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분주 Jun 08. 2023

나는 결국 며느리가 되지 못했다

나는 블루베리농장에서 유일한 30대 여자다. 뭐 사실상 유일한 노처녀라고 해도 될 듯.

이모들의 눈에는 나는 사지 멀쩡한 젊은 처자인데, 지금껏 결혼도 안 하고 농장 와서 힘들게 일하고 있으냐고 틈만 나면 나를 시집보낼 궁리를 한다. 아 물론 나의 의사는 하나도 물어보지 않고 말이다.  


농장에 온 첫날부터 나를 유난히 관심 있어하던 사람이 있다. 바로 혜숙이모. 이모는 나를 굉장히 좋게 생각하는 듯하다. 본인은 시집간 딸만 둘이라 나를 며느리로 삼지 못해 너무 아깝다는 말을 입에 달고사신다. 아마 나의 반응이 긍정적이었으면 이모는 나를 입양했을지도 모르겠다. 난 가끔 농장에 쿠키나 머핀을 간식으로 구워가는데 그때마다 혜숙이모는 저-기 한쪽 구석에서 음침한 눈빛으로 어떡하면 저 년을 내 식구 내 핏줄로 만들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기분이다. 그리하여 혜숙이모의 정 씨 가문 며느리 만들기 작전이 시작되었다.


  


일 마치고 자려고 7시에 누웠는데 혜숙이모한테서 전화가 왔다. 오늘하루 힘들지 않았냐며 저녁은 잘 먹었는지 날이 점점 더 더워질 텐데 몸관리 잘해서 이번 여름 잘 넘기자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초반에 쫙- 깔더니 본론으로 본인 조카를 나에게 소개해주고 싶다 했다. 조카가 30대 초중반으로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심성도 곱고 해서 나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했다. 고르고 고르고 골라 결국 나보다 어린 본인 조카를 억지로 굴비처럼 엮어줄 생각인가 보다. 그는 개인사업가로 어릴 때부터 돈을 벌어서 이미 아파트 한 채가 있고 어쩌고. 결혼하면 일 안 하고 집안살림만 해도 된다고 어쩌고. 부모님은 사과농사를 지어서 땅이 몇천 평이 있다고 어쩌고.

 

관심 없어요.


... 라 하기에는 이모가 너무 구구절절했다. 그냥 멋쩍게 공기반 소리반으로 '하하하'로 관심 없음을 대신 표현했다. 하지만 이놈의 혜숙이모는 나의 웃음을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싶었다. 통화하는 내내 나의 마음은,

제발 날 좀 놓아 주시ㅣㅣㅣㅣㅣ오.

잠 좀 자게 전화를 제발 끊어주시오.


일단 조카한테 연락처를 줘볼 테니 그렇게 알라고 나의 의중을 묻는 질문이 아닌 통보를 하고는 드디어 통화를 종료했다. 뙤약볕 아래에 잘 뎁혀진 38도의 비닐하우스 안에서 8시간 동안 블루베리 따는 것보다 혜숙이모와의 5분짜리 통화가 더욱 괴로운 밤이었다.


다음날, 농장에서 혜숙이모는 내 옆에서 찰떡같이 붙어 하룻밤 사이에 생각해 보았으냐고 물어봤다. 안 한다고 했쨔나!!! 관심 없다고 속으로 외쳤쨔나!!! 너무 귀찮다고요 흑흑흑...라 말하지 못하고 그냥 딱히 당장은 연애에 관심 없고 큰 마음먹고 퇴직한 만큼 마음 편히 쉬고만 싶다고 했는데 이모는 내 말은 듣고 있지 않았다. 이미 다른 이모들에게 본인 조카와 나를 이어줬다고 큐피드 역할을 제대로 했다며 국수 먹을 준비들 하시라며 호호거리셨다. 아.. 혜숙이모 나 정말 이모 이름을 데스노트에 적고 싶지 않다고요. 


