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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비즈 Jun 17. 2020

비잔틴, 무굴, 당나라 문명을 꽃피우게 한 "이것"

인적 다양성을 활용해 문명화를 이룬 문화사례


다양성의 존중, 열린 자세 등을 통해 역사적으로 문명의 꽃을 크게 피운 나라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비잔틴 제국, 무굴 제국, 당나라 등이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통치자들은 다양성에 대해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마찬가지로 현대에 들어서는 다양성에 대한 리더의 생각과 태도에 따라 조직과 기업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다양화를 통해 문명을 꽃피운 역사적 사례들은 중요한 인사이트를 준다. 열린 문화를 바탕으로 다양성을 포용해 문명을 부흥시킨 사례들을 DBR 114호를 요약해 소개한다. ☞원문 기사 더보기(링크)


개방적 정신을 바탕으로 이방인을 수용해 약점 보완한 '비잔틴 제국'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대표적 건축물인 돔형 성당 '아야소피아' | 출처 동아일보


동로마 제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비잔틴 제국. 4세기 초 거대한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리되면서 동로마 제국이란 이름을 갖게 된 이 문명은 476년 서로마 제국이 지도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1453년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근 1000년 가까이 유지된 제국이었다. 비잔틴은 세 가지의 상이한 요소들이 독특하게 결합된 문명이었다. 기독교와 로마제국의 조직과 행정,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지적 유산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 문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한 활력과 창의력을 지니고 있다.


비잔틴 멸망 이후 수많은 제국들이 200여 년 동안 비잔틴의 문명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이 비잔틴의 무엇을 그토록 이어가려 했는지는 단정 지어 답할 수 없지만, '다양성'은 비잔틴 문명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였다. 다양성에 관한 한 비잔틴은 동시대의 바그다드, 장안과 함께 세계의 중심이었다. 일단 언어로 보면 공식 언어는 그리스어였지만 수도 콘스탄티노플에는 세계 각지의 민족들이 모여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다양한 민족들이 몰려들었던 콘스탄티노플(루이지 메이어 작품) | 출처 위키피디아


또, 비잔틴을 구성하고 있는 민족들을 통해서도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제국 유지를 위해 가장 중요했던 '군대'는 온갖 용병들의 집합소였다. 아르메니아(Armenia), 아이슬란드, 스칸디나비아, 앵글로색슨족 등 다양한 민족의 용병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제국에 충성을 다하는 한 외국인이어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황제 이하 제국 상류층의 태도와 역량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개방적 정신을 낳았다. 또, 10세기 말부터 비잔틴의 시장은 외국인으로 북적였다. 이런 이방인들은 모두 출신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제국의 시민으로 여기며 세금을 냈고 제국의 보호와 법률의 혜택을 받았다.


이방인들은 비잔틴 내의 잘 갖춰진 병원, 오락시설, 숙소 등의 편의 시설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다양성은 이처럼 외부인을 향한 적극적인 개방성 덕분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비잔틴은 왜 이방인들에게 문을 열고 그들을 수용했을까? 제국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선 외국 문화와 민족에 대한 개방성이 너무도 필수적이었다. 실제로 주 수입원인 토지세와 인두세 외에 이처럼 교역을 통해 확보한 막대한 세수를 기반으로 황제들은 전 세계의 다양한 인재들을 콘스탄티노플로 끌어들여 황실의 위엄과 제국의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비잔틴이 다양성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유익은 자체적·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모순의 해결이었다. 용병이 바로 그 대표적 예다.


열린 포용과 다양성의 리더십을 보여준 인도 무굴 제국의 '악바르'


인도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건축물, '타지마할'. 이 타지마할은 인도 아그라에 위치했던 무굴 제국의 작품이다. 16세기 초 인도는 힌두나 무슬림 군주가 다스리는 여러 왕국으로 분열돼 있었다. 이곳에서 칭기즈칸의 후손인 자히루딘 무하마드 바부르는 1526년 델리(Delhi) 왕조의 마지막 술탄을 물리치고 300여 년간 인도를 지배하게 되는 무굴(Mughal) 제국을 세운다. 이후 1556년 왕이 된 악바르(Akbar)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뤘고 그 바탕 위에 개방과 관용을 더해 향후 100년 동안 위세를 떨칠 제국을 완성했다.

무굴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 '타지마할' | 출처 위키피디아


악바르의 개방과 관용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종교 수피즘(Sufism) 이었다. 악바르는 자신의 페르시아어 교사를 통해 '보편적 관용주의'라는 수피즘의 원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런 사상을 현실에서도 깨우치게 된다. 1567년 황제 악바르는 인도 북서부 라지푸트에 기반을 두고 오랫동안 제국을 위협해온 힌두인들의 요새 치토르를 포위했다. 4개월 남짓한 지루한 공격 끝에 마침내 황제의 군사들이 요새 안으로 진입하자 힌두인들은 마지막까지 격렬히 저항했고 다급해진 황제는 학살을 명령했다. 그러자 여자와 아이들은 라지푸트의 전통에 따라 적을 피해 불속으로 뛰어들었고 미처 뛰어들지 못한 자들은 모두 목이 잘렸다.


