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지옥에서 온 맥시멀리스트의 도서구매기록
하지 않을 것들을 모으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영화 VOD를 잔뜩 결제해 놓고 한참을 하드 어딘가에 처박아둔다거나, 할인하는 게임을 잔뜩 사놓고 몇 년을 플레이하지 않는다든가 뭐 그런 것들. 하지만 역시 제일 심각한 것은 아마 책을 모으는 버릇일 것 같다. 읽지도 않고 사두기만 한 책이 얼마나 많은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종이책이란 물체는 사람의 눈과 손을 끌어당기고 신용카드를 꺼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귀납법적으로 볼 때 아무래도 표지를 넘기게 하는 힘까지는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군생활을 마치니 읽지 않은 책들이 또 잔뜩 쌓여 있었다. 군대에서는 책을 읽기도 많이 읽었고, 사기도 많이 샀기 때문이다. 아무리 거기서 책을 많이 읽어도 사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적금을 하고 남은 월급은 대부분 동성로 교보문고에 투자되었으니. 월급이 모자라면 엄마가 밥 굶지 말고 살라고 준 카드로 밥을 굶고 책을 사러 갔다. 내가 확실히 아닌 게 두 가지 있다면 아마 효자와 제정신이겠지.
그래도 완전히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데려온 지 한참이 지나고도 읽히지 못한 책들을 보면 왜인지 기분이 불편해졌다. 군생활이 끝나고 남은 책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읽어야 할 것만 같았다. 사실 도의적으로도 읽는 게 맞는 일이라 생각한다.
비수도권에 살고 있었으므로 복학을 하려면 방을 구하고 이사를 해야 했다. 내가 구한 방은 아주 작았다. 그러나 내가 절대 아닌 게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미니멀리스트다. 이사를 가면서 나는 쓸 데 없는 짐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갔다. 당연히 책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겨우 삼 평 남짓한 방에 겨우 육 개월 살러 가면서 커다란 리빙박스가 꽉 찰 만큼의 책을 싸들고 갔다. 군대에 있는 동안 읽지 못한 책들이었다.
이사를 가서 책을 정리하고 나니 책이 책꽂이 네 칸 반을 가득 채웠다. 방이 작아도 책꽂이 많은 곳을 고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 학기에 열 권 넘는 책을 더 샀다. 아직도 그 방에 그 책들이 다 들어간 게 제일 신기하다.
전역 직전의 한가한 시간동안에도 읽지 않은 책들을 학기 중간에 읽을 리는 없었다. 복학생의 객기가 빚어낸 지난 학기는 살면서 경험한 학기 중에서 가장 버거운 학기였기에 더 그랬다. 전공 논문이나 아르바이트의 단톡방 알림을 읽기에도 벅찼다. 지난학기에 읽은 책이 두세 권쯤 되려나. 아무튼 그 책들은 여전히 새 것 그대로다.
이사를 한 차례 더 예정하게 되면서 서울에 있던 짐을 사정상 아버지 편에 맡겼다. 그 많은 책들을 내가 바리바리 싸들고 내려올 수는 없었으니 당연히 책들도 아버지 계신 곳(이렇게 말하니까 분위기가 무슨 감동 다큐멘터리 톤 같아지는데 아버지는 철원에서 나보다 튼튼하게 지내고 계신다)에 두었다. 아마 이사를 가기 전까지는 계속 그쪽 편에 있을 거다.
종강 이후 몇 주간 다녀온 봉사활동이 끝나면서 다시 바빠지기까지 제법 긴 공백이 생겼다. 웃긴 점은 여기서 발생했다. 지금 나는 살면서 이래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한가하다. 다시 말해, 미뤄 둔 책을 읽는다면 지금 읽어야 한다는 소리다. 그러나 이사를 가기 전까지 내 책은 휴전선 언저리에 있고, 이사를 갈 때쯤부터는 나는 다시 바빠진다.
책은 한참 뒤에나 다시 읽게 될 것 같다. 별 수 없다. 쌓아둔 VOD라도 소탕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