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돌망 Jan 20. 2020

게임회사가
랜덤박스를 사랑하는 이유

랜덤박스의 핵심 가치는 사행성이 아니다.


가차(GATCHA)라고도 불리는 랜덤박스,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랜덤박스란 유저가 상품을 구매하면

게임 내 아이템을 무작위로 제공하는 상품입니다.


게임을 많이 안하는 저도

몇 번 사용해본 적 있는 아이템인데요.

모두의 마블 카드 뽑기

매 번 두 손을 모아 황금색 아이템을 기도했지만,

아쉽게도 제가 열어본 랜덤박스는

칙칙한 싸구려 아이템만 들어있더군요..

feat. 운빨ㅈ망겜


랜덤박스가 없는 게임을 찾아보기 힘든 요즘,

여러분도 아마 저처럼 이 두근거림을

경험해봤을 거라 생각되는데요.


그런데 요즘,

이 랜덤박스가 사행성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주된 내용은 랜덤박스가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겨

카지노처럼 수익을 벌고 있다는 건데요.



흠..

정말로 랜덤박스의 사행성 때문에

게임회사가 랜덤박스를 못 놓는 걸까요?


뭐.. 랜덤박스에 사행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가 봤을 때

게임회사가 랜덤박스를 사랑하는 이유는
0.1%의 고결제유저들 때문입니다

여기서 고결제 유저란

게임에 백만원 이상을 쓰는 사람을 말하는데요. 

게임시장은 전체의 0.1%밖에 안되는 고결제유저가

나머지 99.9%의 유저보다 많은 금액을 소비하는

아주 특이한 시장입니다.


덕분에 게임회사들이 돈을 벌기 위해선

이 0.1%가 좋아할만한 비싼 아이템을 만들어야 하죠.

문제는 이들을 위해 아주 좋고 비싼 아이템을 만들면

99.9% 유저들이 불만을 가진다는 겁니다.

???: 현질ㅈ망겜 떠납니다~


때문에 게임회사들은 수익과 이미지의 중간 어딘가에서

아이템의 '적정 가격' 찾느라 머리를 싸매곤 했죠.


하지만, 랜덤박스의 탄생 이후

게임회사들은 이 고뇌에서 벗어나

비싼 아이템을 듬뿍듬뿍 팔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그래서 오늘은 이를 가능케 했던

랜덤박스의 2가지 비밀을 파헤쳐보겠습니다.




01

누가 게임회사에게 돈을 벌어 주는가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0.1%의 유저




게임회사 기준,

유저들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됩니다.

비결제유저: 돈을 쓰지 않음.

결제유저: 돈을 씀.

고결제유저: 돈을 많이 씀(100만 원 이상)


전체 유저 중 돈을 쓰는 유저는 4.52%,

고결제유저는 0.1%에 불과한데요.

출처: 2016년 구글플레이 게임 카테고리 총결산,  IGAWorks Mobile Index


놀라운 사실은 0.1%의 고결제유저가

전체 매출의 58.6%를 차지한다는 겁니다.


0.1%의 유저들에게 돈을 두배만 받아내도

전체 수익이 58.6%만큼 오른다는 뜻이죠.


상황이 이렇다보니 게임회사의 관심사가

이 '고결제유저에게 어떻게 돈을 더 받아낼까'

쏠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02

고결제유저에게 돈을 더 받아내는 법

게임회사의 딜레마: 수익 vs 이미지




넥슨은 돈슨(돈+넥슨)이라는 악명을 가질 정도로

유저들에게 과금유도를 잘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이 넥슨도 어린(?) 시절엔

고결제유저에게 충분한 돈을 받아내지 못했는데요.

2005년의 카트라이더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넥슨의 순수했던 시절

당시에도 고결제유저들은 남들보다 훨씬

많은 돈을 투자할 의향이 있었을 텐데요.

어린 넥슨이 내민 소중한 자동차엔

꼴랑 만원짜리 가격표가 붙어있었습니다.

캐릭터, 악세사리를 사도 2만 원을 넘기기 힘들었죠.


상점에서 가장 좋은 아이템이 2만 원이니

100만 원을 바칠 준비가 된 고결제유저들도

돈을 더 낼래야 낼수가 없었습니다.


가장 좋은 아이템이 2만원(좌), 100만원(우)인 경우


이건 회사입장에서 꽤나 심각한 문제인데요.

모든 결제유저들이 2만원씩만 구매하니

총 매출이 꼴랑 100만원밖에 안됩니다(좌).


이 문제,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모든 유저가 이성적이라면

상점에 100만원짜리 카트를 추가하면 될겁니다.

이 경우 고결제유저는 100만 원을,

일반결제유저는 2만원을 지불할 테니

매출은 두배 가까이 증가하게 되겠죠(우).


하지만 아쉽게도 유저들은 이성적이지 않기에

이 방법은 실현이 불가능합니다.

이 방법이 현실에 적용된다면

유저들이 이런 상점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제일 좋은 카트가 단돈 100만원!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못 살 100만 원짜리 카트가

내 오천원짜리 카트를 유유히 따라잡는 게임을

좋아할 유저는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이 비싼 상품을 살 수 없는  99.9%의 유저들은

"돈 없으면 게임도 지라는 거냐"며

게임의 형평성 문제를 지적할 것이고

이는 이미지 실추 및 유저 이탈로 이어지겠죠.

게임회사의 딜레마

비싸게 받자니 욕을 먹고,

저렴하게 팔자니 돈을  벌고..

게임회사들은 딜레마에 빠졌는데요.


이 난제에 빠져 고뇌하고 있던 게임회사들을

수렁에서 건져준게 바로 랜덤박스입니다.




