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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스머프 May 05. 2020

그때, 그 노래

눈물은 갑자기 찾아와 감정이라는 귀찮은 선물을 주고 갔다

20대의 나는 고고학자였다.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역사를 전공으로 택했고, 그중 취업이 수월하다는 고고학과에 들어갔다. 막상 들어가 보니 공부도, 현장조사도, 숙소 생활도 더할 나위 없이 재밌었다. 일이 끝나면 거의 매일같이 술을 마셨는데, 술을 누가 살 것인가는 언제나 내기 족구의 결과로 정해졌다. 익숙한 도구와 익숙한 사람들, 익숙한 현장 등 모든 것이 날 편하게 했고, 받는 보수도 적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가장 편하게 여기는 말투와 행동만 하면 큰 무리 없이 중간 어디쯤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렇게 30대에 접어든 후에도 건강 검진 결과가 좀 안 좋고, 체중이 많이 불어나 술을 꽤 줄인 것 외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별달리 좋지 않을 이유가 없는 하루가 수없이 지나고 30대 초반을 갓 벗어난 시점이었다. 그때 나는 보고서 작성에 난항을 좀 겪고 있었고, 현장일이 점차 무료하다고 느껴지고 있었지만 그런 일들이야 어떻게든 마무리가 될 것이 분명했기에 특별히 걱정할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그때 나는 오랜만에 맞이하는 연휴를 보내기 위해 현장 숙소를 벗어나 고향 집에 와 있었고, 오랜만에 코스모스가 곳곳에 피어있는 하천변을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있었으며, 오랜만에 평소 좋아하던 가수 장기하의 2집 앨범의 노래를 차례로 듣고 있었다. 분명 기분이 정말 좋아서 가끔씩 허벅지에 유난스럽게 힘을 주고 엉덩이를 한껏 올리며 열심히 페달을 밟기도 했다. 그렇게 누가 뭐래도 기분이 째지게 좋을 만한 순간에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나는 당황해서 자전거를 길가에 세워두고 눈물을 훔쳤다. 눈물을 흘린 순간은 정확히 ‘그때 그 노래’라는 곡 속에 무슨 의미인지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두 줄 정도의 가사가 지나갔을 때였다. 그 가사에 30대 내내 좀처럼 열리지 않았던 나의 눈물샘을 열었다.

“예쁜 물감으로 서너 번 덧칠했을 뿐인데 어느새 다 덮여버렸구나 하며 웃었는데, 알고 보니 나는 오래된 예배당 천장을 죄다 메꿔야 하는 페인트장이었구나.”

  

정확히 이 가사였다. 왈칵 쏟아진 눈물은 한동안 멈추질 않았다. 많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고,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주 오래전 꿈속에서 봤던 초라한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 꿈속에서 나는 너무 초라한 나 자신을 꼭 끌어안았었다. 왜 그 얼굴이 떠올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그때까지 그려온 인생의 그림이 그 초라한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때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지?’였다.  그동안 크게 잘못된 것이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내 인생은 크게 잘못되어 있었다. 스스로 무언가를 원하는 법을 잊어버렸고, 불만을 말하는 법도 잊고 있었다. 그저 남의 시선과 평가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며 살면서 인생 내내 그려온 그림이 뭔지도, 도대체 왜 그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터진 눈물은 그렇게 살아온 인생의 처참한 결과물이었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고, 약 한 달이 지나 5년 반 동안 다니던 문화재연구원을 그만뒀다. 그리고 막연히 평생의 소명이라고 여기며 살았던 고고학계를 완전히 떠났다. 이후 도보로 한 달 보름 동안 전국을 돌면서 너무 힘들어 웃고, 너무 맛있어서 감탄했다가, 너무 외로워서 화를 냈고,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여행을 하는 동안 까맣게 잊고 살던 ‘감정’이란 녀석이 되돌아왔다. 그 감정이라는 녀석과 재회하며 진짜 나의 인생이 시작됐다.


물론 감정이란 생각보다 훨씬 귀찮은 것이었다. 2014년에 터진 세월호 사건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인터넷 언론사의 기자로 등록하여 급여 없이 취재하고 기사를 송고하며 근 2년을 보냈다. 가장 친한 친구 녀석이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죽기 전 일주일 내내 녀석이 깨어있는 모든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과외선생이 되었을 때는 아이들에게 미래의 행복보다는 지금 당장의 행복을 위해 최대한 재밌게 놀라고 가르쳤고, 주민들의 갑질로 경비원이 숨진 사건을 접한 후에는 실상을 알아보기 위해 경비원으로 취직해서 5개월간 일하기도 했다. 인디음악을 하는 사람들을 무작정 찾아가 연속 취재하며 같이 춤추고 노래하며 인터뷰를 했고, 이후 지역 언론사에 정식으로 취직했을 때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소시민들의 투쟁을 취재하며 그들의 편에서 기사를 썼다. 매 순간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고, 단 한 번도 하던 대로 하면 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 모든 일은 내 선택으로 시작됐고, 선택한 후에는 원하는 대로 일했으며, 떠날 때도 내 뜻에 따라 떠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그 순간부터 전에는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고, 어떤 것들은 생각대로 되지 않아 계속 이어가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실패가 두려운 적도, 실패라 느낀 적도 없었다. 왜냐하면 스스로  진심으로 원하는 ‘성공적 시작’을 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 매순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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