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철살인 중독은 이제 그만!!
어렸을 때부터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짧고 간결하게 표현하되 의미는 정확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써야 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주 간단한 글귀에 감동하며 저마다의 해석을 내놓았다. 짧은 글을 제 나름대로 해석하고 각주를 다는 일이 적어도 2,000여 연간의 학문이었다.
인류는 삶의 진리가 그 짧은 말, 혹은 글 속에 있다고 믿었고,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짧은 글을 숭상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는 수많은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몇 가지의 말로만 기억된다. ‘너 자신을 알라’로 기억되는 소크라테스는 생전에 ‘산파술’이라는 짜증 나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려 했다. 당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계속되는 질문에 넌덜머리가 나서 결국 당신이 맞다고 인정했을 정도. 그는 요즘 말로 하면 싸움닭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고집불통의 외골수인 기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성인의 자리에 올려두고 그의 열정과 뾰족뾰족했던 민낯을 가린 채 “너 자신을 알라”라는 짧은 글만 남겨 놓았다. 애당초 그 말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도 아니며, 신탁이라는 비합리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는 신화에 가깝다. 여기에 그를 대표하는 말 또 하나가 가세한다. 바로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다. 이 말 역시 소크라테스는 한적 없는 말이다. 정작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빌린 닭의 값을 대신 치러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하지만 그는 단지 처형 전날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마치 악법도 법이라면서 준법정신을 강조한 사람으로 남게 됐다. 당시에 처형 전날 도망가지 않은 사람과 도망간 사람 중에 어느 쪽이 더 많았을까? 그냥 내일이 죽음의 날인 줄 알면서도 어찌하지 못한 인간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모두 사라지고, 투철한 원칙주의자이자 준법정신의 화신인 소크라테스만이 남았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이럴 줄 알았다면 그렇게 죽진 않았을 것이다. 기존의 원칙이나 틀에 박힌 생각들, 그리고 이치에 맞지 않는 모순을 가장 싫어했던 그가 흔한 원칙주의자로 전락해 버린 것은 그의 인생 전체를 부정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를 어록으로 정리하자면 한동안 ‘너 자신을 알라’고 젊은이들을 붙잡고 이야기하는 꼰대로 시작해서, 뜬금없이 준법정신을 강조하는 원칙주의자로 마무리된 셈이다.
여기서 한마디 더 하자면,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그의 말을 글로 남긴 플라톤도 짧은 글 숭상의 희생자이다. 이후 서양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는 짧은 말로 플라톤을 추켜세웠지만 이런 말은 “세상의 모든 말은 처음으로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호모 에렉투스의 ‘아오우~~’란 말의 각주일 뿐이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봐야 할 만큼 엉뚱한 소리다.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한국의 모든 글은 훈민정음의 각주이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뭔가 그럴듯하고, 멋있을 뿐만 아니라, 그 말을 한 사람도 마치 서양철학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충분한 말이라는 건 인정.
우리는 그런 엉뚱하게 간략해진 말들을 숭상하면서 서양철학의 아버지를 플라톤이라 기억했다. 심지어 그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단지 플라톤 아카데미의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제자라고 칭하며 플라톤을 치켜세웠다. 그렇다면 서양인들이 플라톤을 그토록 치켜세워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가 된 이유와 유사하다. 다분히 기독교적이었기 때문에.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은 마치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기에 충분했고, 중세의 기독교가 그를 성인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사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이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합리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늘 강조해 온 이들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와의 원치 않는 콜라보를 분명 수치로 여길 것이다.
공자는 어떤가? 공자는 유학이라는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의 말은 ‘논어’라는 책으로 남아 만세에 이어지고 있다. 논어는 공자가 남긴 짧은 말들을 모아서 묶어 놓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후대에 계속 이어져 오면서 제 맘대로 해석되었다. 공자의 짧은 말 중 이 시대까지 영향을 미치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唯女子與小人難養也(유여자여소인 난양야).