03

게임회사들이 랜덤박스를 사랑하는 이유

딜레마를 끊어낸 랜덤박스의 두 가지 비밀




영원할 것 같던 딜레마를 끊어낸

랜덤박스의 아이디어는 간단했습니다.


100만 원짜리 말고 1% 확률로 좋은 게 나오는
만 원짜리 아이템을 팔자

하지만,

이 간단한 개념에 숨겨진 두 가지 비밀은

게임회사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줬죠.




03-1)

첫 번째 비밀은

랜덤박스는 100만 원짜리 아이템을

욕 안 먹고 판매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겁니다.


최근 374만원에 직업을 판매하는

모바일 RPG게임이 앱랭킹 1위를 차지했습니다.


에이 그런게임이 어딨어



..라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는데요.

놀랍게도 이 374만원은 리니지2M에서

영웅 직업을 뽑는데 실제로 필요한 비용입니다.

실제 리니지2M 직업 뽑기의 확률

리니지2M이 공개한 정보에 따르면

유저가 영웅 직업을 뽑을 확률은 0.0882%입니다.

유저가 1,133회를 시도해야 영웅직업을 뽑히므로

뽑기까지 약 374만원*이라는 금액이 필요하죠.

*특정 직업을 뽑으려면 374*24 = 8976만 원이 필요


즉 리니지 2M은 374만원짜리* 아이템을

3,300 원짜리 랜덤박스에 숨겨둔 겁니다.

*해당 계산은 하위등급 상품의 가치를 0으로 계산함


만약 이 영웅 등급 직업을

상점에서 374만 원에 판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비난을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리니지2M은

단 3300원으로도 영웅 직업을 가질 기회를

모두에게 제공*했기에 욕을 '덜' 먹었고요.

*게다가 0.08%는 유저 125명이 10번 뽑을 경우 1명은 당첨되는 확률로, 서버 기준으로는 영웅 직업이 빈번하게 뽑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음.


동시에 영웅 직업을 노리는 고결제유저들에게는

374만 원에 달하는 박스를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이 게임은 2년 동안 왕좌를 지키던 리니지M을 넘어

매출 순위 1위에 오르게 되죠.




03-2)

두 번째 비밀은

랜덤박스는 100원짜리 아이템도

끼워 팔 수 있게 해 준다는 겁니다.


랜덤박스는 매우 높은 확률로

저렴한 아이템을 뱉어냅니다.


때문에 100만원짜리 아이템을 뽑은

고결제유저의 가방엔 100원짜리 아이템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수밖에 없죠.


이 구조 덕분에 랜덤박스는

반값 할인을 한 상태에서도

2배 이상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데요.


[100만원, 10만원, 만원, 천원]짜리 아이템이 담긴

원가 22,600원짜리 랜덤박스를 할인하여

11,300원에 파는 상황을 가정해보겠습니다.


50%나 할인한 랜덤박스

상품은 11,300원인데 기댓값은 22,600원이니

합리적인 유저라면 상품을 구매할 겁니다.


아마 많은 유저들이 커뮤니티에 분석글을 올리며

'지금은 구매해야 할 때!'를 외치겠죠.


하지만 S등급을 목표로 하는 고결제유저 들은

관심이 전혀 없는 A, B, C등급의 아이템을

무려 99.5%의 확률로 구매하게 되는데요.


분명 랜덤박스가 아니었다면

S등급 아이템을 사는데 100만 원이 필요했겠지만,

할인을 받은 지금은 226만 원*이 필요하게 됩니다.

*11,300÷0.5% = 226,000,000


이는 매출의 58.6%를 차지하는 고결제유저가

금액을 2.26배 더 지불하게 되는 상황이므로,

나머지 유저들에게 50%의 손해를 본다고 할지라도

매출이 53%*가량 증가하게 되죠.

*58.6%*2.26 + 41.4%*0.5 = 153.1%


정리하면 게임회사는 22,600 원짜리 상품을

반값에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53%의 추가 수익을 얻었습니다.


소비자는 분명히 더 합리적인 소비를 했는데

회사는 돈을 더 버는 이상한 상황이 발생한 거죠.

확률 조정을 통한 가격 예측

게다가 최고등급 상품의 당첨확률을 낮출수록

고결제유저 구매액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요.


앞서 언급한 리니지 2M의 직업 뽑기도

이런 전략을 취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게임회사는 랜덤박스 덕분에

비싼 아이템을 욕 안 먹고 팔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렴한 아이템까지 끼워 팔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니,

사랑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겠죠?


구조에 대한 고려 없이

게임회사가 랜덤박스를 놓지 못하는 이유를

사행성만으로 재단하는건 오류가 있습니다.

진짜 이유는 유저 구조에 숨겨져있으니까요.


이걸 놓치는 순간 게임회사는

다시 딜레마에 빠지게 될 거고

유저들은 그 이후에도 현질ㅈ망겜을 외칠겁니다.




오늘은 철저히 게임회사의 입장에서

랜덤박스의 의미를 다뤄봤습니다.


글을 쉬는 동안

'랜덤박스는 도박이니 없어져야 해!'라는 글들을

너무 많이 접하다 보니 일종의 반감이 생겨 이번 글을 기획하게 됐는데요.


이 글은 '도박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진 랜덤박스'를 분석하기 위함이지 ‘게임회사들의 랜덤박스는 무조건 좋은 거야!'의 뜻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밝힙니다.


오히려 저는 랜덤박스가 도박보다 지독한 점도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일단 도박은 1등이 '되고 싶어서’ 돈을 쓰지만

랜덤박스는 1등이 '될 때까지' 돈을 쓴다는 점이 그렇죠.






작가의 이전글 아마존 뺨치는 영국의 슈퍼마켓, 오카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