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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Nov 14. 2023

이번생에 운전은 처음이라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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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의 단짝 H는 친구들 중 유일하게 운전을 못한다. 이제껏 운전을 꼭 해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차로 20분이면 될 거리를 버스 여러대 갈아타고 몇십 분을 걷고 걸어 1시간도 넘게 걸려 도착한 경험들이 있어 차를 몰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몇 번 한 적은 있다. 하지만 이것도 일 년에 한두 번 겪는 일이라 크게 불편하지 않았고 요즘은 워낙 대중교통 환승이 잘되어있다 보니 자차의 필요성을 크게 못 느꼈다. 어차피 나와 H는 남아도는 게 시간이라 택시비를 쓸 바에 버스를 타고 돌고 돌고 돌아간 뒤 택시비 보다 비싼 스타벅스 커피 한잔 목구멍에 때려 넣으면서 '이것이 젊은이들의 낭만이지 그럼 그럼' 하고는 차 없는 우리 자신을 위로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H는 돌연 운전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곧 마흔을 앞두고 더 이상은 버스를 타고 돌고 돌고 돌아다닐 수 없다고 비싼 도로 주행 연수를 끊더니 2달 만에 자신감을 얻었다. 자본의 힘으로 뚜벅이에서 자동차 레이서가 되어버렸다. 이미 타고 다닐 차도 준비된 상황이었고 조금씩 자주 차를 몰고 다니면서 손에 운전 감각을 익히면 될 것 같다고 했다. H는 운동신경이 아주 발달한 친구라 잘해 낼 것이라 생각했지만 13년 전, 도로주행 시험을 치다가 흥분한 H는 오락실 게임처럼 차를 신나게 폭주해서 몰았다. 게임과 현실을 구분 못한 H는 결국 탈락의 고배를 마셨고 두 번째 시험만에 합격했다. H와 동행했던 선생님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본 뒤, 저 년의 차는 절대 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오빠네 집에서 2주를 강아지 집사로 살다가 오랜만에 H를 보러 부산으로 내려갔다. 때마침 H가 옆 동네 맛집에서 점심식사도 할 겸  운전연습도 할 겸 한 번 가보자 했다. 개복치 수준의 쫄보성향을 타고난 나로서는 연수 선생님 이외에 사람을 태우는 게 내가 처음이라고 덜덜덜 떨면서 말하는 친구의 아가리를 쳐다보고 있자니 찝찝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오갔다. 하지만 첫 번째 승객으로 나를 꼭 태워주고 싶었다는 20년 지기 H의 마음을 뿌리치지 못해 비장한 마음으로 응했다. 속으로는 분명 이 년은 내가 생명보험, 실비보험, 자동차보험 등등 보험이 열몇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병원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으로 덜컥 나를 동행시켰으리라 의심을 내려놓지 못했다.


H가 주차장에서 차를 빼고 오겠다고 하여, 입구에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부터 덜커덩 덜덜덜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H가 임플런트 치아보다 하얀 흰색 자동차를 끌고 내 앞을 횅- 하니 지나쳤다.


이 년 뭐지. 


다급하게 친구 이름을 부르며 뛰어가니 친구가 너무 긴장해서 나를 못 보고 지나쳤다고 했다. 이때였다. 이때 나는 그냥 자리에서 도망쳐야 했다. 도로옆에 차를 잠시 주차하고 나는 H의 새 차 같은 중고차를 한 바퀴 뺑- 둘러보면서, 이야 H, 성공했구먼. 멋져 멋져 라 말하고 H의 트렁크 쪽으로 걸어가니,

과대광고. 제 뒤로 붙지 마세요 지옥으로 가는 차입니다.

불안하게 해.


H말로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초보운전 스티커 1개일 때보다 3개일 때 다른 사람들이 더 양보를 잘해준다고 했다. 난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스티커 3개가 주는 압박감이 압류딱지 수준이다. 보는 사람을 숨 막히게 한다.




H의 옆자리에 탔다. 우리가 고등학생 때부터 꿈꿔왔던 순간이었다. 어른이 된 우리 둘이 차를 타고 이곳저곳을 바람처럼 옮겨 다니며 인생을 즐기는 그런 성숙한 모습. 하지만 그런 낭만을 즐기기 전에 H는 시동을 킴과 동시에 운전대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채 기도를 시작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무사히 살아서….'


운전 앞에 간절해지는 그녀의 믿음 사랑 소망. 난 종교는 없지만 왠지 오늘 하루만큼은 하느님에 기대고 싶어졌다.

