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의도는 함께 가거나 가까이 가거나
작년에 페이스북에서 어떤 글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길지는 않았지만 정신을 헤집어 놓기엔 충분했다. ‘오늘은 장애인의 날이래ㅋㅋ 장애인 친구 태그ㅋㅋ’ 그 게시글에는 좋아요와 댓글이 꽤 많이 달려 있었고, 딱히 같은 내용을 올린 글로서 유일하지도 않았다. 평등과 연대를 말하는 2019에도 이런 글이 인기를 끌다니. 사람들은 거기다가 좋아요를 누르며 각자의 친구를 태그했다. 누군가는 ‘또 불편러들 납셨네 ㅉㅉ’ 하고 말하기도 했다.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충격을 가라앉히고 곰곰 생각해 보면 사실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내 주변에도 여전히 장애인이라는 말을 욕으로 쓰는 사람이 많다. 2020년에도 그렇다. 병신까지는 갈 것도 없다.
인권과 관련한 이슈를 다루는 포스팅에서는 싸움이 끊이질 않는다. 언제나 그래왔다. 작년쯤까지 자주 보였던 댓글의 흐름이 있다. 한참을 싸우다가 누군가 이런 식의 말을 한다. 응 너 게이새끼. 응 너 메퇘지. 응 너 쿵쾅이. 응 네 몸무게 80키로. 응 너 장애인. 응 니 엄마 흑인. 그래 너 걸레. 어쩌고 저쩌고. 그러고서 상대방이 이에 대해 지적하면 이렇게 응수한다. 본인도 ~~라고 말하니까 발끈하네. 나쁜 거 아니라면서 너는 왜 그걸 불편해하냐. 위선적이네. 욕도 아닌데 네가 불편해하고 있는 거네. 뭐 이런 식이다. 그 말 덕분에 속이 한 층 더 불편해진다. 음, 올해도 이런 걸 좀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 흐름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실 저러한 댓글의 플로우는 너무 뻔하게도 눈가리고 아웅을 하는 꼴이다. 당연하게도, 올바른 사람들은 위에 언급된 표현들이 모욕의 성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저 대화에서 핵심적인 건 따로 있다. 의도. 상대방이 실제로 어떤 표현을 사용했냐는 것은 사실 이런 대화에서는 부차적이 된다. 인형 같다는 말은 보통 칭찬으로 사용되지만, 발화 의도에 따라서 비하적 의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언급된 말들 역시 동일하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의식의 상태, 맥락상의 발화 의도 등을 고려했을 때, 아, 저 사람은 나를 모욕하기 위해 저 말을 사용했구나, 하는 판단이 서는 것이다. 무고한 단어에 차별의 맥락이 담기게 된 것이다. 그럼 그 마음을 직면한 사람들은, 공격을 받았다는 것을 느낀다.
장애인의 날을 두고 악질적인 농담을 하는 것도 결국 같다. 장애인이라는 말 자체는 무고하다. 단순한 지칭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말에 비하적 맥락이 담긴 채로 사용되는 순간, 그 말은 유해해진다. 다시 말해서, 불온한 의도로 사용된 무고한 말은 불온하다.
이러한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비하 표현이 인기를 끌던 와중, 새로운 방향성의 문제가 최근 등장했다. 최근 모 고등학교에서는 졸업사진에 블랙 페이스를 한 학생들이 등장하여 문제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블랙 페이스가 인종차별이라며 문제제기를 했고, 어떤 사람들은 학생들이 차별의 ‘의도’ 없이 단순히 피부에 까만 칠을 했을 뿐인데 무엇이 문제냐며 되물었다.