이를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해석하자면, ‘여자와 소인은 기르기 어렵다’이다. 이는 한·중·일로 대표되는 동북아시아의 여성차별의 원동력으로 작용했고, 문화혁명으로 여성 차별을 걷어낸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에서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앞뒤가 자연스럽지 못한 말이다. 여자와 소인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기른단 말인가? 기르는 주체는 누구인가? 공자가 한 말은 맞나? 공자는 그렇다면 희대의 성차별주의자였단 말인가? 이 또한 후대 학자들의 간략화 논리에 희생된 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여자라는 말이 언제부터 일반적으로 여성을 뜻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 여자라는 말은 사실 이상한 말이다. 실제로 중국의 문헌에서 여성을 ‘여자’라는 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女라는 말이 이미 여성을 뜻하고 있는데 여기에 子라는 말이 더 붙은 이유는 무엇일까? 자식 중에 있는 여성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여자라는 말은 매우 특수한 상황에서의 말이고, 일반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또 이것은 우리 어순과 중국 어순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한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의 여자는 여성이 아니라 우리가 쓰는 자녀를 뜻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앞의 문장을 여자가 아니라 자녀로 해석하면 비로소 문장 전체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아! 아직 소인이 안 풀렸구나! 소인은 군자 혹은 선비의 반대말이라고 이해해 왔는데, 당시 문헌을 통해 용례를 보면 소인은 ‘하인’, 즉 노예를 뜻한다. 사극에서 하인들이 주인 앞에서 물러날 때 “소인은 물러가겠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소인은 곧 하인이다. 노예를 가축이나 재물쯤으로 취급했던 과거에는 그들을 기른다는 표현을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정리해 보자.
唯女子與小人難養也(유여자여소인 난양야)는 ‘여자와 소인은 기르기 어렵다’가 아니라 “자녀와 하인은 기르기 어렵다”로 해석되어야 마땅한 글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유학자들은 왜 이런 간단한 해석을 놔두고 굳이 어렵고 예외적인 해석을 해야 했을까? 이유는 단 하나다. 그게 그 당시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더 유용했기 때문이다. 유학도 유파가 다양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유학은 주자의 성리학인데, 이 주자가 저지른 몇 가지 오류가 황제의 통치를 정당화하는데 매우 유리했고, 더 나아가 가부장제를 중심으로 한 사회체계에도 걸맞았다. ‘유여자여소인 난양야’도 그런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애초 공자의 말과는 달리 여자와 소인(군자의 반대말로서의 소인)은 기르기 어렵다는 해석이 나왔고, 이를 우리말에 맞게 “군자는 여자와 소인은 멀리한다.”로 의역하거나 “군자는 여자와 소인과는 일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로 썼다. 말은 말을 나아서 결국에는 “여자와는 큰일을 도모하지 않는 법”이라고 규정됐다. 공자가 이 사실을 안다면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얘들아 그게 아니야? 나 그런 말 한 적 없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하고 유학자들의 멱살을 붙들고 처음부터 다시 적으라고 할 것이다. 물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소크라테스든 공자든 이러한 사태를 만든 건 본인이다. 그러게 왜 자신의 말을 글로 남기지 않고 장황하게 이런 뜻이었다고 설명하지 않았나? 짧고 굵은 촌철살인의 한 마디로 깨달음을 얻게 하는 건 좋은데, 그 깨달음은 어떤 것이었다고 자세하게 써놨어야지 오해가 없지 않겠냐는 말이다. 물론 핑계는 있다. 분서갱유焚書坑儒처럼 학문이 단절되는 순간이 있었으니 그대로 전해질 수 없었을 거라는 것. 그렇다면 오해가 있었던 부분은 후학들이 지금이라도 좀 인정하고 바꾸면 좋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다. 그런 걸 바꾸지 않을 사람들의 고집에 비해, 바꾸자고 나설 사람들의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할 의지가 없어서, 한편으로는 해도 의미가 없어서 안 하는 것이다.
세상에... 쓰고 보니, 나는 뭐 동서양 철학을 통달한 사람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정식으로 배운 사람’이라는 말도 기분을 상당히 나쁘게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나는 정식으로 동서양 철학을 배운 사람은 아니다. 그냥 들은풍월 몇 가지를 가지고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의견을 제시해 보는 중이다. 그리고 사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제부터다.
