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분주 May 01. 2023

노동자는 노동의 날에 노동을

66

5월 1일 월요일 근로자의 날.

일하러 간다. 노동자로써 노동의 날에 노동을 하러 가는데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꺼이꺼이.

퇴사하고 놈팽이처럼 숨만 쉬며 부모님 식량만 축내고 밤낮 구분 없이 너무 나태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 엄마 지인찬스를 사용하여 블루베리 농장일을 구했다. 2달 정도 땀 흘려 일하면 용돈도 생기고 잊고 지냈던 노동의 참맛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무턱대고 취직했다. 평소 농장일에 관심도 있고 땀 흘린만큼 번다는 생각에 스스로 정신교육좀 하고자 호기롭게 도-전했다. 


힘들다고 중간에 그만두면 엄마 체면이 안선다기에 시즌이 끝날 때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눼에눼에 알겠습니다 어머니. 나 의지 하나로 똘똘뭉친 사람이라 왠만한 일에 땀조차 나지 않는 강인한 체력이오 라 말했지만 농장일 2시간에 아오 ㅆㅣ이바아알 도망갈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더울 때 시원한 곳에서, 추울 때 따뜻한 곳에서 일했던 나는 결국 나약한 존재였다.


더운 하우스안에서 익은 블루베리알만 골라따는 기분은 마치, 뜨거운 불가마 찜질방에서 원숭이털을 골라골라 이를 잡는 기분이었다. 특히나 비닐하우스에 5분만 서있어도 겨드랑이가 흐느끼게 되어 농장 일한다고 새로 구매한 노스페이스 신상 회색 티셔츠를 서서히 축축하게 젖게 만들 줄 상상도 못했다. 감히 겁도 없이 이 땡볕에 코끼리색 티셔츠를 입고 왔다니. 완전 실패한 오늘의 패션. 집에 갈 때까지 양쪽 팔을 몸통에 딱 붙인 채 자유롭게 들지 못했다 흑흑.

오열.

힘들어서 제가 우는 거 아닙니다.

겨드랑이가 대신 우는 겁니다. 흑흑



일하러 간 농장에는 캄보디아에서 온 젊은이들이 몇 있었는데 외쿡인만 보면 직업병이 생겨 왠지 말을 걸어야 할 것 같은 이상한 심리가 작용된다. 블루베리를 따면서 머릿속으로 계속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어차피 친구하나 없는 이곳에서 영어도 쓸 겸 캄보디아친구들과 친해져야지. 저 멀리서 걸어오는 캄보디아 삼총사. 나는 농장초짜고 그들은 이미 몇 년 차 베테랑이기에 잘 보이고 싶기도 하고 쿨해 보이고도 싶고 잉글리시 좀 한다는 거 티 내고도 싶어서 애써 무심한 척 내 앞을 지나쳐가는 그들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Hi, guys. How are you. It's a sunny day. Isn't it.

거기. 친구들. 하우 아 유. 날씨 겁나 좋구먼.


발음 죽여줬고.

표정 나이스 했고. 내 존재 제대로 알렸고.

1타 3피. 그러자 그들 중 키가 큰 남자 한 명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예????

뭐라구요???


아참! 캄보디아는 영어가 아닌 크메르어 쓰는구나! 헤헤헤헤.

게다가 한국말 잘하네?

그들은 나를 병신 보듯이 쳐다봤다. 나중에 들은 작업반장 삼촌 말로는 그들은 이미 5년차 한국생활로 한국말 잘한다고 했다. 진작 말해주지 쳇. 괜히 나댔다가 ㅈ댔네. 자초한 왕따생활이 되겠구나. 



우리 농장에는 나와 캄보디아 친구들 이외에 아주머니 부대가 있는데 그들과 같이 일하면 즐겁다. 조용할 틈이 없다. 아침 농장 카니발 픽업부터 일 마치고 집에 오는 순간까지 거의 10시간 가까이 여사아줌마들과 함께 있는데 거짓말하나 안 보태고 그들은 1분도 헛으로 보내지 않고 이런저런 오천만천백가지 이야기하신다.


대화의 흐름도 이상하다. 분명 요즘 고사리값이 많이 올랐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임영웅의 노래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매력이 있다고 하더니 갑자기 본인들 아들딸이 사다 준 선물 배틀을 시작했고 대화의 끝으로 가서는 다이소에서 꼭 사야 되는 필수템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죽순 레시피부터 시작해서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음주운전으로 한번 갔다가... 남진이 잘생겼다느니 어쩌니 어후 혼란스럽다. 물론 나는 대화에 끼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지만,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응 피눈물. 그것도 귀에서.

이솝우화나 전설의 고향 이야기만큼이나 공포스럽고 유익하다. 이래서 옛날에 어른들 이야기는 피와 살이 된다고 한것 같다. 정말 피가 됐다,



나는 농장일이 처음은 아니다. 호주에 있을 때 비자 연장하려고 농장에서 3달간 지낸 적이 있다. 단순히 비자연장의 목적으로 간 거라 쉽고 여유로운 곳으로 골랐는데 알 수 없는 승부사 기질 때문에 농장주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그때 파프리카를 땄다. 농장일이 처음이라 열정만 많고 요령은 없어서 그냥 무작정 많이 땄다. 너무 덥고 갈증도 나서 시원한 탄산 딱 한잔하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는데 저 멀리에서부터 호주농장주인 할아버지가 뭔가를 품에 안고 우리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가 조심스럽게 들고 오는 것이 뭔지 유심히 봤는데 그것은 내가 그토록 원하던 새빨간 코카콜라가 아니었겠는가. 오 지져스. 아리가또 고자고자. 한잔 시원하게 마시고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코카콜라 컴온컴온. 가장 먼저 발견한 내가 친구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애들아. 내 소원이 이루어졌다. 농장 할아버지가 음료수 들고오신다!!!!!!

코카콜라 컴온컴온. 이렇게 속으로 외치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온 농장주가 우리 앞쪽으로 소중하게 안고 있던 빨간색 그것을 우르르 쏟아냈는데 그것은. 바로 그것은.

응. 너네들이 잘못 딴 파프리카.

친히 손수 잘못된 작물을 땄다고 굳이 한아름 들고 와서 굳이 외국인 노동자들 앞에 냅다 쏟아부었다. 더위를 먹었는지 내 눈에는 정말 콜라로 보였 단말이에요. 그날 나는 안경을 쓰고 일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역시 농장은 즐거워.



농장에서 땀 흘려 일하면 저절로 다이어트도 되고해서1석2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입맛이 돌아 살이쪘다. '하우스일은 덥다-목마르다-탄산한잔-탄산에는 역시 기름진음식이지-돼지완성'  공식 성립 헤헷.



블루베리 시즌인 2달 동안은 꼭 견디고 일해야 하는데. 일해서 번돈으로 부모님과 해외여행 가야 되는데. 앞으로 몇십 일이 더 남았는데. 고작 일한 지 4일밖에 안 됐는데 몸이 고되다. 너무 고되다. 그래서 당분간 브런치는 쉬기로 했다. 혹시나 기다리시는 독자님들. 블루베리 시즌 끝나면 돌아올게요 호롤롤로로로롤.

I will be back.

불구덩이에 빠지러 가는 거 아닙니다.

노동의 참맛을 느끼러 갑니다.


그놈의

노동의 참맛.





끗.



블루베리 먹을때 날 생각해주오.

작가의 이전글 전지적 아빠 시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