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람은 지나침 만큼이나 좋다.
생긴 건 세상에서 술 제일 잘 마시게 생겼지만 사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주량을 가지고 있다. 아마 내 모든 요소 중에서 가장 작고 무해한 것을 고르라면 주량이 꼽히지 싶다. 어느 정도냐 하면 조금 심한 날은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술에 취해서 동네방네 사랑의 카톡을 보낼 정도다. 약한 걸로 따지자면 나를 뛰어넘는 사람을 살면서 몇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술자리를 잘 못 간다. 없어서 못 간단 소리다. 진짜로 없다. 있으면 잘 간다. 없으면 만들기도 한다.
나를 초대하는 술자리가 몇 없을 만한 이유가 사실 추리하기에 어렵지는 않다. 일단 주량이 요 모양 요 꼴이니 보폭이 맞지를 않겠거니 할 거다. 아니면 뭐, 술을 잘 못 마시니 안 좋아하겠거니 하겠지. 하지만 나는 놀랍게도 애주가들과 보폭을 맞출 수 있다. 원샷을 즐기고 술을 잘 빼지도 않으니까. 다만 조금 빨리 나가떨어질 뿐. 그리고 당연히 술을 좋아한다. 아일랜드로 여행가서 아일랜드 펍에서 기네스 마시는 게 인생의 오랜 꿈일 만큼이나 그러하다. 아니, 일단 맛있는데 싫을 이유가 없다. 맛있는데 마시고 나면 기분까지 좋아진다. 내가 볼 때 디오니소스는 동서고금 최고의 신이다.
하여튼, 이렇게 좋아하는 걸 많이 먹지를 못하니 가끔 스스로가 안타까울 때가 있다. 요러요러한데서 비롯되어 술 마실 기회가 조러조러하게 줄어들기도 했고. 하지만 신은 나에게 주량의 재능은 주지 아니하셨으나 정신승리의 재능을 주셨으니. 내 주량도 생각하기 나름으로 괜찮은 구석이 좀 있다.
이 장점을 설명하자면 필연적으로 나의 식사에 관해 논해야 한다. 나는 엄청나게 잘 먹는다. 어느 정도냐면 주변 사람들이 늘 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할 만큼 잘 먹는다. 커다란 코스트코 피자를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 해치운다. 보통 배가 차는 것보다 같은 맛에 질리는 것이 더 빠르다. 재능과 흥미가 겹쳐진 케이스라서 먹는 걸 또 좋아하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 나는 약간 뭐랄까. 축복받은 먹부림 인간이다.
그러나 신화 속 축복받은 이들이 결국 그로 인해 파멸을 맞이하듯, 나 또한 이 식사량으로 인해 곤란한 상황을 자주 맞이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절제를 못 하는 타입이다. 예전에 아는 형이 내가 국밥 먹는 걸 보고서 기겁을 한 적이 있다. 뭐 그렇게 많이 먹냐고. 그때 내가 한 이야기가 뭐였더라. 국물이 리필이고, 밥이 리필이고, 지금 내 배에 공간이 남았는데 망설일 이유가 어디에 있겠냐, 뭐 이런 투였던 것 같다. 정말 그냥 말 그대로, 그냥 먹는다. 그렇게 먹으면 보통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하나. 살이 찐다. 둘. 배가 아프다.
나의 투실투실함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내 위장은 정말 민감하다. 한 인간이 내장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문젯거리를 아마 종양 빼고는 다 가지고 있을 거다. 물론 이렇게 살다가는 그것도 생길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다시 말해 덩치는 오질나게 크고 아주아주 허약하단 소리다. 예전에 유행하던 개복치 같은 느낌(실제로 개복치는 굉장히 튼튼하다고 하긴 하지만 대충 넘어가자)의 위장이랄까. 어떤 음식을 먹어도 그 음식 때문에 다음날 배가 아플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가끔은 죽 같은 거 먹어도 그냥 스트레스 받았다고 아프다. 근데 난 그냥 먹는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봐도 무식하다. 요즘은 한동안 살뺀답시고 단백질류만 먹어버릇 해서 그런가 탄수화물류를 먹으면 배에 가스가 차는 문제가 생겼는데 그럼에도 난 국밥을 먹는다. 아마 미친놈 맞을 거다. 나는 세상 사람 눈치 다 보지만 내 눈치는 안 본다.