내가 짧은 말을 증오하는 이유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내가 분노하는 것은 바로 기사 헤드라인 장사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짧은 말 예찬론은 결국 헤드라인 장사로 귀결됐다. 헤드라인 장사에 열 받는 마음을 들여다보니 ‘촌철살인’이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이 보였고, 촌철살인이라는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사자성어, 혹은 명언, 짧은 한마디 등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이 드러났다. 아무 데나 가져다 쓰이는 그런 말들 때문에 우리는 짧은 말 한마디에서 진리를 찾는 게 더 좋은 일이라고 여기게 되었고, 글 중에서 가장 짧은 제목을 보면서 기사를 다 본 것처럼 착각하는 ‘헤드라이너’(헤드라인만 읽고 아는 척하는 사람: 내가 만든 신조어ㅋ)를 양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된 것이다.
헤드라이너들은 내용을 자세히 보지도 않고 떠들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짧게 규정하기도 좋아한다. “이건 이거네.” 하고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규정한다. 나는 여기저기서 헤드라이너들을 비난해 왔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비난을 하는 나에게 이런 말로 대꾸한다.
“요즘에 다들 헤드라인만 보지, 누가 내용을 다 보냐? 기사가 얼마나 많고 또 살기도 바쁜데 누가 일일이 다 찾아보면서 기사를 봐~!” 이런 말.
그럼 나는 이렇게 받아친다. “그럼 모르는 일을 왜 그렇게 쉽게 규정하고, 가타부타 떠드냐?”
이런 말에 반응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로 “뭔데 날 가르쳐?”라고 나오는 감정적인 타입.
두 번째로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자유는 있는 거 아냐?”라고 묻는 본질 회피 타입, 세 번째로 “헤드라인 딱 보면 알지 뭘 더 봐. 감 잡았으면 되는 거지.”라고 말하는 예언가 타입이다. 개인적으로는 예언가 타입이 가장 마음에 든다. 내용을 하나하나 뜯어서 설명하면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금방 실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머지는 기사 얘기랑은 영 다른 곳으로 화제가 돌아가기 때문에 감정싸움 비슷한 걸 하다가 의미도 재미도 없이 끝난다. 그리고 그런 헤드라이너들은 다음에도 역시 헤드라인만 보고 누군갈 욕하려 팔을 걷어붙인다.
남의 일을 남의 말만 듣고 쉽사리 판단하는 것이 용인되는 세상이다 보니 이런저런 헤드라인을 모아 모종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 되었다. 루머는 루머를 낳고 그 루머는 어느덧 사실이 되어 유튜브를 떠돈다. 누군가는 5~10분 정도로 정리된 짧은 영상을 보고 자신이 본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확신한다. 추가 취재도 없고, 팩트체크도 없이 루머의 눈덩이는 하염없이 커지며 굴러만 간다. 나중에는 진짜 사실이 나와도 사실이 아니게 된다. 모두들 “내가 아는 사실은 그게 아닌데.”라고 답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일들이 항상 나쁜 결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경솔한 단정이라고 해도 늘 틀리는 것은 아니고, 또 처음에는 작고 간단한 해프닝인 줄 알았던 일의 이면이 드러나면서 엄청난 사회 변혁이 일어나는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행운은 수십 년이나 수백 년에 한 번 오는 것일 뿐, 확률상 경솔한 단정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 아니 사회뿐만 아니라 나처럼 그런 꼴을 못 보는 사람에게는 크나큰 스트레스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만병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짧은 글만 선호하는 ‘헤드라이너’들이 저지르는 해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길고 긴 글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 내 마음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내 말의 모순을 알겠지?? 정작 읽어야 하는 사람들은 내 글의 마지막을 못 볼 것이라는 사실. 짧은 글을 증오한다는 제목만 보고 “아! 그럼 긴 글이 좋다는 얘기군!”하고 ‘PASS!’를 외쳤을 거라는 거... 아, 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