충격을 받은 악바르는 라지푸트를 점령하자마자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동맹으로 변모시키고자 관용정책을 실시한다. 여러 명의 라지푸트 공주와 결혼해 자신을 계승할 자한기르를 낳았고 공주들에게 자신의 거처 안에 지은 작은 사원에서 원하는 대로 예배를 올리도록 허락했다. 라지푸트 왕과 왕자들을 자신의 궁궐로 초대해 머물게 하며 교육과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들 가운에 상당수는 점차 무굴제국을 인정하고 제국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제국 안정에 큰 보탬이 됐다.


악바르는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우선 어린 시절부터 권력은 누구와도 나눠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은 그는 실무를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맡기지 않고 네 명의 장관이 각각 재정, 군사, 법과 종교, 왕실 업무를 맡도록 했다. 하지만 이 개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기존 이슬람 문화에 외부 문화, 특히 선진 페르시아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었다.


다양성과 관련해 무굴 제국이 남긴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면 통치자의 판단이 갖는 중요성이다. 개방, 관용, 다양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그것을 추구할지 거부할지는 통치자의 판단에 달려있다. 수많은 통치자들은 정치적 위기에서 다양성보다는 소극적, 폐쇄적, 배타적 선택을 했다. 반면, 악바르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리더의 전형적 특징들, 즉 새로운 것에 대한 개방적 태도,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깊은 탐구심, 비전에 대한 확신, 분명한 목표, 적극적 추진력 등을 두루 보여준 예다.


'세계의 수도'라 불렸던 당(唐) 나라의 '장안'
장안을 국제도시로 만든 비단길(실크로드) | 출처 위키피디아


실크로드의 시작점 장안이 활기 넘치는 국제도시였음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당과 교류한 국가가 많은 때는 300여 개나 됐을 정도였다. 신라만 하더라도 해초, 의상, 원측과 같은 고승들이 당에 유학해 발자취를 남겼다. 이처럼 장안은 우선 불교의 중심지로서 각국의 승려들이 모이는 구심점이었을 뿐 아니라 서역, 신라, 발해, 일본의 상인, 사신들이 수시로 드나든 국제도시였다. 실크로드가 개척된 한나라 시절에 이미 서역인들의 출입이 시작됐지만 당대에는 아예 장안에 거주하는 아랍인, 페르시아인, 티베트인들이 늘어나 부유한 당 귀족들은 중앙아시아인 마부와 낙타 몰이, 인도인 요리사, 박트리아(Bactria), 시리아인 가수와 배우를 고용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AD701년에 출토된 유물에선 흑인 상이 발견되기도 해 당시의 장안이 얼마나 외국인에게 개방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외국인들을 위한 당의 적극적 정책을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가 법률이다. 당대 법전에는 외국인들에 대한 규정이 있는데 분쟁 발생 시 그들의 법에 따라 처리할 수 있도록 해줄 정도였다. 이러한 서역과의 활발한 인적 교류 가운데 당은 의식주에서부터 놀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남녀 모두 소매깃이 좁고 몸에 달라붙는 호복을 입고 머리에는 서역 스타일 모자를 썼으며 템포가 느린 중국 전통 무용 대신 빠르고 활발한 호무를 즐겼다. 새로운 춤의 영향으로 여성들은 서역 무용수의 화장과 의상을 모방했고 여성들의 남장이 유행했다. 후한 이후 유행한 서역의 밀가루 음식 또한 당대에 이르면 그 종류가 크게 늘어나 장안의 시장에는 호병 파는 가게가 즐비했으며 포도주 또한 인기였다.

장안중심고루유적 | 출처 위키피디아


당이 다양성으로부터 거둔 가장 큰 유익은 상업적인 것이었다. 새로운 문물의 유입에 따른 시장의 확대는 당연히 물품의 생산과 공급 증대를 낳았고 일자리 창출로 이어졌다. 이러한 이익을 얻기 위해 당이 외국인에 대해 취했던 개방적 조치들을 보면 우리의 태도는 여전히 소극적인 느낌이 든다. 거대한 제국의 수도라는 사실만으로 외국인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당이 그토록 적극적이었다면 우리는 외국의 인재, 고급 인력을 어떤 자원으로 품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다양성이 곧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잔틴과 무굴 제국의 악바르처럼 정치적 업적을 이룬 많은 문명과 통치자들은 다양화를 통해 그 업적을 안정적으로 정착시켰다. 또한, 다양성은 기존의 특권 세력을 견제하는 정치적 수단이기도 했다. 통치자의 카리스마가 부족할 때 인재의 다양화는 정치적으로 유용했다. 다양성의 핵심은 결국 인적 다양성에 있다.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비슷한 스펙을 가진 획일적인 인재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조직은 다양한 비즈니스 환경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그랬듯이 다양성은 현대의 비즈니스 영역에서도 자체적,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치명적 문제와 모순을 해결해주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14호

필자 백종율 클리오아카데미 원장


인터비즈 김동섭 장재웅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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