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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Oct 18. 2023

결혼식 답례품으로 민망함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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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지기 L군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서울을 다녀왔다.

10년 전, 필리핀 어학원에서 L을 처음 알았고 그로부터 5년 뒤, 서울 나들이 왔을 때 한번 보고, 또 5년이 지난 오늘 L은 결혼을 했다.


생각해 보니 10년 동안 우린 단 두 번 봤다. 하지만 이제까지 쭉 만나왔던 것처럼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예전에 L군과 장난 삼아 서로가 70살이 됐을 때까지 싱글이라면 그때 둘이 결혼해서 병원 보호자 역할을 하자고 간병인보험처럼 서로를 묵혀두었다. L군은 요즘 같은 100세 시대에 70살은 한참이라며 90세까지 둘 다 싱글이면 그때 결혼식을 올리자 했다. 자존심 상한다. 90세에 올릴 수 있는 식은 우리 둘 중 한 명의 장례식이거나 아예 두 명 다 죽어버린 영혼 결혼식밖에 없다. 어쨌거나 50년 뒤에 있을 나와의 결혼식이 싫었는지 L은 결혼을 해버렸다.




멀리서 오는 내가 신경 쓰였는지 L은 결혼식 몇 달 전부터 결혼식에 오면 본인의 친구, 직장동료, 사촌, 팔촌, 동네사람 중 아무나 한 명을 소개해준다 했다. 99%는 장가갔으나 그나마 결혼 안 한 몇몇의 친구가 있으니 와서 보고 마음에 들면 바로 연결시켜 준다 했다. 천리길을 가야 하지만 말로만 듣던 서울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피로하던 마음마저 회복돼버렸다. 아 박카스 같은 서울남자들이여 날 기다리시오.


왠지 인연이 있을 것 같은 좋은 예감에 일찍부터 서둘렀다. 새벽 5시 버스라 새벽 3시에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제모하고 안 바르던 바디크림도 바르고 곱게 화장하고 머리까지 했다. 친오빠 결혼식에 딱 한번 입고 모셔뒀던 최고오급 원피스도 차려입었다. 택시 타고 시외버스 타고 또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5시간 만에 떨리는 마음으로 식장에 도착했다.


어머니, 결혼식 하객으로 왔다가 사위 하나 데리고 귀향하겠습니다.

금의환향. 사물놀이패 준비해 주세요.


신부대기실의 문이 열리는 것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5층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웰컴 투 칠순잔치.

L군의 결혼식인가 어르신 박람회인가.


층수를 잘못 내린 줄 알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L군이 건치이빨을 보이며 흰 장갑을 낀 채 손을 야무지게 흔들고 있었다. 분명 결혼식에 와서 마음에 드는 남자를 고르라고 했는데.

남자라고만 했지 몇 살이라고 안 했다.

부글부글.

결혼이 될지 재혼이 될지는 나의 선택.


50대도 계시고 60대도 계시고 70대도 계시고. 스킨라빈스만큼 다양한 어르신들의 연세.

어림잡아 평균 연령은 65세다.

이제 보니 결혼식에 참석시키려는 개수작이었네.


L군이 첫째 아들이다 보니 부모님 손님이 더 많은 상황이었다. 화가 났지만 신부보다 더 밝게 웃던 L의 행복한 웃음에 용서하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신경 쓰였는지 하와이로 신혼여행 가서 내가 마음에 들 법한 남자의 연락처를 받아오겠다는 말에 안 봐도 어떤 분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불 보듯 뻔해 그냥 무사히 살아만 돌아오라고만 말을 전했다.


부글부글.



이른 새벽부터 분주하게 챙기다 보니 정신이 없었다. 빳빳한 새 지폐로 축의금을 준비했는데 지갑에 넣어가면 구겨질 것 같아 집에 대충 한자로 뭐가 적힌 새 봉투가 있길래 이름을 적어 돈을 넣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결혼'이라 적혀있는 느낌이 왔다. 새벽이라 주무시는 부모님을 깨워 물어볼 수도 없어 그냥 챙겨 나왔다.


결혼의 결, 혼의 혼 자겠거니.


식장에 도착해 축의금을 내러 갔는데 비치되어 있는 봉투에 적힌 한자와 내가 가져온 봉투의 한자가 달랐다. 그것도 매우 달랐다. 하지만 두 봉투 다 뭐라 적혀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혼자 결혼식에 참석한 거라 물어볼 사람도 없고 네이버로 한자 검색할지도 몰랐다. 혹시나 하는 의구심에 일단 결혼식에 있는 봉투로 옮겨 담았다.


