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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굽기 Mar 16. 2018

결국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사랑받기 위해 꼭 완벽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편파적인 건 안 좋은 거라지만, 아무래도 다른 책들보다 손이 좀 더 자주 가는 책들은 있다. 최근까지 그 자리에 있던 여행 에세이 한 권이 생각난다. 끝내주게 마음에 드는 제목, 순전히 그 이유만으로 데려온 책이다. 내용도 훑어보지 않은 채. 실수였다.


문제는 가벼움이었다. 온통 가벼운 것들로 칠갑이 되어 있는 책이었다. 글의 내용은 둘째 치고 그 밑에 깔린 생각이나 고민의 무게도 심히 얕았다. 이게 뭔가 싶을 정도로. 웃긴 건 이 짜증나는 책을 읽는 것이 그렇게 고역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 그렇게 자주 만날 수 있었을 거다.


물론 내가 당시 무거운 텍스트들에 조금 지쳐 있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입맛에 상관없이, 가끔 무식할 정도의 단맛이 당기는 때가 있듯이.


어쩌면 내가 기겁했던 그 가벼움이 나를 이 책과 가깝게 만든 지도 모르겠다. 화장실에 갈 때 전공서적을 들고 가는 취향은 없으니까. 기분전환을 위해 운명이 어쩌고 욕망이 어쩌고 하는 책들을 읽는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사실, 몇 번 읽다 보니 그리 나쁘진 않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고 데리고 있는 이야기들이 그 때보다 많이 늘었다. 그 책을 대체할 것들도 몇 권 생겼다. 내용과 질은 훨씬 마음에 드는 데다 여러 번 읽는 것에 지치지 않는다는 장점까지 그대로 가진 좋은 이야기들이다. 다만 아직 그 책의 기록을 깨지는 못했다. 꽤 오랜 시간 함께한 보통의 산책 코스니 이는 어쩔 수 없다.


책을 적게 읽지는 않았다고 자부한다. 이야기를 가진 것들은 웬만해선 싫어하지 않으니까. 영화도 만화도 음악도 드라마도 좋아하는데 책이라고 싫어할 이유가 없다.


마음에 드는 책은 많았고 사랑한다는 표현을 붙여도 과함이 없을 책들도 있었다. 하나하나 예를 들기에는 아마 내가 천일야화의 주인공이 되어도 시간이 모자랄 테다.


내게 가장 강렬한 초반부를 선사한 책이 있다. 내게 결코 잊을 수 없는 화두를 던진 책이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문장들이 담긴 책, 가장 짜릿한 스토리를 가졌던 책,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 등장했던 책이 있다. 그런 책들이 있다. 취향이 워낙에 중구난방이라 공통점 찾기도 어렵고, 그냥 많다는 말 밖에는 못 한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이 책들의 대다수는, 다시 펼쳐보지 않았다는 것. 나는 그 이야기들을 다시 만나지 않았다. 아니, 만나지 못했다.


물론 나는 여전히 이들을 그리워한다. 누군가 이 책들에 관한 말을 꺼낸다면 아마 난 그 이야기들이 얼마나 끝내주는지에 대해서 한참을 떠들 거다. 사랑하지 않으면 못 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들은 너무 멀리 있다.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존경스럽지만 대하기 어려운 사람 같다. 그들이 정말로 어떤 사람이고 나에게 얼마나 친근한 얼굴을 가지는가 하는 질문과는 어디까지나 별개의 문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30박 31일의 유럽 여행이나 일 주일 간의 몽골 여행을 꿈꾸며 산다. 실제로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끝내주는 모양이다. 그러나 매일을 짜릿한 해외여행 스케줄 속에서 살 수는 없다. 가벼운 차림으로 나설 수 있는 산책은 살면서 꽤 자주 필요하다.


한 때 가장 자주 읽었던 그 책의 제목에는 보통이라는 말이 있었다. 나를 홀린 단어. 사랑스럽다.


가끔 보통이라는 낱말을 내 마음대로 정의하곤 한다. 함께 숨 쉰다는 것, 쯤으로.


내가 그러하듯, 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교과서에 등재될 정도의 인격자들은 아닐 것이다. 확신하고 있다. 우리는 사소한 것들로 트집을 잡고 트집을 잡힌다. 모난 구석이 많은 건 둘째 치고 둥근 구석이 아예 없는 것 같은 경우도 허다하다. 책이었다면 걸작은 아니겠지. 매도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장 위인전에 등재되어도 좋을 사람이 주변에 없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어디나 한 명쯤 있으면 그건 위인이 아니니.


