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굽기 Apr 05. 2018

쓸데없기에 반짝거리는

우리는 우리의 걱정을 사랑해

한때 내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는 '내가 너무 경박한 사람이면 어쩌지' 였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나를 너무 경박하고 소란스러운 사람으로 보면 어쩌지.' 였고.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내가 하는 말들이 너무 가벼운 무게를 가지게 된다는 것은. 나의 행동이 무게감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나라는 사람이 지나친 밝은 색이 입혀져 있다는 것은.


나는 정말로 심각했고 심지어는 나 스스로 내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왜냐면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으니까. 이따끔씩 나도 모르게 너무 큰 목소리로 웃었다거나 하면 나는 한참을 자책했다.


...하는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가 정신이 나간 듯 웃었다. 내가 2017년에 한 이야기 통틀어 가장 웃긴 이야기란다. 웃기다는 소리는 일 년에 두세 번이나 들을까 말까인 소중한 말이다. 이건 좋아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비웃음당한 나의 진지한 존재론적 걱정을 위해 눈물 흘려 주어야 하는 걸까. 이 인간은 정말 얼마나 웃겼으면 그 말을 따다가 카톡방 공지로 올려버렸다.


결론적으로 나의 걱정은 2017년 어워드 올해의 가장 웃긴 말과 올해의 가장 쓸데없는 걱정 부문에 동시에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제어가 안 될 정도로 경박한 사람은 애초에 저런 걱정을 안 한다. 행동 하나하나에 저런 걱정을 하는 사람이 경박할 리가 없다. 그리고 나는 돌이켜보면 참 꾸준하게 눅눅한 사람이었다. 맞다. 난 원래 반대편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다.

눅눅함 콘테스트 하면 수상권에 들 나같은 사람이 너무 밝으면 어쩌지 같은 걱정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가.


생각해 보면 인간이란 생물은 애초에 태어나기를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만들어져 태어나는 것 같다. 이 쓸데없음이란 게 참 다채롭다. 예쁘게 말해서 예술의 영역이다. 운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몸이 너무 우락부락해져서 험상궂어지면 어쩌지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봤고 이대로 장교가 되어서 쭉쭉 승진해 언젠가 장군이 되면 신경쓸 일이 너무 많아질 텐데 어떡하지를 걱정하는 ROTC 입대 희망자도 보았고 눈을 감고 머리를 감으면 귀신이 나타날까봐 걱정하는 사람도 보았고 파마를 하면 온 세상 사람들이 자기에게 반할까봐 걱정하는 사람도 보았다. 물론 내가 했던 걱정이 저것들보다 형편이 낫지도 않다. 소설에 저런 대사들을 진지하게 지껄이는 등장인물들이 등장한다면 현실성 없다고 욕 먹을 텐데. 살다 보면 언제나 현실이 픽션을 이긴다.


왜 저 쓸데없는 것들은 저토록 풍부한 다양성을 지니고 있는가. 답은 모두 알고 있다. 우리 모두가 저 다양성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쓸데없는 걱정 한 번도 안 해본 사람들만 손을 들자. 그대가 만일 손을 들고 있다면 그 손으로 솔직하지 못한 본인의 머리를 쥐어박도록 하자. 나는 그런 사람 만나본 적 없다.


내 친구 중에 정말 돌땡이 같은 사람이 하나 있다. 이런 애가 나랑 어떻게 친해졌지 싶을 정도로 돌땡이다. 여행 가서 너무 예쁜 풍경을 만났다고 호들갑을 떨며 사진을 보내면 어 사진 구도가 좋네. 하고 더 반응이 없는 그런 식의 인간이다. 철저한 논리와 이성으로 사는 인간. 놀랍게도 이 친구는 눈을 감으면 귀신이 나타날까봐 걱정하는 사람이다. 인간이 살면서 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행위중에 하나는 무서운 이야기가 담긴 글에 이 친구를 태그하는 일일 것이다.


살면서 딱 필요한 일만 리스트 만들어 놓고 착착 해나갈 것 같은 사람도 세상에서 가장 쓸 데 없는 걱정을 한다. 아무래도 이건 그냥 우리네 족속의 숙명인 것 같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걱정거리를 몇 개씩 품고 살아가는 것.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게 쓸데없지만도 않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걱정거리들은 귀엽다. 그리고 내가 볼 때 모든 존재는 귀여우면 어쨌든 나름의 쓸모를 다한 거다.

그러니까 얘네는 존재만으로 가치를 가진다. 귀여운 게 최고야.

무릇 이야기가 가진 매력이 가장 강렬하게 폭발하는 지점은 처음에 예상치 못했던 반전이 드러나는 부분이기 마련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던 반전 포인트가 드러날 때 폭발적인 매력이 빛을 발한다. 결국 사람도 하나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존재인 거니까. 매력이 폭발하는 이야기가 청자를 점점 빠져들게 만들듯이 숨겨진 매력이 폭발하는 사람은 점점 더 알고싶어지는 존재다. 게다가 귀엽다면 말 다했다.


쓸데없는 걱정은 귀엽다. 쓸데없어서 더 귀엽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나름의 판타지와 나름의 생각을 솔직하게, 가감없이 드러내서 더 더 귀엽다. 그가 평소에 무엇을 경계하는지, 그가 평소에 무엇을 꿈꾸는지, 그가 평소에 무엇을 바라보는지, 그가 평소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쓸데없이 걱정할 때 우리는 모두 어린애가 된다. 우리의 감정이 가장 반짝거리는 형태.


쓸데없는 주제에 그렇게 반짝거리는 빛이 나다니. 그런 게 그렇게 숨어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찾아내서 사랑해 달라는 의미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반짝임을 몰래몰래 가지고 산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귀엽다.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자라지만 좋은 친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