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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upoom Sep 25. 2016

공통점에 대한 경계와 회의

영화 더 랍스터

근래 본 영화 중에 가장 창의적인 소재와 강렬한 메시지가 있던 그런 작품이다.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너무나 기발한 콘셉트이고 사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과는 달라서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사회가 존재하며 기술적으로도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끊임없이 들었지만, 그 궁금증을 일단 제쳐두고 이입할 정도로 배우들은 기가 막히도록 뻔뻔하게 그 영화 상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서 똑같이 적용될 법한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어서, 하나의 우화처럼 영화가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나는 그 은유에 자꾸 주목하게 되었다. 왜 하필 랍스터였나? 이런 의미를 찾게 만든다.


타인과 자신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남과 교류하고 소통할 때 그들과 내가 느끼는 "똑같은" 것을 공유하기란 물리적으로 절대 불가능하다. 그래서 무수한 차이와 다양성의 바다에 우리는 내 던져진 고독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 상의 내용을 인용하자면, 그 사람이 걸음을 저는 것은 일시적인 발목 부상이고 그래서 절음이인 나와는 동일하지가 않아서 나의 짝이 아니라고 선을 긋지만, 내 짝이고 싶은 그 사람이 코피를 선천적으로 자주 흘리기에 내가 거짓으로 코피를 흘리는 것은 나의 가상한 노력으로 알아주길 바라는 그런 모순적인 마음이 사랑의 한 모습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사람과 나와의 공통점을 우리만이 공유하면 좋겠는 그런 마음, 그리고 그 공통점이 운명적인 특성이길 바라는 그런 마음 말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영화는 관계에서 우리가 상대방과 공유하는 공통점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거기에 부여된 강력한 환상과 신화적 의미에 경종을 울린다.


허공을 껴안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담은 포스터를 보라. 우리는 어쩌면 공통점으로 연결되었다고 믿으며 타인과 관계를 맺지만, 그것은 원천적으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허상일 뿐이다. 타자화, 대상화, 객체화가 쉬운 세상에서는 남과 나를 구분하는 차이의 홍수에 빠지기가 쉽다. 하지만 자신과 그의 공통점을 찾게되는 운명적인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내 인생에서의 객체이자 타인이었던 그 대상을 내 사람으로, 일종의 구원자로 맞아들이고 싶어한다. 이 영화는 관계에서 우리가 겪는 거의 모든 것, 그 기저에 깔린 대상의 이상화와 평가절하를 꼬집는다. 그리고 그 동력이었던 자신과의 교집합과 여집합으로만 상대를 분류하는 잣대에 냉소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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