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년 전통 올드컴퍼니에서 젊은 名家된 비결
영국을 대표하는 럭셔리 브랜드 버버리(Burberry)는 2016년 지나친 라이선스 남발과 브랜드 전략의 부족으로 위기를 겪었다. 당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버버리 최고임원진은 디지털이란 도구를 채택했다. 디지털로의 전환은 자연스레 밀레니얼 세대를 공략하는 효과를 낳았다.
밀레니얼 세대는 지금까지 경쟁 럭셔리 브랜드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던 고객집단 내의 블루오션이었다. 버버리는 업의 본질을 디지털 미디어 컴퍼니로 바꾸어 나가며 160년 전통의 올드한 이미지로부터 탈피해 나가고 있다.
버버리는 2012년 대만 타이페이 신인프라자에서 열린 디지털쇼에서 360도 대형 스크린, 참신한 무대와 좌석 배치 등으로 기존 패션쇼와 다른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당시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피지컬(Physical)과 디지털(Digital)을 교란하는 것은 버버리가 의도한 오감만족도의 취지다. 정보기술(IT)의 진화와 동행하는 버버리에서 실제와 가상의 구분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라며 버버리의 디지털 전환을 예고했다.
그 후 4년 간 버버리는 타 경쟁사보다 더 빠르게 디지털 혁신을 주도했다. 소비자에게 판매할 옷을 미리 선보이는 패션위크의 공식을 깨버리고 패션쇼와 동시에 모델이 입은 옷을 바로 구입할 수 있도록 만드는 참신한 시도를 했다. 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위책 등 각 국가별 활성화된 SNS 및 메신저 채널 마케팅을 활성화하며 20대 이하의 젊은 고객층을 확보해 나갔다.
버버리 역사상 최초로 매출 10억 파운드를 돌파(2008년)한 역대 최고 CEO로 평가되는 안젤라 아렌츠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평가되는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버버리의 디지털 혁신을 이끈 수장들이다. 2014년 애플 부사장으로 이직한 아렌츠의 뒤를 이어 CEO가 된 베일리는 디지털 전환을 중심으로 버버리를 영(young) 컴퍼니로 탈바꿈하는 하는 데 박차를 가했고 이에 따라 버버리의 매출도 탄력을 받았다.
많은 브랜드가 자연스럽게 대형화를 맞게 되면서 겪게 되는 대표적 오류 중 하나가 외형 중심의 확장에 함몰되는 것이다. 브랜드의 규모가 커지면 브랜드 자체가 우선되기보다는 어느 순간 제품 및 지역 중심의 운용이 전체 브랜드 관리를 지배하게 된다.
브랜드의 정체성과 핵심가치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혁신을 통해 옛 명성을 되찾고자 하는 명가(名家) 브랜드 부활의 첫 출발점은 제품, 지역 중심의 확장형 구조를 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가 브랜드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다.
브랜드 확장이나 라이선싱은 새로운 사업기회를 만들고 매출을 올려준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그 브랜드 특유의 무형자산을 구축한다는 측면에서 지나친 확장과 분산은 오히려 독이 된다. 확장을 하되 브랜드의 일관성을 가지고 통제해야 한다. 최소한 그 브랜드의 영혼과 철학만큼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2006년 명품 시장은 전 세계적으로 매장을 확대하면서 빠른 성장세를 기록했다. 반면 버버리는 매년 평균 2%씩 성장하는 느린 성장세를 보였다. 각 대륙으로 영토확장을 벌이며 글로벌 인지도는 높아졌지만 23개의 라이선스가 남발되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인과 중국인이 버버리에 갖는 인식이 확연히 달랐다. 국가별로 버버리라는 브랜드에 대해 갖고 있던 정체성이 제 각각이었던 것이다.
당시 버버리의 최고 경영자였던 안젤라 아렌츠는 도나카란, 구찌 등 유명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인 크리스토퍼 베일리를 크리에이티브 총괄책임자로 임명했다. 버버리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통일시키기 위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베일리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브랜드에 관한 모든 통제권은 베일리에게 넘긴 것이다. 한 사람(베일리)의 눈을 통해 의상 디자인뿐 아니라 각종 광고 이미지 등 버버리란 브랜드의 일관성을 강화시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한때 잘나가던 브랜드가 소비자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이유가 뭘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소비자와 브랜드를 가장 직접적으로 이어주는 브랜드를 상징하는 아이코닉 제품이 훼손되거나 약화되진 않았는지 의심해봐야 한다.
