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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스머프 Mar 20. 2022

퇴사만 30번, 습관적 퇴사자의 고백

1. 퇴사자 인 더 하우스

일생을 한 직장만 보고 살아 가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그 시절에도 직장인이었다. 첫 직장을 가졌을 때, 분명히 평생 이 직장을 유지하리라 다짐했었다. 그 직장은 대학 전공을 그대로 살린 '고고현장 조사연구원'이었다. 이 직장을 5년 반 다녔고, 여차저차 한 이유로 그만두게 됐다.


20대 중후반에 시작해서 30대 초중반에 나온 이 직장은 나의 평생직장 마인드에 종지부를 찍게 해줬다. 그때까지는 분명 평생 한 곳에서 일하는 것의 가치가 굉장히 높았다. 따라서 그 일을 해내지 못한 나는 겉으론 당당했지만 속으로는 죄스러웠다.

근 6년 동안 일의 특성상 집에 들어와서 생활하는 시간이 거의 없었는데, 갑자기 집에 들어온 아들이 부모님도 영 어색한 눈치였다. 그래서 퇴사 직후는 도보여행을 했고, 한달 반 만에 돌아와서는 대학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했다. 집에 가만히 있는 날이면 괜한 걱정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나의 모습이 자꾸 죄스러워서 뭐라도 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 하는 생각이 지금은 든다. 그 시절에 나는 집에 있는게 조금은 불편했다. 물론 몸은 더할 나위 없이 편했지만, 편할수록 죄스러움이 커졌다.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하루종일 맴돌았다. 우스운 것은 그럴수록 더 움직이지 않았다는 거다.


침대와 나의 물아일체. 내가 침대인가 침대가 나인가. 침대와 일체화 되는 그 순간 내 마음이 스스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무기력한 내 모습에 화가 나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그 모순된 기간을 뛰어넘는 데 필요한 건 기다림이었다.

지칠 때까지 기다리고, 지칠 때까지 쉬는 거... 그게 가장 빨리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그때까지 너무 고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남들도 다 그 정도는 하고 사는데 내가 뭔 휴식이냐, 이러다 뒤쳐진다'


라는 생각에 하루도 편치 않았던 거였다. 하지만 내가 침대와 물아일체를 경험하며 무기력에 빠진 이유는 결국 충분치 못한 휴식이었다. 그 후 일주일쯤 거의 방에만 쳐 박혀서 먹고 자고 먹고 자고를 반복했다. 그러자 한 달 반의 도보여행으로 빠졌던 8킬로가 조각난 아이언맨 수트가 돌아오듯 돌아왔다. 고작 일주일만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몸무게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내 본 모습을 찾은 것 같았다. 나는 아무일 없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왔고, 침대에서 일어나 집 근처 도서관으로 향했다.


자꾸 도서관을 가는 이유는 단순하다. 원래 책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나는 언제나 책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 그게 어른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아이의 흔한 모습이라고는 하지만, 어렴풋한 내 기억으론 그런 마음보단 진짜로 책 속의 세상이 너무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우주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밤하늘을 보면서 책에 나온 별자리를 손으로 그어서 찾아내는 일을 하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때는 그냥 재밌고 신기해서 한 일이지만, 이 낭만적인 놀이는 두고두고 나의 연애에 도움을 줬다.


반면 또래 애들과의 놀이는 재미가 없었다. 워낙 놀이에 흥미도 없었고, 달리기도 느리고 힘도 없어서 도무지 잘할 수 있는 놀이가 없었다. 그냥 집에서 책을 보거나 이불을 뒤집어 쓰고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것이 백배, 아니 만배는 좋았다. 하지만 또래의 아이들과 한 놀이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때 이미 패배에 초연해지는 법을 알았고, 그 초연한 모습에 줄곧 '애어른'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게 해주었다.

이렇게 내가 도서관에 들어가는 건 어릴 적의 나로 돌아가는 행위였다. 우주 못지 않게 나의 흥미를 끈 분야는 역사였는데, 역사 관련 학과를 들어간 후 역사책을 오히려 아예 보지 않았다. '이건 뭐 청개구리도 아니고...'


원인은 나에게만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학교에서 주는 수업자료는 너무나 재미가 없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하루 종일 역사만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대학에 와서 막상 전공과목을 공부하다보니 너무 고역이었다. 한자도 많고 다른 나라, 특히 일본과 중국의 고고학 자료들을 많이 보게 했다. 언어의 장벽을 뚫지 못한 상태에서 너무 하기 싫은 일들이었다. 지금 같으면 번역기라도 돌렸겠지만 그 당시에는 인터넷이 얼마나 빠른 지를 서로 자랑하던 시기였다. 네이버가 제발 좀 우리를 이용해달라고 애걸복걸 하던 그 시기 말이다. 전공수업 report를 컴퓨터로 제출하면 혼나던 시기.


수업내용은 주로 암기할 내용이었다. 대학에 오면 지난 12년간 선생님에게 일방적으로 사사를 받아야 했던 구도는 사라지고, 주제를 함께 선정해 토론하고, 교수의 연구에도 참여하는 그런 교육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첫 시간에 깨졌다. '한국선사고고학의 이해'라는 제목의 이 수업은 지도를 펼쳐서 우리 나라 구석기가 어딨는지 외우는 것으로 시작됐다. 물론 앞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사피엔스까지 설명도 잊지 않았고,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늘 보던 진화하는 인간의 모습도 설명한 다음이었다.

