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산다는 것은 곧 소설을 쓴다는 것

‘버닝(이창동, 2018)’을 나만의 관점으로 이야기하기

by bupoom

1. 우리는 모두 소설가다.

종수처럼 소설을 쓰고자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이 수수께끼 같은 세상을 이해하려 각자 머릿속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쓴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소설가다. 이창동의 영화 '버닝'은 인식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두 시간 반 동안 펼쳐놓는다. 당신은 이 영화 속 수수께끼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그리고 무엇을 믿었는가? 부디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이 영화를 보시기를 권한다.


영화는 끊임없이 진실의 불확실성을 암시한다. 해미가 정말 우물에 빠졌었는지, 고양이 보일이가 실재하는지를 포함해 많은 것이 수수께끼 투성이며, 영화 말미에 이르었어도 속시원히 해결되지 않는다. 해미는 왜 실종되었는가? 벤이 갖고 있는 시계는 해미의 것인가? 벤의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는 정말 말 그대로인가? 아니면 비닐하우스는 여자를 의미하는 메타포인가? 영화에 산재한 미스터리들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배치되었고, 의도적으로 해소되지 않은 채, 아주 의도적으로 많은 것들을 모호하게 남긴다.


벤이 정말 살인자인지, 해미가 어떻게 됐는지, 마지막 종수와 벤의 장면이 현실인지 상상인지... 이러한 모호성은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만의 '소설'을 쓰게 만든다. 우리는 각자의 경험과 관점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해석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의 편견과 믿음을 마주하게 된다. 그 결과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사실 얼마나 불확실한지, 얼마나 내 마음대로 편집/각색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거의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시기에 따라, 가치관에 따라, 입장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의 인생살이는 흡사 수수께끼 더미 속에서 나름대로의 추론, 즉 이야기 만들기를 통해 우리 각자 더듬더듬 짚어가며 겨우내 이해하는 모습임을 새삼 인정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어떠한 측면에서 모두 소설가임을 받아들인다.



2. 거대한 프리즘: 메타포

영화는 세대 간 이어진, 또는 한 세대 안에서 나뉘는 계급에 관해 이야기한다. 국가, 자본주의, 그리고 한 개인의 자존심도 영화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요소다. 하지만 나는 상대적으로 많이 언급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다.


이 영화 속에서는 메타포가 정말 많이 등장한다: 우물, 카드빚, 제물, 요리, 화장, 성형, 비닐하우스, 태운다(burn, ride), 비와 홍수, 햇빛, 해미의 팬터마임을 포함한 춤(들), 손목시계(들), 고양이(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게는 해미...


눈치채셨겠지만, 위의 적힌 단어들은 가까이 적힌 단어들과 서로 의미를 공유한다.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우물은 어느 순간 그 실재 여부는 중요치 않아지고 곧 카드빚과 동일한 의미로 전환된다. 카드빚은 명백히 자본주의 하 멀쩡히 산 자를 제물로 만들며, 벤은 요리를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 비유했다. 공교롭게도 벤은 요리가 재미있다며 요리를 취미라고 자신할 정도인데, 자본주의 사회 속 생계 걱정 없이 오로지 재미만을 추구해도 되는, 놀아도 되는 벤의 지위는 곧 신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영화의 그 장면에서 벤은 요리를 제물로 비유한 이후, 말만 안 했을 뿐 스스로를 신으로 비유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태도를 보였다.


벤에게 있어 요리만큼 비슷한 것은 화장이다. 마치 제물을 요리하듯 벤이 곁의 여자에게 화장을 시켜주는 모습이 나온다. 그 장면이 벤의 실제인지는 사실 중요하진 않다. 여기서 사실 벤 또한 메타포이니까 (후술). 그런 의미에서 해미가 예뻐지기 위해 했던 성형도 화장과 유사한 의미를 공유한다. 화장과 성형을 감수한 여성들은 벤에게 있어 비닐하우스나 다름없다. 벤의 관점에서 쓸모없고 버려진 모습이라, 꼭 자신이 태워주기를 바라는 것 같아서 태울 뿐(burn)이라고 말했다. 태운다는 것은 영화에서 명시적으로 통용되는 불태운다의 의미도 있지만 차에 태운다는 뜻도 사전적으로 존재하는데, 실제로 극의 특정 시점 이후 해미는 더 이상 종수의 차를 타지 않고 벤의 차로 옮겨가 태워지지 않았던가.