친절하고 불편한 혜숙이모의 끈질긴 '조카며느리' 공세에 나도 지쳐 그냥 한 번 만나보고 끝내버려야겠다 싶어 일단은 연락해 보겠다고 이모를 안심시켰다. 이모 말대로 나이도 어리고 돈도 많고 부모님도 부자라고 하니 늙고 가난한 내 주제에 어디 감히 그런 남자를 만나볼 수 있겠나 싶어 감지덕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포기를 모르는 혜숙이모의 기세를 꺾을 자신도 없으니.


그 날밤 바로 그 남자에게 연락이 왔다. 간단하게 인사만 주고받고 바로 약속을 잡았다. 그분도 혜숙이모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응한 것 같은 기분 같은 기분 같은 기분이긴 했다. 하긴 본인보다 나이 많은 백수 여자를 좋게 받아들일 남자가 어디 있겠어.




그리하여 토요일이 되었다.

몇 주째 햇볕아래에서 하루종일 일을 하다 보니 얼굴이 초코쿠키처럼 까맣게 탔다. 화장도 오랜만에 한 거라 뭔가 어색하고 이상했다.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원래 가진 화장품 색조들이 타버린 나의 피부이랑 조화를 이루지 못해 어색했다. 그래도 이왕이면 연하남한테 이쁘게 보이면 좋으니까 머리도 묶고 눈화장도 화려하게 하고 한 살이라도 어려 보이게 소녀소녀한 핑크빛 볼터치도 바르고 딸기우윳빛 립스틱을 바르니,

재앙.

얼굴에 재앙이 내려앉았어요.


소개팅 억지로 끌려 나왔다는 걸 얼굴로 표현해 버렸다. 누가 봐도 소개팅에 억한 감정을 가지고 나온 여자가 되어버렸네 허허. 남자 쪽에서 에프터를 일은 없지만 그냥 미리 차단 아닌 남자를 처단할 목적으로 화장 아닌 변장을 해버렸다.


커피숍에 미리 혜숙이모 조카분이 와계셨다. 본인도 급하게 연락받고 시간을 낸 거라 미리 좋은 장소를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사람은 좋아 보였다 마음이 조금은 녹았다. 그는 인사치레인지는 모르겠지만 혜숙이모한테서 내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잠깐.

혜숙이모가 이 어린 남자한테 나의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노출증 환자처럼 웃통 까고 뱃살을 흔들어대던 이야기를 했을까. 수박대신 열무김치로 이모들 엿 먹인 이야기를 했을까. 짜장면 하나에 자존심이며 영혼이며 홀라당 판 이야기를 했을까. 블루베리 몰래 먹다 걸려 싹싹 빌었던 이야기를 했을까. 아 주옥같은 나의 농장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순간이었다. 어서 말해보세요 연하남 정 씨, 당신이 들은 나의 이야기는 도대체 뭔가요.


다행히 혜숙이모는 나의 좋은 점만 이야기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인 거 같아서 지금 이 자리에 나왔다고 했고 나오길 잘한 것 같다고 했다. 연하남의 멘트에 얼어있던 내 마음이 샤르륵 녹아 마침내 봄이 온 것 같았다. 고마워요 혜숙이모. 덕분에 저도 웨딩드레스를 죽기 전에 입어볼 수 있게 될 것 같아요. 정 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겠습니다. 신혼여행지로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잔 하겠어요.




