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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굽기 Mar 21. 2018

습관성 핀트 결핍증

돌고 도는 골목이 큰 길가보다 편안한 사람이 있다.

아찔함만큼 매력적인 것이 없다. 가수 이적은 이걸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음의 끄트머리에서 음을 가늘게 튕겨 올리는 그의 기교가 그것을 드러낸다. 진성과 가성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는 그 소리는, 섹시하다. 삑사리와 삑사리 아닌 것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이 묘한 음 처리 방식은 부정의 여지없이 매력적이다. 정해진 선을 벗어난 음의 일탈이라고 하면 좋을까. 하지만 대부분의 일탈이 그러하듯이 아무래도 교과서에 나올 것은 못 된다. 따라하면 목 나가니까. 따라해 봐서 안다.


초등학교 2학년 1학기 즐거운 생활 수업에서 '맨손으로 빌딩 등반하기'를 즐길거리랍시고 소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교과서에 실릴 수 없는 그곳엔 아찔함이 있고, 아찔함에는 사람을 끄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이적의 그 줄타기는 유독 사랑스럽다. 의도적 삑사리라니. 게다가 아무도 따라할 수 없다니. 이 얼마나 반항아적이고, 어긋나 있고, 매력적인가. 이러니 나는 이적이라는 가수에게 빠질 수밖에 없다.


‘개드립.’ 내 지인들에게 나를 설명해 달라 부탁하면 아마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이 단어를 사용할 것이 분명하다. 부정할 생각도 여지도 없다. 의도였든 아니든 간에 말장난은 내게 있어 일종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버렸다. ‘위로가 필요한 당신, 엘리베이터를 타세요.’ 이 따위의 헛소리들을 틈이 날 때마다 주워섬기는지라. 개드립도 재판정에 서야 할 사유가 된다면 아마 나는 순순히 내 죄를 시인해야 할 테다.


내 말장난 뒤에는 수많은 수식어들이 따라다닌다. 참신한 노잼이라는 비교적 호의적인 평에서부터, 아재(이건 비교적 귀여운 편이다.)나 한국어 낭비, 아무 말 대잔치처럼 명백히 적의를 담은 이야기까지. 어쨌든 호감은 차치하고, 다들 별로 재미없어 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다만 아무리 짜증나는 성질의 것이라도 극에 다다르면 인기가 생기긴 하는 모양이다. 나는 이 재미없는 말장난으로 대학교 대나무숲 베스트 댓글란에 꽤 자주 이름을 올린다. 한 번은 어느 인터넷 신문 기자가 그걸 따다가 뉴스에 올리기까지 했으니, 이쯤 되면 도가 텄다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너무 긍정적인 단어 선택인가 싶기도 하지만, 왜, 도둑질에도 똑같은 표현을 쓰는 판에 개드립이라고 해서 못할 건 없지 않나.


물론 이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정도의 범행을 저지르려면 범행동기 정도는 있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재미없는 걸 듣고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재미있어서.’는 당연히 아니다. 하긴, 그런 걸 보고 즐거워하는 악취미가 없다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그건 제일가는 사유가 되기에는 박력이 좀 부족하다. 그보다는, ‘내가 세상을 보려는 각도의 문제’가 좀 더 박력 있는 주인공의 위치에 적당하지 않을까.


'핀트의 묘한 어긋남'이라고 하면 좋을까. 정석적인 위치에서 벗어난 상태로 세상만사를 보면 어디엔가 묘한 틈새가 보인다. 그 틈새에는, 짜릿함이 있다. 마치 이적의 삑사리 줄타기 같은. 그것이 내가 그 사이를 파고들어가는 이유이다. 많이도 안 되는, 약간이어야만 하는 그 약간의 비틀림. 시선의 일탈. 그것이 가지는 그 묘한 마력을 나는 언제나 거부하지 못한다.


말장난을 할 때 우리는 그 단어의 표면에 집중하지 않는다. 약간 비스듬하게 눈을 째뜨고 그 단어의 스펙트럼을 본다. 정면 돌파가 아니라 측면 공략이다. 그래야 틈새가 보인다. 그 틈새를 잡고 쪼개어 그 말이 가지는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안 그래도 못생긴 내 얼굴이 부으니까 신문의 부음 기사에 올라올 수준이 되어 버렸지 뭐야.’ 따위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도록. 그것이 내가 주목하는 비틀림이다.


그나마 글다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을 무렵부터 나는 저 비틀림에 집중해 왔다. 어떤 잘 배운 듯한 양반들은 내 글을 읽고서 글에서 키치가 보이네 뭐네 하기도 한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잘 모른다. 그냥 저 삑사리가 좋다.


나는 천부적으로 소심한 반항아였다. 악센트는 소심함 쪽에 두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반항심을 표출하고 싶었으나 소심함 탓에 스스로를 좌절시킨 나의 최종적 선택지가 바로 저 삐딱선이었으니까. 주어진 것을 괴상하게 해석하는 것이 내가 반항심을 표출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느 케이블 TV 회사에서 주최한 백일장에 참가한 적이 있다. 고등학생 때였다. 그 회사는 한창 디지털 방송 서비스를 런칭하고 있었다. 축복이라도 받고 싶었는지 그 양반들이 내건 글 주제는 ‘디지털 세상’이었다. 교과서 글쓰기 테마로 나오면 딱 적당할 종류였다. 끔찍하게 싫었다. 그래서 나는 ‘디지털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아날로그적 가치들에 대한 회상’을 주제로 글을 적어 내려갔다. 결국 ‘나는 디지털이 싫다’라는 말과 함께 글을 마쳤고,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하나같이 내게 미친놈이라고 욕을 했다. 나는 그 백일장에서 수필 부문 2위를 기록했다. 아마 삐딱선 중독의 단계까지 다다른 것이 그쯤부터였을 거다.