비닐하우스를 불태우는 과정을 벤은 꼭 자연현상을 말하듯이 종수에게 설명한다. 비가 홍수처럼 많이 내리면 강이 범람해 마을 사람들이 죽기도 하지 않냐며, 자연의 섭리인 홍수에 비유해 자신의 취미활동을 이야기한다. (벤이 스스로를 신의 위치로 상정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또 다른 포인트다.) 그에 반해 현실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의 섭리는 오히려 해미의 집을 포함해 영화 내내 도통 나타나질 않는데, 바로 햇빛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어둡고 흐린 데다가 아주 잠시 나온 햇빛은 그마저도 남산타워의 창문에 비친 대리적 존재로서 몇 분 아니 몇 초 지속할 뿐이고, 아니면 아예 사라지기 직전의 시뻘건 석양으로 존재할만큼 매우 박복하다.


해미의 춤을 기억한다. 생계를 위해서 추었든, 의미를 위해서 추었든 해미의 모든 춤은 절박했고 그만큼 박복한 삶 속에서도 의미를 잃지 않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해미의 춤은 누군가에겐 시각적으로 대상화되기도, 우습게 여겨지기도, 하품이 나올 만큼 지루해 보이기도 했다. 해미의 춤이 가진 존엄의 품위를 모두가 알아차리긴 어려웠을 수도 있겠지만, 그가 전리품으로 삼기에 꽤 괜찮다는 것은 누구나 알았을 것이다. 해미의 춤을 계기로 종수가 얻었던 손목시계는 해미의 손목을 지나 벤의 화장대에서도 발견된다. 그 시계가 그 시계인지 묻고 따지는 것은 역시 어느 시점부터는 중요해지지 않는다. 해미의 춤과 손목시계가 벤에게 있어 일종의 기념품 정도로 전락되어 버린 그 사실이 더 신경 쓰일 뿐이다.


손목시계처럼 느닷없이 벤의 집에서 발견되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고양이다. 그 고양이는 영화의 어느 시점부터 야옹이에서 보일이로 종수에 의해 정립된다. 그 이후부터 종수는 더 이상 벤을 미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벤에게 해미에 관한 질문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종수에게 있어 고양이 보일이는 해미의 실종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 고양이(들)는 해미이기도 하다. 갑자기 나타났지만 갑자기 사라진 해미처럼, 벤의 집에 있던 고양이 또한 그러했다. 만약 해미가 벤에 의해 희생되지 않고 단순히 카드빚 때문에 잠시 도피한 것이라면, 그녀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보일이가 되기를 택한 것이기에.



3. 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에서 굉장히 직설적이고 호전적인 어조로 나오는 대사 하나가 있는데 바로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어요 “이다. 생명력을 잃고서 깊게 지하로 뻗은 우물과도 같은 이 사회에서 여성은 마치 제물처럼 불태워져 희생되거나, 누군가가 나타나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리는 객체 지위에 머문다. 여기서 해미가 계급과 상관없이 ”여성 전체“로 치환된다면, 유일하게 햇빛이 드는 순간이 하루에 단 몇 분에 불과한 해미의 집은 여성에게 주어진 제한된 기회와 공간의 메타포로 볼 수 있다. (심지어 그 빛은 진짜 햇빛도 아니고 남산타워 창문에 반사되는 대리적 햇빛에 불과하다.) 아이러니하게 해미는 그 빛을 정말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이는 제한된 기회조차 아름답게 받아들여야 하는 여성의 현실을 반영한다.


