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렇게 된 건 나의 부모탓일까?
우리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유년기의 대부분의 내 주 양육자는 외할머니셨다. 신생아 때는 고모들의 손에, 유아기에는 어린이집 종일반 언니 오빠들 사이 막내로 지내며 자랐는데 그 시절은 내가 오롯이 마주한 순간들이라기보다, 아빠가 남겨둔 육아일기와 앨범 속 사진을 통해 복원된 기억의 습작들이다.
다음 썰들도 선택적인 기억의 단편일 뿐이지만, 적어도 나의 회상이라고 클레임 할 수 있었던 순간들 중에서 외할머니가 나에게 자주 하셨던 말이 있다.
"즈그 부모는 하나도 안 그른데, 이기는 우짜다 이른게 나왔노?"
고학년 때 ADHD 아동에게 필수불가결한 당근과 채찍을 둘 다 잘 겸하시는 과외 선생님을 만나, "공부 잘하는 반장"으로 리브랜딩하기 전까지는 골칫덩어리로 (aka 이런것) 밖에 치부되지 않았던 내가 할머니의 관점으로 금쪽 진단을 내려보자면, 아마 이런 고충들을 꼽지 않았을까 싶다.
1.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늘 주변을 어지른다.
책을 좋아하긴 했다. 그런데 한 권 씩 꺼내서 진득히 보는게 아니라 책장에서 모든 책을 한꺼번에 후두둑 꺼내서 동시에 몇 권씩 "찍먹찍먹" 보다가 어디서 무슨 소리가 나면 "오잉?" 하고 달려가는 식이었다. 철두철미하고 정리정돈이 삶의 원칙인 할머니에게 치워 놓으면 어지르고 치워 놓으면 어지르는 초딩과 함께 공존 한다는 것은 마치 창과 방패의 전쟁이였을테다.
2. 뻐떡하면 울고, 부정적 감정 해소가 오래 걸린다.
비슷하게 혼이 나거나 거부를 당해도 동생은 수박 한 조각 쥐어주면 금세 잊고 티비 앞에 앉았다. 하지만 나는 당위성과 필연성이 납득이 되지 않은 채 욕구가 부정당하면, 그건 한낱 수박으로 퉁쳐지지가 않아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울고불고 짜증을 냈다. 하지만 할머니도 본인의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으면 그게 당신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였을 테고, 그럴 수록 성가신 아기호랑이의 포효를, 더 우렁찬 암사자의 고함으로 막아서셨다. 불이 불을 끌 수는 없는 법. 이런 불꽃파티 터지는 날엔 엄마가 퇴근하고 집에 올 때 까지 나는 구석에 찌그러져 훌쩍이고 있고, 할머니는 너덜너덜해져서 엄마한테 "쟈는 도대체 와 저라노" 라고 하소연과 함께 육퇴를 하고 엄마에게 바통터치를 하셨다.
3. 오감이 예민하여 손이 많이 간다.
“할머니, 수건에서 쉰내 나요.”
“할머니, 계란이 너무 짜요.”
“할머니, 바깥에서 무슨 소리 나는 것 같아요."
근데 예민한 건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는데 내가 화장실을 한 번 다녀오면 할머니는 5분 간격으로 화장실 문을 열고 닫으며, "니 똥냄새는 와 이리 지독하노!" 우웩우웩, 똥스라이팅을 하셨다. '똥은 나만 싸나. 하다하다 이젠 생리현상까지 구박받노, 서럽구로ㅠㅠ' 이렇게 섬세하면서도 비위가 약한 할머니에게도, 무지성 비난(?)에 상처가 쌓이는 손녀에게도 통풍 잘 안되는 24평 집에서 하루 종일 부딪히며, 오매불망 엄마 퇴근만을 기다리는게 쉽지 않았다.