기도를 다 했는지 H는 아까와는 다른 비장한 표정으로 나에게 몇 가지를 부탁했다. 시끄러운 핸드폰 알람소리 안 돼요. 쓸데없는 잡담 안 돼요. 사이드미러 가려지니 몸 앞으로 숙이면 안 돼요. 운전 중 놀랠 수 있으니 옆에서 리액션 안 돼요. 거슬리니 숨도 쉬면 안 돼요.


어쩌란 말이오. 

이럴 거면 나 왜 데리고 나왔니 그냥 배달이나 시켜 먹지.


하지만 난 H를 응원해주고 싶었다.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운전이 무서워서 도전할 시도조차 못했는데 한번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해내고자 하는 H의 도전을 지지해주고 싶었다. 친구로서 해줄 수 있는 건 H의 부탁대로 옆자리에 앉아 숨도 안 쉰 채 돌하르방처럼 가만히 있어주는 것이었다.


낮은 속도로 느릿느릿 서행하는 H의 차 안에서 바라보는 11월의 요일은 쓸쓸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은행나무를 바라보니... 이 정도 속도면 뛰어가는 게 더 빠르겠다는 생각을 아주 잠시 2초 정도 하긴 했으나 이것 또한 추억으로 기억하기로 했다.


친구야, 오늘은 참 좋은 날이네.


날씨도 선선하고 하늘은 푸르고 떨어진 가을 낙엽으로 인해 땅은 노랗고

운전대 잡고 있는  얼굴은 질려서 쌔파랗고.

딱- 죽기 좋은 날이네.

떨어지는 것이 낙엽인가 내 목숨인가.




목적지 절반쯤에 왔을 때 큰 회전교차로가 나왔다. 복잡한 도로다 보니 다른 길보다 차가 많았다. 친구는 어차피 이런 상황도 계속 부딪쳐 연습해봐야 한다며 호기롭게 교차로에 진입했다. 빈틈을 찾아 끼어든 다음, 우회전을 해야 하는데 이 년이 쫄보ㅅㄲ 라서 옆에 차가 따라붙으면 바로 포기하고 다시 교차로 품에 쏙 안겼다. 그리고 계속 반복되는 무한 교차로의 굴레. 끼어들기만 하면 다른 차가 빵빵거리고, 또 큰 버스가 오고.


이래서 못가 저래서 못가.

그리하여 우리는 5바퀴를 더 뱅뱅 돌았다. 참다못한 내가 한마디 했다.

고마해라. 마이 돌았다가.

이럴 거면 그냥 회전목마 타러 가자하지 그랬냐.

 

다행히 마음씨 좋은 트럭기사님의 배려로 우리는 개미지옥 같았던 교차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차로 16분이면 될 거리를 H는 41분 만에 도착했다. 가성비 최악이란 게 이런 걸까. 기름 한 방울 안나는 나라에서 운전 고자는 죄인입니다. 이 정도면 차라리 내가 차를 이빨로 끌고 와도 이보다는 빠를 자신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하지 않았다. 이것이 우정이다.


출발 전에는 허기져서 뭐든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장시간 운전으로 우린 입맛을 잃었다. 칼국수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둘 다 식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다시 돌아갈 길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은근슬쩍 혼자 따로 걸어서 가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왕 오늘 하루 친구 손에 목숨을 걸었으니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끝까지 함께하기로 했다. 사실 나는 친구보다도 보험회사를 더 믿었다.


돌아가는 길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H는 비 오는 날 선생님과 운전 연습한 적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고 했지만 유리창 와이퍼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니 마치 내 목숨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숨이 왔다 갔다. 내 앞에서 저승사자가 왔다 갔다. 갑자기 비가 많이 쏟아졌고 H는 당황한 나머지 핸들을 잡은 두 손을 조금 떨기 시작했다. 외줄 타기급 아슬아슬한 곡예운전에 아까 먹은 칼국수 면발이 항아리에 갇혀있다 피리소리에 탈출한 고비풀린 코브라처럼 미처 소화되지 못한 채 위장에서 탈출하려는 게 느껴졌다. 불안이 극에 닿아 운전 트라우마가 생기기 전에 다행히 집 앞에 도착했다.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나는 만족했다. 주차를 하려는데 지상에 자리가 없어 지하주차장으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친구는 한 번도 지하주차를 해본 적이 없고 할 줄 모른다고 상당히 당황해했다. 시간도 마침 점심시간 언저리에 걸쳐있어 분명 한두 명은 차를 뺄 것이라 생각하고 나와 H는 일단 지상 주차장을 돌면서 천천히 지켜보기로 했다.


돌았다.

계속 돌았다.

빈자리가 나올 때까지 돌았다.

쳇바퀴처럼 뺑뺑 돌았다.



그러다가 결국,

날이 깊었다.




끗.










+

용기를 얻은 H가 다음에는 다른 지역으로 놀러가자고 했다. 아직 답을 하지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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