‘이상적인’ 주변인들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아니, 스케일이 너무 커지니까 일단 주변에 위인 한 명 있는 걸 가정하자. 그런 사람 한 명쯤은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자랑하고 다닐지도 모른다. 내 친구가 무슨 어떤 일보 일 면에 심심할 때마다 나오는데 요즘은 조금 뜸해요 요즘은 저랑 놀러 다니느라 심심할 일이 드물거든요 신문사 나들이가 질렸는지 요즘 유독 놀자고 보채더라구요 하하하, 뭐 이런 식으로 허풍을 떨어 볼 수도 있고. 감탄이 나오는 사람 한 명 정도가 내 주변에 있다는 것은 감사할 일 아닐까. 한 명. 한 명 정도까지는. 어디까지나.


내 아는 사람이 모두 교과서 출연 대상자인 삶을 가정해 본다. 사실 가정하기 싫다. 끔찍한 상상을 하는 취미는 없다. 어디 말 한 마디 감히 꺼낼 수는 있으려나. 나의 다소 멍청한 일상을 비집고 들어오는 위대한 비일상 쯤이야 어느 정도 맞이하려 노력해볼 용의가 있다. 다만 내가 그들의 세계에서 멍청한 비일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글쎄. 그런 건 싫다.


고매한 인간은 위대하고 지적인 대화는 찬란하다. 나는 반지성주의자는 아니다. 다만 치킨에 맥주를 먹으면서까지 그 가치를 이루어 내고 싶지는 않다. 연애에 대한 가십을 이야기할 때 에리히 프롬이 쓴 사랑의 기술을 들고 오는 사람과 건배하는 건 별로다. 알랭 드 보통만 나와도 환장할 판에 무슨 놈의 철학이야. 다양성을 중시하는 세상에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있는 거라지만, 이런 게 내 타입이 아니라는 정도는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우리의 삶이 때때로 질 높은 대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매 끼니를 파인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으며 때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국밥과 덮밥과 볶음밥과 햄버거와 라면을 사랑한다. 스테이크 썰어 먹는 것이 맛있는 줄 몰라서 저들을 사랑하는 건 아니다. 일상은 고매함의 하위 대체품이 아니므로.


다만 이들은 내가 숨 쉬는 보통일 따름이다.


그런 사람과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여행에 대한 기대를 늘어놓으면 여행에 대한 기대를 늘어놓는 사람. 커피 이야기를 하면 스타벅스의 새 커피 이야기를 하는 사람. 그리고 내가 그렇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랑스러움이야 말할 필요가 있을까. 고매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런 이들이 좋다. 매일 찌개에 밥 비벼 먹으며 이야기 하고 싶은.


단골처럼 만나게 되는 책들이 그렇다. 일상적으로 생각할 법한 소재에서 일상적인 생각을 이끌어 내어 일상적인 문장으로 적어낸 책들. 그럼에도 이따금 빛나는 매력이 비어 나오는 책들. 그들이 세계적인 문학상을 받거나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선에 선정되거나 이 시대를 빛낸 문학으로 선정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멋진 타이틀을 몇 개씩 가진 이야기들과 알고 지낸다. 좋은 책들이다. 다만 그 훌륭한 이들이 내가 자주 만날 단골서적은 되지 못할 것 같다. 나는 보통의 책들을 사랑한다. 가볍게 꺼내 들 때 내게 산책을 선물하는 책들이 좋다. 혹은 잡담 나누기 좋은 친구를 만나는 느낌을 주거나. 나는 맥주를 마시며 하는 잡담을 좋아한다. 그 위대하지 않은 살가움이 좋다.


어쨌든 우리는 일상을 살고 있으니까. 어쨌든 우리는 일상을 살아야 하니까.


별 것도 아닌 책을 돈 주고 산다는 핀잔을 간혹 듣는다. 부담 없는 수필집이나 단편집을 자주 사 읽어서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물론 언제나 변명은 준비되어 있다. 그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사랑한다고. 탁월하지 않을지라도. 아니, 어쩌면 그 아름다운 보통을 탁월하지 않다 말하는 것이 실례일지도 모르겠다.


일상에도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 사는 그 자체를 담은 이야기들이, 찬란하고 위대하지 않다고 해서 눈길 주기에도 아까운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안타깝다. 사람들은 어떤 것들에 대해 가끔 너무 엄격해진다.


여러 번 읽으면 돈 하나도 안 아까운데.


스테이크 가게는 어디 경사 난 날에나 기웃거리기로 한다. 나는 일단 햄버거를 안 먹으면 죽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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