(쓰고보니 좀 웃기긴 하다. 그럼 도대체 할머니는 어떻게 말을 했어야만 본인의 니즈를 명쾌히 전달하면서도 손녀의 감수성을 헤아린 혜답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손녀의 배설물은 손자의 꽃향기나는 황금똥과는 달리 나의 후각에 굉장히 불쾌한 임팩트를 주는구나. 혹시 소화기관이나 장의 문제가 아닌가, 너의 건강이 심히 염려되고 나도 화장실에 코 안막고 드나들고 싶으니 우리 함께 솔루션을 찾아보자." .... 에잇! 제이미맘도 이렇게 까지는 안 하겠지^^)
"즈그 부모는 하나도 안 그른데 이기는 우짜다 이른게 나왔노?" 할머니도 인간이기에 이해가 안 될 말도 아닌데, 스무 해 쯤 지나서 알았다. 내 기질은 부모님보다는 양가 할머니께로부터 반반씩 물려받았음을..ㅎㅎ
친할머니의 높은 이상에 그렇지 못한 감정조절능력 x 외할머니의 강인한 생활력보다 더 강력한 인정욕구 + 알 수 없는 X팩터들 = 육아난이도 최상 ADHD아동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ADHD는 기질적인 문제이지, 부모의 훈육 탓이 아니다. 조금 더 과학적으로 풀어서 설명을 해보자면, ADHD의 유전률은 7-80% 로 추정된다. (Plomin & DeFries, 2013; Faraone et al., 2015 등) 부모로부터 기질을 물려받을 ‘상관관계(correlation)’는 강하게 작용하지만, 부모의 양육 태도 때문에 정상적인 뇌가 후천적으로 ‘ADHD 뇌’로 변한다는 인과관계(causation)는 아닌 것이다.
ADHD는 주로 전두엽 및 관련 신경회로의 기능 차이와 관련이 있으며,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며 발달하는 특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기간의 치료로 완전히 사라지는 병이 아니라, 당뇨나 난시처럼 평생 관리가 필요한 기질에 가깝다. 다만, 조기에 발견해 주 양육자와 학교 선생님들이 약물/인지행동치료/훈육을 적절히 병행한다면 아이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잠재력은 더 크게 끌어낼 수 있다. 반대로 방치되면 성인이 된 이 후 사회적, 정서적 어려움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내가 청소년기 처음 ADHD 진단을 받고 12년이 지나 또 다시 성인 ADHD라고 진단을 받았을 때, 이 뫼비우스의 띠같은 족쇄를 유전탓, 환경탓, 부모탓을 해보면 조금 나아질까 싶어 60대 엄마에게까지 ADHD 검사를 권했다. 결과는, 애석하게도(?) 엄마는 상위 2%의 지능 및 문제해결능력을 가진 ‘비(非) ADHD형 인간’으로 판명됐다. 하긴.... 30년 넘게 교편을 잡고 워킹맘으로 살아오신 것만 봐도, 도파민 추종의 의인화인 ADHD 프로토타입이 아니긴 한데, 이렇게 소거법을 써서라도 책임 전가를 하고픈 내 본능의 싹을 잘라버리고 싶었던 것 같다.
괜히 잘 살고 계신 우리 엄마만 미국서 잠시 들른 딸내미 때문에 정신과에 애먼 돈과 시간만 날렸지만, 이렇게라도 부모 탓을 덜어내는 게 대의라면… 나쁘지 않은 거래였고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합리화^^) 이런 나의 요구에 응해주신 엄마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무엇보다 이 경험을 통해 확신하게 됐다. ADHD는 부모의 탓이 아니다. 오히려 부모가 환경을 어떻게 조성해주느냐에 따라, ADHD 아동은 불완전함을 보완하고 잠재력을 꽃피울 수 있다.
ADHD 아동에게 부족한 것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Inhibition, 즉 억제 라고 할 수 있다.
행동 억제의 부족 → 과잉행동과 충동성
감정 억제의 부족 → 인지 부조화와 분노 조절 어려움
뇌의 억제 부족 → 말실수와 사회적 신호 결여
이러한 성향들을 그저 ‘부모가 뚜까패지 않아서 버릇이 없는 것’ 이라 손가락질하기에는 아이도 부모도 통제할 수 없는 뇌의 영역이 얽혀 있기 때문에 너무나 오류가 많다. 3년 전 부잣집 아이들이 모인 영재학원에서 초등학생들을 한학기 가르치며 느낀건, 부모의 능력이나 배경과 관계없이 다섯 중 한 명은 ADHD 성향을 보인다는 사실이었는데 그 때 터득한 아이들에게 정말 요긴한 도구들은 다음과 같다.