해미가 여성이라면, 그에 대응되는 자는 바로 벤이며 벤은 ”상위 계층 남성“으로 치환된다. 또는 시대에 따라 국가, 독재권력, 자본으로도 치환될 수도 있겠다. 영화가 워낙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러 여지를 내포하고 있다만, 어느 특정 결론을 취하기로 한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해미가 벤에 의해 제물화되고 객체화, 대상화, 타자화되는 모습을 아주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다. 벤에 의해 해미는 버려진 비닐하우스 취급을 당하고 그 과정을 자연의 섭리라고 설명당한다. 벤과 벤의 친구들에 의해 해미가 갈구하는 자유의 춤사위는 비웃음 당하거나 지루함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생계를 위한 춤사위는 지나가는 여러 “벤”들의 눈요기와 호객행위의 의미를 벗어나지 못한다.


한편 해미와 유사한 처지인 종수는 “동일 계층 남성”으로 치환되어 영화에서 해미의 (잠재적) 구원자로 묘사된다. 하지만 해미의 우물과 고양이는 종수에 의해 줄곧 의심받고, 이는 여성의 말과 경험이 동일 계층 내에서도 진실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더불어 좁은 공간이더라도 사적인 영토를 종수에게 기꺼이 내어준 해미이지만, 그레이트 헝거로서 옷을 벗어던지며 자유를 욕망하는 그녀의 춤사위에 종수는 아주 좁은 시야의 차갑고 경멸에 찬 조소를 보낼 뿐이다. 그저 “다른 남자 앞에서 옷 벗는 것은 창녀들이나 하는 짓이야”라는 꾸짖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 속에서 해미를 어느 방면으로나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종수뿐인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아쉬운데, 같이 일을 했던 팀장님도 아니고 (심지어 저 소제목의 강렬한 대사를 했던 인물인데), 친언니도 선택지에 포함되어있지 않다. 종수는 해미를 이미 벤에게 희생당한 것으로 어느 순간 확신하고, 해미의 흔적 찾기를 멈춘다. 그리고 해미의 복수를 현실인지 상상인지 도통 분간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한다. 어떠한 해석으로 결론짓든 간에 그 이후 이어지는 엔딩 시퀀스는 민망할 만큼 처량하고, 찝찝할 만큼 모호하다. 종수와 벤의 장면이 실제 현실 속 행동, 또는 소설로의 승화 중 어느 쪽이더라도 그것이 해미가 동의한 복수인지 우리는 모른다.


사실 그런 면에서 종수는 정희진 박사의 "식민지 남성성"이란 개념이 떠오를 만큼 아주 무력하게 비친다. 구원자가 되고 싶지만 실제로는 무력한 존재로서, 해미를 구하고 싶어하지만 정작 그녀를 이해하지도 보호하지도 못한다. 종수의 분노는 실제 문제의 구조적 원인을 통찰하거나 제대로 된 표적을 겨냥하지 못한 채, 해미에 대한 의심과 배신감으로만 표출된다. 해미가 추구하는 자유의 진정한 의미에 공명하지 못하고 외면과 비난으로 일관하는 그의 모습은,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끝나버린다. 이로서 ‘버닝’은 우리 사회가 여실히 안고 있는 구조적 불평등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의 엔딩이 더없는 절망처럼 나에게는 다가온다.



4. 결론

상술하였듯 '버닝'은 단순한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가 아니다. ‘버닝’은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인식하고, 해석하고, 이야기하는지에 대한 성찰이다. 영화 속 종수가 쓰려했던 소설처럼, 우리도 각자의 방식으로 이 혼돈스러운 세상을 이해하려 애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진실이란 것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주관적인지, 그리고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각자의 렌즈에 의해 왜곡되는지를 깨닫게 된다. 각자의 관점에서 진실을 해석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만의 소설을 단순히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설”임을 인정하며 서로 그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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