중독이란 단어를 썼다. 그래. 확실히 중독이었다. 어쩌면 반항아의 뉘우침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확실히 이 비틀림을 사랑한다. 헌데, 이 욕망을, 이 비틀림을, 내가 컨트롤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요즘 들곤 한다. 내가 좋아해서 이걸 하는 건지, 아니면 이 각도가 아니고서는 세상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건지. 확실치가 못한 것이다. 아무 데서나 아무 때에나 삐딱선을 타 버리면 좀 곤란하지 않은가.


밴드를 했었다. 보컬이었다. 잦은 삑사리로 리더의 골머리를 썩게 만드는. 나는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삑사리를 냈다. 고음에서도 냈고 저음에서도 냈다.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망치고를 둘 다 혼자 해냈다. 보컬인데 북도 치고 장구도 치고 혼자 다 해냈다. 참 착하기도 한 우리 밴드 멤버들은 내가 삑사리를 낼 때마다 내가 민망하지 않게 한껏 유쾌하게 웃어줬고, 나름대로 우습고 귀여운 별명까지 붙여 주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이것이 밴드 보컬에게 있어 심각한 문제임은 명백했다. 우리 멤버들이야 웃으면 웃는 거라지만, 관객들도 웃어버리면 그건 좀 곤란하니까. 이 문제도 해결할 겸 노래 실력도 향상시킬 겸 보컬 학원에 등록했다.


레이너는 정말 생각도 못한 진단을 내놓았다. ‘습관적’인 삑사리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 압력이 가해지면 내 목이 습관적으로 삑사리를 내버린단다. 사실이라면 그것 참 끔찍한 습관이었다.


이적의 창법이 너무 좋았다. 중학생 때, 지금처럼 노래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부터 나는 이적을 모창했다. 그 매력적인 삑사리까지. 이적을 따라하고 따라하고 또 따라했다. 그러다 보니 목이 그것의 모양대로 굳어 버린 모양이었다. 내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되어 버린 모양새인 모양이었다.


어쩌다 말싸움이라도 하게 되면 상황이 늘 비슷하게 흘러간다. 다들 그렇듯 와글거리며 사나운 말을 주고받다가, 상대가 나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내 말의 요점이 지금 그게 아니잖아. 그 소리를 들으면 조금 멍해진다. 밀리기 시작한다. 벌어진 틈새를 보다 보니 핵심을 볼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측면을 보다 보니 앞모습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핵심과 앞모습을 보아야만 할 순간에서조차도. 그래. 대화에서 삑사리가 나 버린 것이다. 매력적인, 섹시한 그거 말고, 무대를 망쳐 버리는. 음의 일탈이 아니라 음의 이탈. 이를 마주하는 순간의 관객이 일반적으로 웃음이 아니라 분노로 화답한다는 점은 보통의 삑사리보다도 더 끔찍했다. 가끔 더럭 겁이 난다. 이 비뚤어진 시야를 계속 안고 가다가 어느 순간에는 보통의 대화마저 어려워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음 하나조차 제대로 낼 수 없는 목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물론 나는 나의 시선이 좋다. 이 묘하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약간’ 틀어진 이 각도가 좋다. 내가 이적의 그 창법을 여전히 좋아함과 마찬가지로.


어떤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어조는 옛날 괴기 동화풍의 것이 어울릴 것 같다. 둘이 너무 좋아해서 항상 손을 꼭 붙잡고 다니던 자매가 있었는데 어느 날 손이 서로 붙어버려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질 수 없게 되었다더라, 뭐 그런. 이 자매는 앞으로 어쩌면 좋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노력을 좀 해야 할 것이다. 손이 서로 붙은 상황에서 싸우기라도 하면 그거 참 답 안 나오는 상황일 테니. 그 이후에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을 배워야겠지. 어차피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 할 거라면.


내게 요구되는 답안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내 시선을 계속 사랑하고, 이 스타일을 어떻게 하면 멋지게 써먹을 수 있을까 궁리해야겠지. 평생 붙어있을 거라면, 쓸모 있는 게 붙은 쪽이 나으니까.


요즘은 이적의 스타일을 제법 비슷하게 따라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내 노래를 해야할 땐 모창을 그만두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의 매력적인 삑사리가 내 창법 구축에 큰 몫을 차지한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나는 그에 익숙해지고, 컨트롤 능력이 나아졌고, 결국은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아직 어렵긴 하지만 어쨌든 목에 가해지는 압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무기 중 하나가 되었다. 정석과 내멋대로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삐딱한 시선이 그렇듯이.


일탈을 시도하다 실수로 한 발짝 더 뻗어 이탈을 해버려도 별 수 없다. 삐끗함에 멈출 발걸음이었다면 진작 멈추었을 테다. 나는 아마 계속 숨 쉬는 듯한 말장난을 할 것이고, 틈새가 보이면 비집고 쪼개보려 들 것이다. 앞에 뭔가 보이면 옆모습을 보려 하겠지. 내가 살아온, 사랑한 방식대로. 내가 살아갈, 사랑할 것이 틀림없는 방식대로.


왜냐면, 그게 섹시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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