즈를 통해 담기고, 현상되는 과정을 거쳐 마주한 그 과거의 순간은 실제와 얼마나 유사할까? 오히려 재해석되고 재구성된 또 다른 창작물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나에게는 사진전에서 앨리스가 자신의 사진을 바라보는 장면, 그리고 거기에서 나누는 대화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처럼 다가온다. 사진은 원본의 복사본인 것 같지만, 낯선 느낌을 자아낸다. 이러한 이유로 사진과 실제의 간극은 필연적이라, 꼭 타인과 자신의 간극과도 닮았다. 자신의 자아라는 상에 맺힌 타인을 가늠할 뿐인 우리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앨리스의 삶을 자신의 책에 인용하는(영화에서는 use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댄과, 타인들의 순간을 역시 인용하는 안나의 모습은 일맥상통한다. 사진전에서 안나의 연인인 래리는 앨리스를 처음으로 마주한다. 그리고 앨리스에게 댄이 당신의 모든 것을 책에 담았는지를 물었다. 앨리스는 자신의 일부만이, 진실을 제외한 부분만이 담겨있다고 대답한다. (영화의 주제이자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인물 사진을 찍고 있는 안나에게, 앨리스는 안나와 댄이 부정을 저지르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 밝힌다. 안나는 자기는 도둑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댄을 앨리스에게서 앗아가려는 상황에 대한 대답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타인의 모습을 사진으로써 인용하는 그녀 자신의 일에 대한 대답같이 들리기도 해서, 자못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외로움은 다양한 이유로 찾아올 수 있다. 사랑을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사랑을 하면 또 하는 대로 겪을 수 있는 외로움이 있다. 영화 클로저처럼 한 때는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또 가장 멀어진 이가 되어버리는 경험도 있을 수 있다. 사랑하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아주 잘 아는 동시에 아리송하고 낯선(strange) 상황 또한 우리는 겪을 수 있다. 사람이라면 안고 살아가는 고독감은 그가 세상이나 중요한 상대방을 받아들일 때, 일차적으로 그 자신의 자아를 투영하여 수용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앓고 있는 외로움, 어쩌면 그리움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큰 탓에 겪고 있는 것 같다. 너를 꽉 안아 너 자체를 흡수하고 싶은데 그렇게 되질 않으니 아쉽고 애타는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다. 안고 있어도 더 안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이 곧 내 곁에 온다. 더 많이 더 오래 더 세게 안아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