대학원 시절, 실라버스에 4개월 후 기말고사로 장기 프로젝트를 제출해야된다는 널널한 heads-up이 있어도 학기 초부터 달달이 25%씩 과제를 조금씩 누적해내가는 학생들은 드물었고, 과제 제출 1주일 전까지 미뤘다가 막판 스퍼트를 올리는 부류가 대부분이었다.
다들 논문이나 캡스톤을 염두에 두고 장기전을 목표로 삼고 대학원을 온 사람들인데 이렇게 날고기는 동기들 또한 급박함이 있어야만 머리가 더 팽팽(?) 돌아간다는게, 어쩌면 P고 J고를 다 떠나 사람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초인적인 힘이 생겨나는 존재가 아닌가 싶었다. (하루라도 쉬면 복리이자처럼 밀려드는 공부량을 어쩔 수 없이 매일매일 쳐내야 하는 의대, 약대, 법대생들은 제외.)
일반인들도 이런데, 시간 개념과 미래 지향적 사고가 약한 ADHD 아동에게 시간은 "천천히 하면 되겠지"라는 여유와 안심보다는 동기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뇌의 전두엽-선조체 회로가 시간의 흐름을 추상적으로 느끼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개념과 동기부여를 도와줄 수 있는 실천 팁:
a) “한 시간 동안 공부해”
→ “지금 4시니깐 5시까지 문제집 10쪽 풀자."
b) 타이머 (모래시계 혹은 스탑워치 등) 사용
→ 시간이 눈앞에서 줄어드는 걸 보여주기
c) 방학 숙제같은 장기 과제
→ 마감일을 잘게 쪼개 하루 혹은 시간 단위로 제시
서론에 잠깐 언급하기는 했는데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까지는 그렇게 학업에 두각을 나타내지 않다가 4학년 2학기 때 같은 아파트 공부방 선생님을 만나며 모든게 달라졌다.
"저희 애가요, 학교에서 반장도 하고요. 수학만 빼고 다 왓따거든예~" 라는 고슴도치 엄마의 지극히 주관적인 딸 소개와, 같은 반 친구 재연이 엄마의 치맛바람으로 겨우 생긴 공부방 TO에 아슬아슬 들어갔고, 공부방 선생님은 나를 며칠 지켜보시더니, "수학 빼고 다 잘한다더니, 국어 말고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라고 거품을 확 빼주셨다.
그런데 그 평가는 하루에 세 시간씩 붙어있어봐야 내릴 수 있는 거였고, 엄마는 일한다고 바빠서 차마 챙기지 못했던 부분을 선생님이 관통하셨던 것이다. 나는 그 선생님을 만난 기점으로 학교 마치자마자 놀이터도 우리집도 아닌 항상 또래 아이들이 복작복작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공부방으로 직행해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었다. 어린 나이에도 어른이 하는 말이 진짜 성가셔서 하는 구박인지 아니면 애정에서 나오는 훈육인지 알 수 있는데, 그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쏟는 감정적인 투자는 할머니한테서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따스함이자, 나에게 커다란 보상이었다.
또래 친구들보다 더 선생님께 이쁨을 받고싶어서 내 수업시간이 올 때까지 옆 옷방에 쭈그려서 사회, 과학, 역사 과목을 암기를 하거나 수학 문제를 풀곤했다. 한 시간 후에 내 수업시간이 오면 선생님이 방문을 열고 "아이고~ 이것봐라. 오늘도 일찍왔어? 이 애살쟁이를 어쩌면 좋아?" “은경이는 근성이 있어. 이렇게만 하면 뭘해도 성공한다.” “은경이 같은 딸 하나 있으면 얼마나 든든해.“ 라는 인정어린 말을 듣는게 사실 쪽지 시험 점수를 잘 받는 것보다 더 행복했다. (지는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는 걸 돌려 말하는 험블브래그인가 싶은 분들을 위해 하나 덧붙여보자면—3X년 살아보니 내가 김연아, 손흥민급의 GRIT이 내재되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되었고, 내가 멘탈이 무너져서 못 할 것 같다라고 생각하면 그대로 실현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자기효능감은 타인의 기대와 인정에 많이 영향을 받는데, 그게 가장 건강한 자아상은 아니지만 어쨌든 여기서 내 요지는 “나의 보상 = 내가 인정하는 사람의 인정” 이게 자랑이면 뭐 자랑인 걸로.)