블랙 페이스는 역사적으로 유구한 차별의 맥락을 담고 있는 이슈이다. 백인들은 오랜 시간동안 흑인들을 인종적으로 차별해왔고 그 차별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그 차별의 상징 중 하나가 바로 블랙페이스이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조롱하기 위해서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과장되고 왜곡된 몸짓을 하며 연신 웃어제꼈다. 단순한 검정 칠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이 존재하는 차별의 행위인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전범기가 단순한 집중선 마크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다시 말해, 블랙 페이스라는 행위는 의도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 맥락을 가진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차별의 의도가 없었음에도 이는 이미 차별의 상징으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학생들이 가졌던 의도의 순수성(학생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한국의 교육현실에서 이러한 점에 대해 학습할 기회는 없다시피 했을 것이고, 모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이제부터 배워 나가면 될 일이다. 언제나 잘못한 것은 어른 쪽이다.)을 거론하며, 의도적으로 한 차별행위가 아닌데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사람들이 문제가 있는 것이냐고 말을 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해 문제를 거론한 당사자에게 블랙 페이스가 왜 차별이 아닌지에 대해 알려주겠다며 사이버 테러와 일장 연설을 했다. 역사적 맥락을 거론하는 이들에게는 그거랑 그거랑 같냐고 말하며 일축했다. (물론 이들이 ‘의도’외의 다른 의미있는 답을 주지는 않는다. 금발도 백인 혐오냐고 되물을 뿐.) 한국인들에게 왜 자신이 전범기를 사용해도 문제가 없는지에 대해 가르치려 하던 존 레논의 아들이 떠올랐다. 어떤 존재는 존재 자체로 무고하지 않다.
최근 이 사태를 보며 한국 인터넷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의도를 어설프게 가려서 이루어지는 조롱’을 공공연히 사용해 왔다는 것이 떠올랐다. 이 점은 이 일을 한 층 더 괴상하게 만들었다. 무고한 단어를 자신의 의도를 담아 사용하며 조롱을 일삼았던 사람들이, 그러면서 ‘이 단어는 무고한데 왜 너는 유난이야?’ 하고 되물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맥락을 가진 행위에 의도가 없었으니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 단어는 무고하지만 조롱의 의도를 담았으니 조롱이다’ 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이번 블랙 페이스에서 의도의 유무를 거론한다거나, 단어의 무고함을 주장하다가 학생들에게는 조롱의 의도가 없었더라도 행위 자체가 무고하지 않으니 문제적이라 말한다면 차라리 일관성이라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조차 않다. 이 비일관성은 온전히 차별을 향해서만 열려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거랑 그거랑 같냐?
사실 이 문제적 상황에서 우리가 내릴 답은 간단하다. 둘 다 문제라는 것. 문제적 상황에서 문제가 답이라니! 하지만 문제를 내야 풀기도 풀 수 있는 법이다. 무고한 단어를 비하적 맥락을 담아 사용하는 것도 문제고, 그 자체로 비하적 맥락을 담은 것들 역시 문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들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하나 지적하며 배우고 생각하고 고쳐 가야 한다.
검정색 칠이 비하적 의미가 없었더라면. 사실 그러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은 흑인 당사자들일 것이다. 여성들은 여자 같다는 말에 어떠한 편견이 담기지 않기를 바라고, 장애인들은 장애인 같다는 말이 조롱의 의도로 쓰이길 원하지 않으며, 게이들은 게이 같다는 말이 어떠한 특성을 서술하지 않기를 바란다. 뚱뚱한 이들은 뚱뚱하다는 말이 몸무게가 많이 나간다는 단순한 사실 그 자체 외의 맥락을 담지 않기를 원한다. 한국인들은 찢어진 눈이 정말로 찢어진 눈만을 말하길 바란다. 그러나, 보통은 그렇지 않다. 어떤 표현은 이미 역사적 맥락을 획득해 버렸고, 어떤 표현은 그렇게 되어가는 중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우리를 나타내는 말이 그 말 외의 무언가를 섣불리 넘겨짚거나 서술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맥락은 중요하다. 의도나 맥락이 앞에 있든 뒤에 있든, 그것은 존재한다. 그래서, 그거랑 그거는 같다.
그 누구도 아이언맨이나 캡틴 아메리카의 코스튬을 따라할 때 싱크로율을 높이겠다며 얼굴을 하얗게 칠하지 않는다. 흰 피부는 흰 피부다. 그래서 우리는 흰 피부를 칠하지 않는다. 이것과 그것은 다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