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upoom Mar 23. 2020

보편에 대해 말하는 시의적인 방법

영화 꿈의 제인

"태어난 순간부터 거짓인 삶이었다"는 고백은 제인의 입에서 먼저 나왔지만, 소현에 의해 영화 서두에서 인용되고, 영화가 끝날 때쯤에는 관객인 우리 모두에게 반문된다. "우리의 삶도 어느 순간부터 거짓은 아니었을까?"라는 질문으로 심연을 두드린다. 영화는 이처럼 특수한 계층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인간이라면 본질적으로 경험할 고민에 관해 말한다. 무엇보다 내가 나로 사는 것,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사는 것에서 오는 여러 고민을 다룬다.


이 영화가 취하는 서사의 배치 방식과 구조에 대해 많은 평론과 의견이 있다. 공통적으로 최소 3부로 나뉘며, 1부는 허구이자 소현의 희망, 2부는 소현의 현재, 3부는 소현의 과거를 의미한다고들 많이 이야기한다. 나도 대체로 동의한다. 현재-과거-소망 순의 배치는 현재 사건의 원인에 주목하게 하는 반면, 영화가 취한 구조인 소망-현재-과거는 오히려 왜 그러한 소망을 품을 수밖에 없었는지 설득하는 힘을 더욱 갖게 한다는 누군가의 의견에도 동의한다. 소망이라는 주제를 두괄식으로 제시함에 따라 영화가 의도한 바가 보다 선명하게 와 닿았고, 그 덕에 시점이 이동할 때마다 중첩되는 나레이션은 지루함보다는 되려 환기를 제공한다.


우연하게도 내가 최근에 본 영화 모두 서사를 시순에서 해체하고 재구조화하는 구성을 특징으로 갖고 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작품은 그레타 거윅 감독의 <작은아씨들>이다. 고전으로서 여러 버전이 이미 존재한 작은아씨들을 거윅만의 감각과 주제의식을 담아 완성했다고 평가하겠다. 자세하게는 네 자매 각각의 캐릭터가 다른 버전에서보다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느껴졌으며, 과거와 현재를 서술하는 방식이 교차함에 따라 역설적으로 각 인물들의 감정과 지향성 등을 더욱 잘 이해하며 영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거윅은 어린 시절의 잔상이 언제나 우리의 현재를 따라다니고 있음을 표현하려 그러한 서사 구조를 택했다고 한다. 나는 꿈의 제인의 말하기 방식도 정확히 그러한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를 치밀하게 구분하는 것은 난해하고 기연미연 모호할 뿐만 아니라, 디테일에 소모적으로 집중하도록 하여, 오히려 주제의식을 이해하는 데엔 무용한 접근법이다. 나는 보다 거시적인 관점으로 이 영화로 인해 떠오른 생각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다만, 소현이 모텔에서 작성한 유서 내지는 편지를 센터의 어느 방 천장에 숨겨 놓는 장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알고 싶다. 나는 개연성을 염두하며 이와 같은 장면들의 현실성을 열심히 생각해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영화가 제시하는 서술을 따라가면서 점점 확실해지는 것은, 소현은 어디엔가라도 소속되기를 소망했고,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기에는 너무나 유약했다는 것이다. 소위 소현의 "소망"과 "현실"은 장면들의 색감 대비만큼이나 그 내용도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그 결과 왜 소현은 그러한 소망을 품게 되었으며 이러한 소망에 내가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게 바로 제작자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을까 싶다.


집단이 공유하고 전수하는 사회문화에 내재하는 규범, 그 규범에의 일탈, 그리고 성원으로서 집단에 소속되는 과정에 관심 있는 나로서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서 규범의 눈치를 받지 않기, 전통에 구애받지 않기에는 꽤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사회경제적 차원과 더불어 내적 자원의 측면에서도 취약하기 쉬운 계층인 영화의 주인공들이 당면한 현실은 더더욱 열악하고, 이미 강한 낙인과 연결되어 있다. 이들이 보통의 사람처럼 소속되어 살기란 여간 쉽지 않아 보인다. 속할 수 있는 집단은 질적으로는 제한적이고 양적으로는 희소하다. 그래서 가출 청소년인 소현의 경우 어쩔 수 없이 특정 집단(팸)에 소속되기 위해 열심을 가한다. 그러다 어떠한 사건을 경험하고서, 생을 포기하는 선택을 한다. 트랜스젠더인 제인의 경우 영화에서 그녀의 실제가 자세히 서술되진 않았지만, 한 순간에 연락두절로 사라져 버렸다는 이태원 퀴어 클럽 동료의 증언이 암시하는 바가 의미심장하다. 이는 비단 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보통의 존재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에는 때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가출 청소년, 팸, 청소년 성매매 그리고 퀴어, 독립적이거나 중첩적으로 일어나는 사회 현상의 탈을 썼지만 영화 <꿈의 제인>은 본질적으로는 공동체 속에서의 인간을 조명하며 곧 보편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영화에서 시의적절한 방법으로 은유된 희망을 본다. 성 인지 감수성(gender sensitivity)을 고양시키는 것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진 현 한국사회에 이 영화가 제안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고, 이는 관객 각자의 다양한 감상과 대답을 통해 논의가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꿈의 제인"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태연하고 너그러운 제인은 우리의 소망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허나 그것의 진위여부를 파악하는 것은 무용하다. 영화에서 주장하듯, 그것을 우리가 믿을 때야 말로 그것은 유용성의 지위를 취득한다. 나는 기존 규범이 그어놓은 분법으로 설명되지 않은 덕에 평균적인 인물들에게 당혹감을 선사하는 제인을 내가 영화에서 만난 캐릭터 중 최고로 꼽고 싶다. 앞으로도 종종 그녀의 존재에서 위로와 용기를 그리고 나아갈 방향에 대한 영감을 얻을 것이란 예감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불친절하고 긍정적인 실존적 관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