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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굽기 Apr 09. 2018

낯짝도 참 두껍다 니가 다시 날 찾아올 생각도 다 하고

애써 무뎌진 것, 애써 잊고 살았던 것들이 날 다시 찾아올 때가 있다

미세먼지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편인 대구에 머무르고 있어서 그런지 한동안 제법 건강하게 살았다. 감기님 어서오세요 하고 써붙인 수준의 면역력을 가지고 있는지라 잔병치레 정도야 항상 달고 살았다지마는, 뭐, 크게 앓아누운 적은 근 일년 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살짝의 콧물과 잔기침이야 평생을 달고 살았다 치고, 그 외에는 몸에 문제가 없었다. 괄목할 만한 기록이다. 워낙에 나란 사람이, 누가 취미가 몸살 나는 거 아니냐고 물어도 딱히 부정을 못 할 수준의 인간이기 때문이라서 그러하다.


그러다 보니 최근 기침을 좀 크게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목에 좀 가래가 끼었을 때 큼큼거리는 정도지. 워낙에 나약한 기관지를 가지고 있는지라 이 상태는 오히려 좀 어색할 지경이다. 한두 달에 한 번은 주변에서 폐렴을 의심할 만큼의 심각한 기침감기를 얻어맞던 사람이니까. 하여튼 요즘 좀 신기하다. 다른 동네에서는 나 아는 사람들마다 미세먼지를 부르짖고 있는데 나 혼자서 오랜만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 딴 사람들 하하호호 하고 있을 때 원인도 모를 알러지로 스무 번씩 재채기 하고 살다가 이러려니까 웃기다. 좋으나 싫으나 유배당한 채로 잘 먹고 규칙적으로 운동까지 사는데 공기까지 괜찮으니 이런 장점도 생기나보다.


물론 이 동네의 맥락 없는 날씨에 적응해줄 생각은 없다.

기관지가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참 아무 것도 아닌 사건이 생겼다. 자기 전에 양치를 하면서 혀를 닦다가 사레가 들렸다. 좀 깊게 들어갔다. 아무래도 맹물보다는 독하기 마련이니. 나도 모르게 큰 기침 두 번을 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이다. 그런데 그 순간 너무 아파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름대로 건장한 몸인데, 어이가 없을 정도로 아팠고 무서울 정도로 힘이 순식간에 빠졌다. 정말 우스웠다. 기침 두 번에 몸이 쓰러진 거다.


한 번 감기가 제대로 걸리면 목이 망가질 때까지 깊은 기침을 하는 편이다. 평소 노래에 죽고 못 사는 사람이지만 이런 체질인 터라 목 컨디션이 조금만 망가져도 거의 소리를 못 낼 지경이 된다. 그런 내게 큰 기침은 굉장히 익숙하다. 게다가 말했듯이 뭐 헬스장 사는 사람들 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건장한 몸이다. 그렇기에 그 사소한 충격이 내게 준 느낌은, 당혹스러웠다.

사람이라는 게 이런 존재다. 물렁물렁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금붕어 기억력이란 걸 욕할 자격이 없는 것 같다. 평생을 달고 살아온 것도 이렇게 쉽게 잊고 이렇게 쉽게 취약해진다. 고작 기침인데도. 스물 넘는 평생을 달고 살아왔는데도. 이십삼 년이 긴 생애는 아니라지만 기침을 그 시간 동안 해왔으면 전문가 자격증 발급 받을 레벨은 되지 않나 싶다. 지난 겨울에 겪은 일도 있다. 원래는 좀 우울하기만 해도 며칠간 몸살이 났는데, 한참 튼튼하게 살다가 갑자기 오랜만에 찾아오니 어떻게 뭘 못 하겠더라. 그나마도 쌍화탕 하나 비타민워터 하나 마시고 하룻밤 눈 붙였더니 나았다마는, 어쨌든 죽을 지경이었다. 오랜만이라는 게 반가운 상대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닌가보다.


잊고 있었던 것들이 이따금씩 잘 살고 있는 우리에게 습격을 가할 때가 있다. 그것도 참 악질적인 방법으로다가 다들 찾아온다. 애초에 한참 전에 패놓고 다시 건드리러 다가오는 것들에게 인성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그러지 않기를 빌지만 언제나 자비가 없다.


가정사적인 문제 때문에 나는 담배 피는 사람들을 무서워한다. 내 친구들도 남녀할 것 없이 흡연자가 많고 그들이 나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을 것임을 알지만 나는 아직도 누가 담배를 핀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위축이 된다. 그래서 그런가 아는 사람들은 내 근처에서 담배 이야기는 잘 안 한다. 피는 사람은 피지만 그것까지 뭐라고 하는 건 오히려 침해의 영역이고. 하여튼 그러다 보니 어릴 때의 기억 정도야, 잊고 살다가도 한번씩 훅 들어올 때가 있다. 


하기사 그나마 담배는 좀 나은 축이다. 담배 피는 사람은 지천에 난리부르스인 벚꽃잎보다도 많으니까. 벚나무에 달려있는 게 담뱃불이라고 해도 아마 통계학상으로 유의미한 오차는 없을 거다. 문제는 정말로 드물어져 버린 것들이다. 짝사랑하던 사람을 어디서 마주친다거나 하면 그 날의 정서곡선은 재기불능이 되겠지. 그럴 일이야 거의 없겠지만 그게 그래서 더 무서운 거 아닐까. 잊을 만하면 훅 들어오니까. 누군가는 전 애인이 이런 방아쇠로 작용을 할 테고. 지금의 상대방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을지라도 그게 또 아픈 건 아픈 거다. 사레들렸다고 그 날로 감기에 걸리는 건 아닌 것처럼. 어린 날의 기억이 내게 다시 소리를 지르진 못하듯이.


그 외에도 많다. 오랜만에 찾아온 짝사랑, 오랜만에 찾아온 빈곤, 오랜만에 찾아온 감정싸움, 휴가 끝에 복귀한 직장 등등. 우리 인생사 참 손님도 많다.

그럴 때면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그리고 그럴 때 보통 나는 막다른 길에 있더라.

대처법이나 좀 있으면 좋겠다. 무슨무슨 공포증 없애는 것마냥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게 의미가 있을 리도 없고. 그 전에 정신상태가 걸레짝마냥 망가지겠지. 저런 식으로 찾아오면 어쩔 방도도 없이 무너진다. 차라리 엄청난 비련의 무언가에 얻어맞으면 비극의 주인공 된 기분이나 난다지, 거 고작해야 찌질한 짝사랑에 쳐맞고 쓰러지면 부끄러워서 못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보통 부끄럽다. 적어도 난 그렇다.


하지만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인생이란 얻어맞다가 누구 때리다가 다시 딴 놈한테 얻어맞는 거니까. 좀 덜 아프려면 이 모든 큰 아픔들, 그 자체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워야겠지만, 지금까지의 인생 짬 정도로는 아직 무리인 것 같다. 원래 비싼 갑옷은 레벨 높을 때 사는 거니까. 더 살다 보면 혹시 나는 알게 될까. 지금은 거래창이 회색이다.


어떤 인디 가수는 우울한 날들에 최선을 다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내게 그건 무리다. 일시 정지 누르고 마른 하늘에 비가 내린다, 를 틀어야지. 비가 오면 오는가보다 해야겠다.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니. 반갑진 않으니까 얼른 돌아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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