출처 - 사이언스타임즈

그 다음 시간은 신석기 유적을 외워야 했고, 그 다음 시간은 청동기 유적을 외워야 했다.


그날 나는 '대한민국에 뭘 바라냐...'라는 생각으로 전공 공부를 접었다. 당시 한참 인기 있었던 변리사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과 공무원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아니 솔직히 그냥 대학에서는 술마시고 놀아야지라는 생각이 더 컸다. 이른 바 IMF시대 막바지에 재수까지해서 들어온 대학이지만 그냥 졸업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전공 공부라는 것을 한 지 한달이 채 안됐다.


말죽거리 잔혹사 중에서...

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가 던진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고 그래!"는 대학까지 잘 지켜지고 있었다. 축구동아리에 들어간 나는 선배들과 틈만 나면 축구와 족구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책은 시험 때 잠깐 손에 쥐는 것 말고는 볼 일이 없었다. 대학생활 내내 손에 꼽을 정도로만 가던 곳이 바로 도서관이었다. 어린 시절 '혼자놀기의 왕'이었던 나는 어느 새 사람들과 어울려 신나게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직장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는 곳마다 도서관을 방불케 할만큼 책이 가득했지만 그 책에 손을 대거나 숙소로 가져와 읽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예전에는 못해서 안달이 날만큼 소중한 일상이었지만 중학교 이후부터 첫 직장을 그만둘 때까지 교과서나 전공과목에서 읽어야할 필수 책들을 빼면 본 책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이문열에 삼국지 10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전편을 각 하나로 치면 넘지만... 어쨌든.


도서관에서 다시 찾은 것은 내 본 모습이었다. 책 보고 글쓰기를 좋아하던 나의 본 모습. 그렇게 약 2년 동안 약 300여권의 책을 읽었다. 부모님에게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지만 실은 책을 읽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때 왜 읽기만 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그랬다면 그만큼 읽지도 못했겠지만.


머릿속은 급하게 빨아들인 지식으로 가득찼다. 그 과정에서 나는 영원히 뒤도 돌아보지 않을 것 같았던 수학에도 관심이 생겼고, 어릴적 꽤나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천문학과 일반 과학에도 관심이 생겼을 뿐만아니라 어느 정도 그에 관련된 지식도 생겼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마냥 신기하고 즐겁던 그 때, 나를 세상으로 빼낸 건 세월호 사건이었다. 아이들이 침몰하는 배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전국민이 그냥 보고만 있다는 게 너무나도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 잔인함을 깨고 싶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무엇이라도 하게 할 수 있는 게 개인의 힘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내가 할 일을 찾았다고 느꼈다. 그렇게 기사 똑바로 쓰는 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나는 이직을 계속 했다. 세월호 기사를 쓰지 말라는 언론사에서 나오기도 하고, 돈을 벌려면 광고를 따오라는 언론사에서 계속 기사만 쓰다가 나오게 된 일도 있었다. 그렇게 이름을 올렸던 언론사만 14군데. 그 중에는 꽤나 이름 높은 언론사도 있었고, 완전 신생도 있었으며 창간을 하는데 들어간 곳도 있었다.


그리고 올해 2월에는 내가 제안한 기획으로 창간했던 언론사에서 퇴사했다. 언론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데 스스로는 잘 안다고 생각하는 대표 덕분에 그 언론사는 현재 이름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아마도 등록한 업종에서 탈락되기는 싫어서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 퇴사 이후 10여년, 그사이 나는 결혼 했고, 부모님과 같이 살지 않아도 되는 집도 생겼다. 그간 정규직으로 입사한 건 총 7차례, 프리랜서 고용이 23차례로 마지막 퇴사가 30번째였다.

급하게 모은 지식 덕분에 글쓰는 일이라면 모든 분야에 자신이 있었다. 급여가 현저히 적은 소규모 언론사는 광고를 유치하지 않으면 기본적인 생계가 어렵기 때문에 틈나는 대로 부업을 했다. 그래야 기자 활동 중에 들어오는 금전적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내게 급여를 한 번이라도 준 곳이 얼마나 되는지 세어보았다.


그때까지 28곳이었다. 이력서를 넣어서 채용된 곳은 그 중에 70% 정도 되었고, 나머지는 알음알음.


그러다 컴맹 그 자체인 내가 IT회사에 정규직으로 입사했는데, 그것도 웹콘텐츠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파견직이어서 시간이 나름 자유로웠던 당시, 한 달에 원고쓰기 부업으로만 300만 원을 벌었다. 그러다 앞서 말한 그 언론사를 창간했고, 나는 모든 부업을 그만둔 채 그 일에 매달렸다.


그리고 30번째 퇴사를 하며, 다시 퇴사자가 되었다.


지금 돌아온 집은 예전처럼 불편하진 않다. 돌아온 나는 10년 전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글을 써내려 가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행복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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