그렇게 4학년 때는 중간고사에서 수학 45점 받던 내가, 5학년이 되면서 부터 학기마다 수학경시대회 상을 받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기억이 난다. 옆반 수학1짱 원용이라는 친구가 나랑 같은 6학년 4반에 배정을 받고 "와, 내 한은경이랑 같은반임? 점마가 KMC 나가면 싹 다 발라 버릴 걸." 이라고 경계와 존경이 반반 섞인 말을 급우들 앞에서 내뱉었는데 이걸 아직도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결국은 나에겐 인정이라는 보상이 그만큼 또렷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ADHD 뇌는 보상회로(특히 도파민 신경전달)가 일반뇌 보다 둔감하다고 한다. “처벌”로는 행동 억제가 잘 안 되기 때문에 저학년 때 할머니가 아무리 야단을 치고 화를 내어봤자 나는 더 반발심이 들어 울기만 했었다. 반면에 선생님을 통해 매일매일 내면에서부터 끊임없이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보상이 채워지자 나는 비로소 공부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중2병을 겪으며 선생님의 인정보다 친구들이 중요한 순간이 와버려서 보상회로 체계가 와르르 무너지긴 했지만... 이건 다음 화에서 더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처벌이 아닌 보상을 구체화하는 실천 팁:
a) “잘했네~” 같은 추상적 칭찬보다는 구체적 피드백
→ “오늘은 10분 동안 앉아 있었구나, 대단한 걸?”
b) 스티커 차트, 포인트 제도 활용
→ 작은 성취를 눈에 보이게 누적.
c) 물질적 보상이 아니어도 충분함 →
“엄마랑 산책하기”, “좋아하는 노래 10분 틀어주기” 같은 감각적/정서적 보상도 효과적.
방학 때 양산에 있는 사촌 언니네 집에 가서 일주일 씩 지내곤 했는데 그 때마다 꼭 하나씩 배워오는 게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자기 전에 옷을 개어 머리맡에 두고,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을 개는 거 였다.
내가 언니를 좋아했기 때문에 언니가 하는 모든 걸 다 따라하고 싶어했는데, 통제 당하면서 꾸역꾸역 한게 아니라 자율적으로 일주일 동안 언니를 따라하다보니 집에 돌아와서도 나의 습관이 되어버렸다.
ADHD 아동에게 강압적 통제는 불안을 키우고 반발심을 불러온다. 반대로, 루틴화된 습관은 인지적 에너지를 절약해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그렇다고 무조건 자유만 주라는 건 아니다. 단호한 경계는 필요하다. 다만 그 안에서 스스로 습관을 만드는 길을 안내해주는 게 핵심이다.
루틴을 만들어주는 실천 팁:
a) 아침 루틴, 숙제 루틴, 자기 전 루틴
→ 그림이나 사진으로 시각화. 부모/형제자매 본보기
b) 환경 습관화: 같은 자리, 같은 시간, 같은 물건 사용
→ 반복을 통해 자동화되면 의지력이 약해도 굴러감
c) 완벽보다 ‘진행’을 칭찬하기
→ “10분 동안 한 게 어디야~ 굿!” 같은 피드백이 핵심
ADHD는 질환이라기 보다는 기질이고, 부모의 몫은 완벽한 통제자가 아니라, 환경을 조율하는 안내자라고 믿는다. 어릴 때는 약물도 도움이 많이 되지만, 평생 약물에 의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시간이 아닌 데드라인, 처벌이 아닌 보상, 통제가 아닌 습관" 이 세 가지 작은 도구만 잘 활용해서 아이를 훈육한다면, 아이에게는 세상을 살아갈 큰 무기가 될 수 있다.
돌아보면, ADHD가 뭔지도 몰랐던 시절, 나는 참 할머니 고생 많이 시킨 아이였다. 하지만 그런 나도 이렇게 자라 브런치에 글을 쓰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작은 도움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니 혹시 지금 집 안에 작은 폭탄 같은 아이가 있다면, 너무 좌절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그 아이는 언젠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아,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줄지도 모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