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최명화 블러썸미 대표
LG전자와 두산, 현대자동차. 언뜻 들으면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인다. 최명화 블러썸미 대표는 세 회사에서 모두 임원을 역임한 마케팅 전문가다. 맥킨지에서 마케팅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LG전자에서 이노베이션팀 상무를 맡고, 두산그룹으로 이직해 브랜드 총괄 전무를 맡으며 '사람이 미래다' 캠페인을 진행했다. 이후 현대차로 이직한 그는 마케팅전략실 실장에 오르며 현대차 최초의 여성 임원이 됐다.
대기업 임원 3관왕이라는 대단한 커리어를 뒤로하고 회사를 훌쩍 떠난 그는, 최근에는 블러썸미에서 6명의 전·현직 여성 임원과 함께 여성 리더 양성에 힘쓰고 있다. 12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블러썸미 본사에서 만난 최 대표는 "산업군과 회사는 달라도 결국 마케팅 원칙은 동일하다"고 마케팅 철학을 전했다. 최 대표는 앞으로 직장인에게 꼭 필요한 역량으로는 '셀프 브랜딩'을 꼽았다.
"예전에는 연봉을 많이 받고 빨리 승진하는 게 곧 성공이라는 인식이 많았어요. 지금은 개인이 성장하는 게 곧 성공인 시대에요. 지금 젊은 친구들은 앞으로 50년, 60년 더 일해야 하는데 내가 잠깐 속한 곳에서 연봉을 많이 받는 것, 친구들보다 승진이 빠른 것이 그리 크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제는 직장인이 아닌 직업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나'라는 브랜드를 잘 키우는 게 중요해요."
Q. LG전자와 두산 그룹, 현대자동차 모두 결이 다른 회사다. 산업군을 옮겨가며 마케팅 전략을 세우는 게 쉽지 않으셨을 것 같다.
산업군을 옮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현대차로 옮길 때 걱정이 많았다. 회사에 아는 분도 한 명도 없었고 여성 임원도 없었다. 주변에서 겁도 많이 줬다. 그런데도 자동차 마케팅이 너무 하고 싶었고, 동시에 '나는 자동차 산업은 잘 모르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안다'는 믿을 구석도 있었다.
세 회사 모두 산업군의 패러다임도, 성공 요인도 모두 다르다. 하지만 기본적인 마케팅 원칙은 비슷하다. 바로 시장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과 고객의 가치를 찾아내 전달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과정이 자동차일수도, 전자제품일 수도 있을 뿐 원칙은 동일하다. 맥킨지에서부터 방법론을 죽어라 공부했고 몸으로 체득했기 때문에 산업군은 달라도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을 안다고 확신했고, 그게 제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자신감이었다.
Q.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나와 창업을 선택하셨다.
내 브랜드 일을 해보고 싶었다. 한 번 사는 인생 아닌가. 또, 내가 가진 걸 나누고 싶다는 생각도 컸다. 블러썸미는 여성들만 가입할 수 있는 프로페셔널한 커뮤니티다. 저희 회사 목표는 뚜렷하다. 여성 리더 200명을 양성하는 것이다. 거창한 사회운동을 하는 건 아니고, 제가 회사 다닐 때 죽어라 고생했기 때문에 후배들은 그래도 좀 믿을만한 구석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같이 으쌰 으쌰 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회사에 다닐 때 정말 외롭고 힘들었으니까.
최근 서강대에서 교수로도 일하고 있다. 학생들과 대화하며 그들이 변화하는 것, 주변 사람들이 성장하는 걸 보는 게 너무 재밌다. 제 성향 자체가 나누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나누는 일을 더 해보고 싶어서 회사를 나왔다.
Q. 대표님께서 생각하시는 '마케팅'이란 무엇인지 궁금하다. 혹시 회사에서 진행하신 캠페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캠페인은 무엇이신지도 궁금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캠페인은 두산에서 진행한 '사람이 미래다' 캠페인이다. 저희 팀에서 주도한 캠페인이 많은 분들의 기억에 남은 것 같아 뿌듯하다.
사실 많은 분들이 '마케팅'하면 이 캠페인처럼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보다 더 짜릿한 건, 고객의 숨은 욕구를 찾아내 그걸 상품화하고 그 상품이 히트를 치는 거다. 퀴즈를 한 번 내보겠다. 당신은 매장에서 TV를 팔아야 한다. 100만원짜리와 150만원짜리 TV가 있을 때, TV를 어떻게 배치해야 고객이 150만원짜리 제품을 구입할까?