이를 테면 스타벅스 매장에서 더 이상 에스프레소 커피향이 나지 않는다면 어떨까. 몽클레어 매장을 갔는데 더 이상 패딩을 구매할 수 없다면. 투미매장에서 방탄소재의 백팩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면. 아마 단번에 브랜드가 온전하게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 가능할 것이다.
아이코닉 제품이 흔들리게 되면 소비자가 그 브랜드에 갖는 신뢰도 함께 무너진다. 세월이 변하고 트렌드가 변했다는 핑계도 용납될 수 없다. 여러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더라도 브랜드의 신뢰와 직결되는 아이코닉 제품만큼은 지켜야 한다.
타 브랜드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 브랜드만의 고유한 아우라를 만들고 브랜드의 스토리텔링 소재를 제공하는 것이 아이코닉 제품이기 때문이다. 세월의 변화에도 사라지지 않는 명품 브랜드가 되려면 시대변화에 맞게 아이코닉 제품을 재해석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버버리는 1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에게 트렌치코트를 제공하고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이 코트를 입고 은막을 누볐던, 트렌치코트의 名家(명가)다. 그런데 아렌츠가 CEO로 취임한 직후만 해도 트렌치코트를 포함한 아우터의 매출비중은 20% 남짓에 불과했다. 경쟁사인 루이비통은 여행가방이, 구찌는 가죽제품이 매출실적을 책임지는 핵심제품으로 자리잡은 데 반해 버버리의 시그니처 제품인 트렌치코트의 판매실적은 초라했다.
아렌츠는 "모든 전략을 트렌치코트를 중심으로 짜자"며 트렌치코트를 아이코닉 제품으로 내세웠고 버버리만의 브랜드 정체성을 강조해 나가기 시작했다. 트렌치코트는 험한 런던 날씨에도 거뜬히 견딜 수 있는 기능성 소재로 만들어져 '영국다움'을 드러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 가운데 트렌치코트를 핵심 아이템으로 내건 사례도 없었기 때문에 버버리만의 고유함을 드러내기에 제격이었다.
아렌츠는 트렌치코트란 아이코닉 제품을 새로운 트렌드와 세대에 맞게 리뉴얼했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약 300여 개의 개성있는 스타일로 제품군을 확장하며 획기적인 브랜드 재활을 이뤄냈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홍보대사, 앰베서더가 있듯 브랜드에도 그 브랜드를 대표하는 얼굴이 있다. 매장에서 직접 고객을 상대하는 매장직원이야말로 브랜드의 앰베서더라 할 수 있다. 특히 고가의 명품일수록 소비자는 이것저것 따져보고 신중하게 구매하는 경향이 심하다. 큰 돈을 지불해서 구매하는 만큼 고객은 매장 직원에게 의존하는 정도 또한 크다. 그만큼 고객을 브랜드의 VIP로 만드느냐를 결정하는 데는 판매직원의 역할 비중이 크다는 얘기다.
브랜드 마케팅 전략에서 브랜드 관여도 혹은 브랜드 인게이지먼트(engagement)란 개념은 날로 중요해지고 있다. 이 개념은 단순히 브랜드에 만족하고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라 브랜드에 푹 빠져들어서 브랜드 관련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정도를 뜻한다. 흡사 XX 덕후, 빠순이라고 불리는 개념과 비슷하다.
이전까지는 브랜드 관여도란 개념이 주로 고객을 대상으로 쓰였었다면 이제는 직원의 브랜드 관여도를 높여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직원부터 자기가 몸 담고 있는 브랜드에 자부심을 느끼고 몰입해야 고객에게까지 그 긍정적인 브랜드 경험이 생생하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객과 브랜드를 연결하는 직원을 자사 브랜드의 마니아로 만들기 위한 교육은 브랜드 관리 측면에서 중요한 전략이 되었다.
버버리는 직원을 대상으로 '버버리에게 트렌치코트는 어떤 의미인지,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지' 교육하기 위해 판매 직원용 제품교육 프로그램을 제작해 시청토록 했다.
트렌치코트 하나를 완성하는 데 3주의 시간이 소요되며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100개 이상의 공정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한 벌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꾸준하게 교육했다. 장인이 수작업으로 한 땀 한 땀 트렌치코트를 만드는 모습이 녹화된 비디오를 직원에게 보여주어 직관적으로 제품가치가 높다는 것을 인식하게끔 만든 것이다.