농장일에 관심이 많다는 나의 말에 그는 본인 부모님 농사일을 계속 어필했다. 사과 수확철에는 일손이 부족해서 본인도 일을 거두워준다했다. 작물들은 농부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며 흘린 땀만큼 보람을 느끼는 일이라 했다. 농사이야기에 활화산 같은 폭발적인 리액션을 보였지만 사실 난 농사를 평생 업으로 살고 싶진 않다. 특히 블루베리 농장에서 그 많은 벌레들을 본 순간 농장은 나의 길이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은근 본인 부모님의 재력 과시와 일 년 사과 농사 루틴에 대해서 아주 상세히 알려줬다. 내가 지금 이 남자의 미래 부인 오디션을 보러 온 건지, 본인 부모님 사과농사 일꾼 오디션을 보러 온 건지 잠시 헷갈렸다. 흠.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느낀 점은 연하남은 좋은 사람인 것 같았지만 나에게 더 이상의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게 하진 않았다. 그는 나에게 '좋은 동생' 혹은 '혜숙이모의 조카' 까지였다. 나 역시 그에게 '재밌는 누나' 혹은 '혜숙이모의 농장친구' 까지라는 것이 그의 표정에서도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 '혜숙이모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로 시작하여 '혜숙이모 잘 부탁해요'로 만남을 마무리 지었다.


늦은 밤, 혜숙이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많이 궁금했나 보다. 그냥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차피 다음날 농장 가면 볼 것이고 이미 소개팅으로 한차례 기운을 빼고 와서 더 이상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분명 조카에게 전화해서 물어봤을 테니까. 그리고 조카도 두 번째 만남을 없을 것 같다고 말해줬을 테니 오히려 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최선을 다했지만 인연은 아닌 것 같다고 아쉬운 척하면 끝날 일이다.


 


다음날, 혜숙이모에게 피곤해서 잠이 드는 바람에 전화를 받지 못했다며 변명했고 조카에서 후기를 들은 이모도 더 이상 조카에 대해 캐묻지는 않았다. 휴. 그리하여 나는 큰 숙제를 끝낸 줄 알았는데 혜숙이모는 다시 내 옆에 또 거머리처럼 붙어서는 손가락을 지휘봉 휘두르듯 스크롤을 내리면서 연락할 만한 번호를 찾았다. '보자 보자- 어느 놈을 소개해줄까' 하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계셨다. 제발.. 이.. 이제 그만.


이모. 저 진짜 괜찮아요. 안 급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듣씹.

듣고 씹혔다.


이모. 저 사실 비혼주의예요.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해요. 혼자가 좋아요.


빤씹.

빤히 쳐다보더니 내 말을 또 씹었다.

 

이모. 저 블루베리 끝나고 헬스장에서 15kg만 빼면 그때 소개해주세요.

병씹.

이 년은 뭔 병신 같은 소리를 하는가 라는 표정을 하더니 내 말을 또또 씹었다. 

안 되겠다 최후의 통첩을 날려야겠어.


이모. 사실... 저 외모지상주의예요. 박보검이나 조인성 아니면 결혼 안 하려고요. 연예인급으로 잘생긴 사람하고만 결혼하고 싶어요. 거기다 어리고 돈까지 많으면 땡큐베리마치.


그냥

이모 눈알이 마치 씨이이이발 이라고 나에게 말하는것 같았다.


그리고는 이모가 핸드폰을 딱 껐다. 

밑도끝도 없는 내 헛소리에 이모는 마치,

저런 년을 중매 해줄라고 했다니.

네 년이 아직까지 노처녀인 이유가 있었군.

안 되겠어ㅓ어어엉. 내가 잠시 쓰레기 같은 고민을 했구나.


그리고는 알겠다며 짧은 대답을 하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다른 이모들 무리 속으로 쏘옥 들어갔다. 상처를 받았는지 기분이 언짢으셨는지 이모는 더 이상 나에게 친절하지만 불편하게 대하지 않았고 불친절해졌지만 내 마음은 편하게 되었다. 그새 소문이 났는지 농장에서 그 어느 하나 나에게 '결혼'을 언급하지 않는다. 난 그냥 사지만 멀쩡한 처녀가 되었다.


그렇게

혜숙이모와 원래 남이었지만 '더' 남이 된 지 17일이 지났다.



꽃같이 예쁘게 살라며 길가에 난 꽃을 꺾어 내 손에 쥐어주던 혜숙이모.

다시 나 예뻐해줘요.

흑흑



끗.






이전 12화 농부가 되기는 글렀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