1) 150만원짜리 TV가 앞에 있고, 100만원짜리 TV가 뒤에 있다.
2) 100만원짜리 TV가 앞에 있고, 150만원짜리 TV가 뒤에 있다.
3) 배치와 구매는 관련이 없다.
정답은 1번이다. 비싼 제품을 먼저 본 고객들이 더 비싼 제품을 사는 경향이 있었다. 이걸 '앵커링 효과'라고 한다. 과거 실험을 통해 앵커링 효과를 눈으로 확인한 적이 있다. 매장에 아이트래킹을 설치해 고객들이 매장에 들어오면 어느 쪽부터 보는지, 어느 칸에 제품이 진열돼 있을 때 가장 많이 보는지, 제품을 볼 때 모서리를 먼저 보는지 가격표를 먼저 보는지 등을 기록하고 분석했다.
실험을 통해 실제로 비싼 제품을 먼저 본 고객들이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막연히 이론적으로 알고 있었던 내용들을 실험을 통해 정확히 알게 된 셈이다. 이후 매장 진열을 전부 바꿨고 매출도 크게 올라갔다. 이렇게 고객의 숨은 욕구를 찾아내 그걸 상품·서비스에 연결해 효과를 볼 때 가장 짜릿하다.
Q. 최근 마케팅 트렌드는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하다.
예전에는 제조사와 공급자 측에서의 마케팅을 주로 생각했다. 어떻게 제품과 서비스를 시장에 편승시켜야 하는지가 중요했다. 요즘에는 어떻게 해야 시장이 나를 위해 떠들어줄까를 고민해야 한다. 지금은 모든 개인이 미디어다. 내가 뭘 떠든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내게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다. 미디어와 개인이 내 브랜드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결국, 어떤 비즈니스를 하든 팬덤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상품과 서비스가 진정성이 있다면 팬덤이 형성될 수 있다. 거기서부터는 급속도로 퍼져나갈 수 있다. 내가 뭘 전달하며 대중을 끌고 가겠다고 생각한다면, 처음에는 이 게임이 되는 것 같아도 나중에는 힘에 부친다. 돈도 계속 써야 하고 뭔가를 계속 얘기하고 제공해야 한다. 그들을 이끌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같이 논다고 생각해야 한다.
Q. 최근에 사람들이 많이 말하는 셀프 브랜딩도 결이 비슷한 것 같다. 결국 본인을 마케팅하는 것 아닌가.
직장인이 아닌 직업인으로 사는 게 더 중요해지는 시대가 왔다. 그만큼 셀프 브랜딩이 중요해지고 있다. 기업의 브랜드도 기업만의 정체성이 있고 차별점이 있다. 그리고 그걸 이룰 수 있게 하는 인프라가 있다. 셀프 브랜딩도 비슷하다. 나의 커리어적 정체성, 그걸 이끌어가는 나만의 차별성, 그리고 '나'라는 브랜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게 무엇인지가 뚜렷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다. 제 정체성은 마케터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디지털 마케터, MZ세대에 특화된 마케터 등을 말할 수도 있겠다. 나만의 차별성은 분석을 잘 하는 것 등이 있다. 자격증이 될 수도 있고 경험이 될 수도 있다. 단, 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계속 변할 수 있다. 브랜드에 대한 생각을 명확하게 정하고 발전하면 계속 변한다. 기업 브랜드도 계속 변하지 않나. 셀프 브랜딩을 강조하는 건, 이런 생각을 하고 안 하고는 결국 우리의 성장에 굉장한 차이를 주기 때문이다.
젊은 친구들은 앞으로 50년 이상 일을 해야 한다. 긴 관점으로 삶을 바라봐야 한다. 기회가 많아지기도 했다. 과거에는 회사에 몸담고 있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최근에는 회사를 다니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플랫폼으로 얼마든지 뭔가 할 수 있고 기회도 많다. 내가 추구하는 바를 다양하게 할 수 있는 만큼 그 어느 때보다 '나'라는 브랜드를 잘 키워나가는 게 중요하다.