버버리는 밀레니얼 세대인 직원과 밀레니얼 고객을 타깃으로 하면서 '젊음'이란 키워드를 버버리에 불어넣었다. 많은 럭셔리 브랜드가 핵심 고객층으로 경제력을 가진 중장년층으로 상정했지만 버버리는 좀 더 멀리 내다봤다. 미래에 유효한 고객, 밀레니얼 소비자에 집중했다. 지금 당장은 버버리를 소화하기에 다소 어릴지라도 현재 버버리에 록인(lock-in)된다면 미래의 충성고객이 될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젊은 세대를 겨냥한 브랜딩은 소비자가 생각하는 브랜드 이미지인 '지각 나이(perceived age)'를 젊게 가져가면서 브랜드 자체를 견고하게 할 수 있는 전략이다. 버버리는 버버리의 상징인 트렌치코트가 더 이상 올드한 고객의 전유물이 아니라 젊은 세대에게도 친숙한 아이템이 될 수 있게끔 변형했고 젊은 세대를 집중공략하는 '역타깃팅', '역발상'을 보여주었다.
다음은 실제 버버리의 디지털 마케팅 사례들이다.
위 이미지 설명. 좌측 상단 이미지부터 오른쪽 하단 순서대로.
[Dreamworks] 2015년 9월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및 NOVA와 파트너십을 맺고 차세대 3D기술을 이용해 인터렉티브 캠페인 제작. 모바일에서 마음에 드는 버버리 스카프를 골라 서커스의 대형 스크린을 비추면 본인이 고른 제품이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음.
[Twitter] 럭셔리 브랜드 최초로 2014년 9월, 트위터의 '바이 나우(Buy Now)'기술을 이용해 상품 판매. 2015년 2월 트위터와 파트너십 체결하고 Tweetcam 이용해 여성복 컬렉션을 라이브 중계
[Burberry beauty box] 2013년 12월에 선보인 신개념 뷰티 스토어로 전자태그 활용해 디지털 체험 제공.
[Apple] 2016년 2월 애플TV 통해 컬렉션 라이브 생중계하고 런웨이 상품을 바로 주문할 수 있게끔 함.
[Line] 라인과 콜라보. 라인의 캐릭터 브라운과 코니가 버버리 캐시미어 스카프 두른 모습
[Kakao] 2015년 9월 카카오와 파트너십 체결. 카카오TV에서는 컬렉션을, 카카오 플러스 친구에선 패션 아이템 소개. 이벤트 및 캠페인을 카카오톡 메시지로 전달.
버버리가 젊은 세대에 주목한 이유는 단순히 젊은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밀레니얼 사이에서만 확인되는 '가치 소비'라는 독특한 소비 행태 때문이다. 다른 씀씀이는 줄여도 자신의 개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제품에는 흔쾌히 지갑을 여는 것, 그게 밀레니얼 세대에서 나타나는 가치소비다.
이들을 공략하기 위해 버버리는 주 무기인 트렌치코트를 선보이되 기껏해야 안감 디자인, 단추 위치 정도만 바꾸던 제한적인 디자인에서 벗어났다. 망토 스타일, 스커트 스타일 등 수백 가지의 개성있는 디자인 옵션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주목할 것은 버버리가 밀레니얼을 사로잡기 위해 '디지털 마케팅'에 적극적인 투자를 했다는 점이다. 디지털 전환은 버버리가 부흥할 수 있었던 핵심 동력이기도 하다. 아렌츠와 베일리는 버버리를 '디지털 미디어 컴퍼니'라 소개하며 경쟁사와의 차별화된 마케팅 도구가 디지털이라 설명하기까지 했다.
▲젊은 직원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제시할 수 있도록 만든 독립 조직인 '전략혁신위원회'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체험을 할 수 있게 옴니채널을 구현한 영국 리젠트 스트리트의 버버리 매장 ▲라인·스냅챗·카카오 등의 플랫폼 통한 콘텐츠 제공 등이 버버리의 디지털 전환에 따른 결과다.
전통명가라는 구습에 사로 잡혀 있지 않고 '역발상적 타기팅'과 '동세대의 밀레니얼 고객-직원 관계'를 만들어 고객지향성이 절로 생기게 만든 버버리의 브랜드 조직운용은 여러 기업에 시사점을 준다. 특히 럭셔리 브랜드는 그들의 전통과 역사를 고수하다 자칫 올드한 감성으로 빠져 버리기 일쑤다.
수많은 럭셔리 브랜드 사이에서 버버리는 어떻게 해야 '젊음의 코드'를 매끄럽게 녹아낼 수 있는지 그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인터비즈 박소영 김재형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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