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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Oct 11. 2023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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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는 30년이 넘는 물건들이 가득하다.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엄마와 남이 버린 고물을 주워와 보물처럼 여기는 아빠, 그리고 필요는 없는데 언젠가는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곳곳에 처넣어두는 나, 이렇게 저장강박증 3인방은 어느 것 하나조차 쉽게 버리지 못한 채 쓰레기를 품고 산다.


매해마다 1년 계획으로 오래된 물건을 버리자고 제안하지만 엄마는 이 집안에서 제일 쓸모없고 오래된 물건은 아빠 김 씨라며, 재활용도 안 되는 폐기물이라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하곤 한다. 이 말은 들은 아빠는 매번 쓰레기 봉지를 벌린 다음,

"나 들어간다? 들어가? 어?"

.. 를 외치며 화사 못지않은 매운 퍼포먼스를 펼친다.


자발적 쓰레기봉지 감금행. 설날에 먹는 떡국처럼 매년 이루어지는 연초행사 일인 연극쇼.

이 루틴을 봐야 새로운 1년이 시작되는 것 같다.




30년도 더 된, 진품명품에 나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쾌쾌 묵은 옷장이 여러 차례 내려앉았다. 아빠가 임시방편으로 고치고 붙이고 늘리고 지지고 볶고 해 지금까지 겨우 생명연장을 해왔는데 이번에는 이국종 교수님의 심폐소생술로도 살릴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내려앉아 우리 가족은 드디어 옷장을 놓아주기로 결정했다. 차라리 잘된 거라며 이번 기회에 미련 없이 옷을 다 버리자고 엄마가 제안했다. 웬일이지 싶었다. 옷장 한가득 다시는 절대 입을 것 같지 않은 10년 이상 된 옷들을 쿨하게 버려.. 는 줄 알았지만 다시 고이고이 종이가방에 넣어서 한동안 거실 현관문 앞에 방치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괴도 루팡.

옷 제가 들고갑니다.

장발장이 빵을 훔쳐 달아 가는 것보다 더 빠른 아빠의 손놀림.


아빠가 몰래 옷꾸러미를 챙겨 들고 와 큰 방 어딘가에 숨겨놨다.

이렇게 또 10년도 더 된 옷들이 생명 연장을 합니다.


옷장을 분해 하기, 딸려있는 서랍 안을 열어봤다. 20년 만에 열어봤다. 서랍 4칸 가득 오래돼서 잉크가 날아가버린 영수증과 옷을 사면 하나씩 딸려오는 여분의 단추들, 그리고 오-래 잠들어있던 나의 성적표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그렇게 나는 20년 만에 어린 시절을 마주했다. 항상 난 어릴 때 어떤 아이였을까 궁금했는데 20년도 더 지난 오래된 생활통지표가 어린 시절의 나를 기록해 두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던 건 엄마의 귀찮음이었을까 아님 딸의 어린 시절을 영원히 잊고 싶지 않은 미련 때문일까. 어쨌거나 어린이 김분주와 곧 마흔을 바라보는 어른 김분주는 여전히 같은 사람일까 궁금하다.



아쉽게도 1학년 성적표만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이때부터 산수는 못했다. 이때 수포자가 되어 고등학교 수학부진 학생으로 꾸준히 컨셉을 이어갔다.

수학은 못했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도덕성만 있으면 사람 인성은 된 거라 여기며 지금껏 잘 자랐다,

행동 특성에 적힌 '표정이 밝다'는 장점일까. 교우관계가 원만하긴 하지만 잘해보려고 한다는 것도 웃기다. 저때부터 눈치 보는 인생 서막의 시작인듯하다. 3학년의 나는 공부는 못했지만 학교 출석은 잘했다.  


하지만 성에 안찬 선생님의 한마디.

조금 더 노력하는 어린이가 되세요 예?



4학년

적극적입니다

적극 참여합니다

흥미 있게 참여합니다

생활은 잘합니다


공부는 모르겠고 적극적으로 참여만 잘하는 아이.

프로참석러 김 씨. 어린 시절부터 여기저기 참석만 하다.



5학년

성적이 많이 올랐다. 독서도 하고 공부도 잘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부모님은 내가 의사나 판사, 검사가 될 줄 알았다고 한다.

김 씨 집안에 사짜 직업이 나오겠다며 어깨춤을 추시던 게 어렴풋이 생각난다.



6학년

어머니, 저는 수학 머리는 영 없나 봐요.

1+1은 알고 있으나 1+2 은 모르는 응용력 없는 아이가 저예요.

왕성한 의욕에 비해 미천한 응용력. 의욕은 넘치는데 머리가 안됨.



그리고 대망의 2학년 때의 성적표.

뛰어나고 창조적 표현력도 대단하고 탐구력 이해력이 뛰어나지만 생각을 안 합니다. 수 개념이 우수하고 계산 능력이 뛰어나지만 성의껏 끝까지 못해 실수가 많습니다. 규칙을 잘 지키며 자기 일을 잘 처리하나 침착성이 없습니다. 부지런하며 책임감이 강하나 친구와 충돌이 잦습니다. 당번활동을 착실히 하나 봉사하는 태도가 없습니다.


장점과 단점을 하나하나 나열했지만 뒤에 붙은 단점이 굉장히 강렬하고 맵다.


애는 착하지만 쪼다입니다.

치아는 고르지만 냄새가 납니다...의 수준.


결국 담임선생님이 바라본 2학년의 나는,

생각도 안 해요 실수도 잦아요 봉사하는 태도도 없어요. 교우과의 충돌도 많아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선생님이 날 싫어했던 거 같다. 칭찬을 할 거면 칭찬만 하고 욕을 할 거면 욕만 하지. 스승의 날에 한번 찾아뵙고 선생님께 당당하게 말씀드리고 싶다.


백옥희 선생님.

사람 그렇게 안봤는데 이십몇년이 지난 지금 다시 성적표보니까,


크으. 사람 잘 보신다 굿굿.

혈액형, 별자리, MBTI보다 더 정확한 선생님의 분석능력.

대한민국 교육감이 여기 계셨네. 이 정도면 교사가 아니고 미래예언가시구먼.


저는 여전히 실수와 충돌이 잦고 생각 없이 살고 있습니다.

저를 꽤 뚫어 보셨네요. 그래도 행복해요.

뼈때리는 진찰. 감사합니다.





끗.





+

어머나

나 국민학교 출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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