Q. 확실히 요즘 회사를 다니며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다 보니 '부캐'를 가져가는 직장인들도 많다. 그런데 회사 안에서 일을 잘 하는 것도 직장인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역량일 것 같다. 회사 내부에서는 어떻게 셀프 브랜딩을 해야 하는지 궁금하다.
회사에서 잘 버티는 게 일단 가장 중요하다. 저는 사회초년생들에게 '네 가슴 뛰는 일을 하라'며 회사 밖으로 내몰고 싶지 않다. 솔직히 그런 사람들은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본인들은 수년째 같은 일을 하고 있지 않나. 어떤 일에 내 가슴이 뛰는지 알아가는 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다.
저는 1만 시간의 법칙을 믿는다. 만약 회사가 너무 별로다, 그러면 빨리 퇴사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 일에 대한 머뭇거림이라든지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다면, 말리고 싶다. 이게 최선이 아닌 것 같아도 일정 기간은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견뎌야 한다. 견뎌봐야 이 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고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알게 된다.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차별점을 가지고 있는지도 발견할 수 있다. 그 안에서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는 확신과 힘을 받게 되기도 한다.
정말 가슴 뛰는 일이 있다면, 일단 부캐로 가져가는 걸 추천하고 싶다. 기회를 갖고 조그맣게 일을 시작해봐라. 갑자기 모든 걸 때려치우고 흥미만 쫓는 건 아닌 것 같다. 부캐로 시작하며 점점 확신을 갖고 그 분야에 필요한 사람도 만나게 되면 그게 내 업이 될 수 있다. 부캐로 가져가다 내 길이 아닌 것 같으면 그냥 부캐로 내버려 둘 수도 있고 말이다.
회사 내부에서 가져가야 할 최고의 포지셔닝은 '모든 사람이 나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지점이다. 좋은 형이나 언니, 멋진 선배가 되라는 게 아니다. 나 저 친구랑 일하고 싶어, 저 친구가 우리 팀에 들어왔으면 좋겠어라는 말이 나오도록 하는 게 회사에서 가져가야 할 유일한 포지션이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이다. 회사는 사랑받는 공간이 아니다. 프로페셔널한 곳이다. 어떤 일이 있을 때든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갖고 접근하는 게 중요하다.
직장 상사를 잘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상사는 부하직원이 모시는 사람,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 파트너다. 상사를 잘 활용해야 회사에서 성공할 수 있다. 상사는 본인을 빛나게 해줄 후배를 좋아한다. 상사로 하여금 내 일에 항상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본인이 하는 일을 그때그때 잘 업데이트하고, 질문을 통해 적절히 상사의 도움도 받고 상의하는 모습을 늘 보여야 한다.
Q. 그럼 부하직원 입장에서 최고의 상사는 어떤 상사일지도 궁금하다. 팀원과 후배들에게는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을까.
리더십 중에서도 문제 해결 능력인 소트 리더십(Thought Leadership)이 직장 상사나 팀장에게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하직원 입장에서 최고의 상사는 문제를 잘 해결해 주는 사람이다. 중요한 보고나 까다로운 보고는 네가 하라는 둥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상사가 참 많다. 이런 상사와는 그 누구도 함께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직장 상사는 문제 해결 파트너가 되어 팀원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적절히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본인 능력으로 잘 해결하든지, 본인이 가진 리소스가 많아 해결할 방법을 아는 누군가를 연결해 줄 수 있어야 한다. 팀원들이 나를 문제 해결 파트너로 생각하는지, 나를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
Q. 마지막으로 열심히 일하는 2030 직장인 후배들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버텨라. 누구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 좁게 생각하지 말고,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동굴이라 생각하지 마라. 그건 터널이니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팀장, 회사, 동료 등 외부를 바라보지 말고 자기 자신을 봐야 한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나은지, 경쟁력이 있는지를 봐야 한다.
자기 자신의 블루칩을 미친 듯이 갈고닦아라. 남을 흉내 내지 말고, 없는 걸로 아쉬워하지도 말고 내재돼 있는 스스로의 블루칩을 개발해야 한다. 그게 여러분을 성공으로 이끈다. 내가 만약 글을 잘 쓰는 능력이 있다면 그걸로 끝을 봐야 한다. 그거면 된다. 밖을 보지 말고,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거, 그걸 꼭 얘기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