피자를 좋아한다. 그런데 먹고 나면 꼭 다음 날 배가 아파서 너무 슬프다. 그런데 이 복통이 내가 피자가 잘 안 받아서 그런 건지 혼자서 한 판을 다 먹어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다. 대충 그런 매커니즘으로 돌아가는 인생이다.
예제를 음식으로 들긴 했다만 음식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이러하다.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절제를 못 하는 스타일이다. 사람 하나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온 우주를 그 사람으로 가득 채우고, 영화 하나에 빠지면 한동안을 그 이야기 속에서 헤엄친다. 어떤 물건에 꽂히면 거의 그 물건과 결혼을 하다시피 한다. 한참 음악에 미쳐 있을 때는 소개팅 나가서 여섯시간동안 음악 이야기만 하다가 대차게 까인 적도 있다. 그냥 나는 전봇대에 박기 전까지 직진을 하는 인간형이다. 사실 전봇대에 박으면 차를 버리고 절뚝거리며 뛰어갈 것 같다. 아님 뭐 기든가 죽든가 하겠지 뭐.
그런 의미에서 내가 주량이 약한 것은 인생에 있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싶다. 만일 내가 주량이 셌더라면 아마 삼 년쯤 전에 술에 취해서 어디 진창에 박힌 채 소리도 소문도 없이 생을 마감했을 것이라고 감히 예측해볼 수 있다. 굳이 이런 극단적 예제를 들지 않더라도 좋은 점은 많다. 일단 숙취가 없다. 필름 끊길 일도 없다. 숙취와 알콜성 치매가 나를 찾아오기 전에 나는 정신을 잃는다. 음식으로 치자면 위장이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기도 전에 배가 차서 못 먹는 느낌이려나. 사실 가장 좋은 건 바로 빠르게 찾아오는 행복이다. 얼마나 가성비가 좋은 인간인가. 맥주 한 캔으로 온 세상 행복을 누릴 수 있다니.
어찌 생각하면 내가 술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이 약한 주량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약한 게 또 약한 것 대로 매력이 있는 법이다.
사실 이런 것들이 꽤 많다. 예를 들자면, 카페인이 정말 안 받지만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 그 날은 하루종일 복통에 시달리고 잠도 못 잔다. 하지만 커피의 그 맛과 향 자체가 너무 좋다. 가장 좋아하는 향이 커피향일 정도로. 그리고 카페인이 몸에 들어갔을 때의 그 번뜩이는 느낌도 너무 좋다. 카페인이 잘 안 받다 보니 한 모금만 마셔도 온 몸이 각성 상태에 들어갔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 특유의 그 느낌은 말할 것도 없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커피를 좋아하는 느낌이 있다. 결국 커피에 관한 모든 것들은 빠짐없이 사랑스럽다. 나는 커피를 잘 못 마시지만. 만일 내가 카페인이 잘 받았다면 하루에 몇 컵씩 비싼 커피를 들이켰겠지. 뒤늦게 찾아오는 그 번뜩임마저도 좋아서.
여전히 나는 주제도 모르고 카페에 갈 때마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친절하기 그지없는 디카페인 옵션도 필요 없다.
사랑하지만 완벽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완벽할 수 없어서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 주제를 모르고 정도도 모르는 멍청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 멍청해야 인생이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끝까지를 전부 아는 게임은 보통 재미가 없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게임도 더럽게 못 하지만 더럽게 좋아한다.) 가끔 일부러 멍청해지고 싶을 때가 있다. 비이성적이고 멍청하다고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멍청한 감성충만함이 좋다. 원래 사랑하면 눈 뻔히 뜨고도 속아주는 거다. 나한테 술이 그렇고 다른 모든 것들이 그렇다. 어쨌든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
꼴랑 맥주 한 캔 먹은 인간에게 사랑한다는 문자를 오십 통쯤 받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조금 미안하긴 하다. 하지만 어쩌랴. 기네스는 몇 번을 마셔도 감탄이 나오는 맛이고, 내 우주는 그대들로 가득 찬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