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기억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
비행기는 구름을 가르고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는 유난히 잔잔했지만, 그 잔잔함이 오히려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나는 좌석에 몸을 기댄 채, 저 아래 어딘가에 있을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만나게 될 할머니가 그 섬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이유 없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제주에는 돌과 바람, 여자가 많아 삼다도라고 했다.
그냥 단순히 섬이라 그런 줄 알았다. 배 타는 일을 남자들이 했을 거니까.. 그런데 왜 제주만 여자가 많다고 이야기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냥 노래와 tv속 드라마와 영화 속 모습으로만 기억하고 외면했다. 섬 전체를 둘러싼 돌담들을 누가 옮겨 쌓았는지조차 모르면서.
멀리, 희미하게 섬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주도였다. 바다 위에 떠 있는 그 섬은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파도가 햇빛에 반짝이며 부서질 때마다, 마치 수많은 목소리들이 겹쳐져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문득, 그 목소리들이 단순한 바람 소리나 물결의 움직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오랫동안 말해지지 못한 이야기들이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아니,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침묵을 떠올렸다. 이유를 묻지 않았고, 할머니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 아주 드물게, 눈빛이 먼 곳을 향해 있을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할머니는 전혀 다른 시간 속에 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자, 바다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파도는 여전히 부서지고 있었고, 그 리듬은 이상하게도 사람의 숨결과 닮아 있었다. 들려오지 않는 소리들이,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는 이름을 불렀을 것이고, 누군가는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살아남았고, 누군가는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저 파도 속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최근에 본 다큐멘터리 한 편을 떠올렸다.
제목은 목소리들. 그 영화는 사건을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사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꺼내는 기억을, 조용히, 끝까지 듣게 만들었다. 그 안에는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특히 여성들의 이야기였다. 말할 수 없었던 일들, 말하면 더 큰 상처가 되었던 기억들, 그래서 평생을 침묵 속에 묻어두어야 했던 시간들.
그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한 할머니가 조용히 입을 열던 순간. 그건 단순한 인터뷰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시간이,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 말은 작았지만,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한참을 말하지 못하고 들리지 않는 작은 웅얼거림과 겨우 꺼내신 한 마디.
"죄송합니다...."
많은 말보다 더 많은 전달이 다가왔다.
수십 년도 넘은 그 오래된 기억이지만 할머니의 눈에는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 공기와 온도, 바람까지도 그날들의 아픔을 가지고 계신 듯했다. 혼자만 살아남아 미안하고, 바쁘신 분들 촬영하는데 시간만 끌어 죄송하고, 조리 있게 말을 잘하지 못해 또 미안하다는 표현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행기 창밖의 파도는 여전히 같은 리듬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기억의 흔적처럼 느껴졌다. 사라지지 않고 반복되는 것. 잊히지 않고 계속해서 밀려오는 것.
나는 생각했다.
왜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이제야 듣게 되었을까.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목소리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라는 곳에서는 각자만의 이유를 들어 미사일을 쏘고 포탄을 날리고 있다. 아무 이유도 모르는 사람들은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다가 올 하루를 기다리며 잠들다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고, 평범한 학교나 일터에서 사라져야 했다.
명령을 내리고 그를 따르고 그리고 다시 그들은 화려한 파티를 즐기고 축배를 들겠지만, 돌아오지 않을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몸은 살아도 마음은 함께 끝이 난다.
비행기는 착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주는 이제 분명하게 보였고, 그 안의 마을들과 길들까지 눈에 들어왔다. 저 어딘가에 할머니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할머니의 기억 속에는,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시간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아니, 끝까지 들을 수 있을까.
파도는 계속해서 부서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제주도는 단순히 아름다운 여행지가 아니라,
수많은 목소리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라는 것을. 그 목소리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듣지 않았을 뿐이다.
비행기가 땅에 닿기 직전, 나는 창밖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바다와 섬,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
이제, 그 이야기를 들으러 가는 길이다.
# 이 글은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목소리들'을 보고 난 감상을 청년이 제주도로 할머니를 만나러 가면서 쓴 일기처럼 만든 글입니다. 소설과 수필 중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