내가 들고 온 봉투에는 두 개의 한자가, 식장에 있는 봉투는 세 개의 한자가 적혀있는거 보니 '결혼'이 아니라 '축혼인'이나 '결혼짱'이겠거니. 몰라 몰라. 다다익선이랬다. 왠지 세 개의 한자가 '더' 축하해 주는 것 같아서 바꾸길 잘한 것 같다.


다음날 집에 와서 엄마한테 이게 무슨 봉투냐고 보여주니,

당신의 결혼에 애도의 뜻을 전하며 조의를 표합니다.

축하합니다 스스로 무덤을 파셨군요.

심심한 위로를 건넵니다. 



축의금대신 조의금을 내고는 신랑 측에 커다란 의문과 공포감을 심어줄 뻔했다.

도대체 김 씨가 누구길래 이 좋은 날 이런 초를 치는가.


나를 벌레ㅅㄲ 보듯 보는 엄마의 경악한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러게 수학과외대신 한자과외를 시켜주셨어야죠.

습관적 남 탓으로 못난 나 자신의 허물을 또 덮습니다.



평소에 잘 신지 않는 구두를 신어서 발이 너무 아팠다. 코로나로 모든 행사가 취소되면서 3년 동안 신발장에 고이 모셔뒀다가 오랜만에 꺼내신었다. 발등에 살이 쪘는지 길이는 맞는데 넓이가 맞지 않았다. 4인승 자동차에 5명이 억지로 끼어 탄 것처럼 새끼발가락이 아팠다.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결혼식용 구두라 울며 겨자 먹기로 발을 구겨 넣었다. 신다 보면 늘어나지 않을까 싶은 헛된 바람으로.


고통이 왔다. 왕자랑 결혼하기 위해 억지로 발을 구겨 넣은 신레렐라 언니의 간절함과 고통을 이해 못 해 욕했던 나 자신을 반성한다. 신데렐라 둘째 언니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8시간이 지나도 늘어나기는커녕 발가락이 가락국수면발처럼 통통하게 부어올라 신발이 더 작아졌다. 이렇게 계속 걷다 보면 가짜 레자가죽을 뚫고 발가락이 탈출할 것 같았다. 발가락이고 발목이고 절단될 것 같아 잠시 휴식을 취해 바람을 쑀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리없는 절규.

주인님. 이제 절 놓아주세요.

이곳은 제가 있을 곳은 아닌 것 같아요.


맨발 걷기가 요즘 유행이라는데 구두를 벗고 유행을 따라가 볼까 싶었지만

새끼발가락이 소시지인 줄 알고 지나가는 개한테 물릴까 봐 두려웠다.

광견병이며 쇠독이며 파상풍이며, 시골촌년은 서울이 무서워 맨발 걷기를 포기했다.

차라리 지금 맨발 걷기가 아닌 사족보행이 유행이었다면 도전해 볼 만했다.


5분간의 짧은 자유를 끝으로 다시 자발적 신발감옥에 갇힌 채 다리를 질질 끌며 친구를 만나러 번화가로 향했다.



홍대역에 도착해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저기요.


왔네 왔어. 말로만 듣던 길거리 캐스팅인가.

아님 인터넷으로만 읽어봤던 훈남의 번호 따 임인가. 


네...?

샤랄라하며 뒤를 돌아보니 생각보다 많이 어린 남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저기. 혹시 대학생이세요?

저기서부터 계속 봤는데 그쪽 눈이 너무 맑으셔서. 혹시 잠시 이야기 나눌 수 있으실까요.


서울남자다. 결혼식에서의 한을 이곳에서 풀겠구나.

그래. 일단 무슨 말인지 들어는 줘야지. 컴온요.


저기

혹시

조상님이 그쪽을 돌보고 계시는 거 알고 계세요?


응 ㅆ발. 도를 아세요.


나에게서 호구 냄새가 났나 보다.

아주 잠시 나를 대학생으로 젊게 본 그의 눈썰미에 감동하여 마음이 활짝 열려 제사를 지내려 따라갈 뻔 헀지만

나를 보고 있지만 나를 보고 있지 않는 듯한 그의 공허한 눈빛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말로만 듣던 '도믿남'이다. * '도를 믿습니까'를 외치며 포교에 열을 올리는 사이비종교인

나에게도 그 분이 찾아오셨다.

호구냄새를 귀신같이 맡는다는 그 분들.

아 역시 서울이다.


I SEOUL YOU.


조카같이 어린 대학생이 이 험한 세상에서 저러고 다닌다는 현실이 슬프지만 나는 아픈 친척도 없고 원을 풀어드려야 할 조상도 없고 내 미래가 궁금하지도 않다. 내 조상님보다는 본인 제사를 곧 준비하셔야 할 것 비주얼.

사실 이쁘다는 말을 해줬으면 따라가서 굿까지  심정이었지만 다행히 끝까지 이쁘다고는 안 해줬다.





색동저고리 입을뻔했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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