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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Nov 08. 2023

조카탄생으로 가시밭길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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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탄생으로 오빠네 집에 칩거하며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쿠팡 새벽배송에 의지하여 끼니를 때우고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를 숨 쉬듯 24시간 돌려보며 살아가던 7일째 되는 날 아침, 오빠는 걱정 0.001%가 섞인 한심스러운 눈빛으로 나에게 제발 밖에 나가서 공기도 쐬고 개인활동을 좀 하라고 했다. 강아지 산책 외출 30분을 제외하고 하루종일 거실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반경 100cm를 벗어나지 않은 곧 마흔 살 동생이 걱정이 된 오빠는, 집 근처에 대공원이 있으니 강아지 걱정은 하지 말고 잠시 제발 나가서 산책도 하고 인천의 가을을 몸소 느끼고 오라고 반 강제로 나를 떠밀었다.


ok. next time에 나갈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빠 말로는 공원 조성이 너어어어어무 잘되어 있고 멀리서도 시간 내서 구경 오는 곳이니 가볍게 한두 시간 정도 걷고 오면 좋을 것 같다고 회사업무 브리핑 하듯 옆에서 떠들어댔다. 인터넷으로 공원 자료를 보여주며 코스모스도 봐야하고 메타세쿼이아도 봐야하고 어디 가서 뭘 보고, 뭘 해야 하는지 인천 홍보대사처럼 인천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를 강요했다. 얼마나 대단한 공원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움직이기 싫은 몸을 억지로 꾸역꾸역 이끌고 집 앞에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아침 가을공기는 서늘했지만 은근 기분이 좋았다. 왠지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에,

돌아가세요 오늘 장사 안 합니다.

이곳에는 가을에만 볼 수 있는 코스모스도 있고 핑크뮬리도 있고 국화도 있고 메타세쿼이아도 있지만 

넌 못 봐. 꺼지세여ㅕㅕ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 정기휴장이었다. 왠지 느낌상 오빠는 월요일마다 휴장임을 알았을 것 같은 찝찝한 생각이 들었지만 단 20분이라도 동생을 걷게 해 주려는 오빠의 사려 깊은 마음을 넓게 헤아리기로 했다. 멀리서나마 살짝 보이는 알록달록한 꽃들에 시선이 뺏겨 가을의 센티함을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찌-릿한 느낌을 받았다. 다리를 삔 것도 아니고 지뢰침을 밟은 것도 아닌데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마다

으아앙아ㅏㅏㅏㅏ

전기 고문이 따로 없구먼


이 정도의 고통은 분명 적어도 발바닥에 대못이 박혔거나 고슴도치 혹은 전기뱀장어를 밟았을 것이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시 집으로 돌아가 신발을 벗고 거실 복도를 맨발로 살짝 걸어보니 오른쪽 발바닥이 굉장히 아팠다. 뒤꿈치 부분에 못 보던 검정 점 같은 게 생겨있었고 그 부위가 아파왔다. 뭔가가 박힌 게 틀림없다. 이미 오빠는 조리원으로 간 상태고 혼자 병원을 갈 수 없었던 나는 내일 오빠가 집에 돌아오면 같이 병원을 가볼 생각으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시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며 낄낄거리고 있는데  1일 1 강아지산책을 부탁했던 오빠의 확인차(감시차원) 전화가 왔다. 다리에 뭐가 박힌 것 같아 통증으로 인해 도저히 못 걷겠다고 오늘은 강아지 산책 하루 쉬겠다고 하니 나가기 싫어서 개수작을 부린다고 격노를 했다. 힝.




다음날 오빠는, 혼자 집에서 강아지 돌보고 밥 차려먹을 생각에 미안해서 평소보다 아침 일찍 조리원에서 나왔다... 고 말은 했지만 눈에는 저년이 정말 발바닥이 아픈 것인가 의심이 그득그득했다. 발바닥을 높게 들어 뭔가가 박혀있다고 오빠 얼굴에다가 발바닥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흔들어대니 눈에 뵈지도 않는다며 뜬금없이 불꽃 발바닥 스매싱을 때렸다. 네 년 꾀병의 냄새가 인천 앞바다를 채운다나 뭐라나.


분명 어젯밤에는 가시가 떡하니 박혀있었는데 오빠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 보니 착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가시인가 보다. 아프다고 징징거리니 오빠는 병원에 가면 칼로 발바닥을 째서 가시를 들어내고 장대 바늘로 몇 차례 봉합하고 깁스까지 해서 몇 주를 인천에 더 있다가 가야 할 수도 있다고 듣기만 해도 스트레스받는 과대진료망상을 나에게 쏟아냈다. 두려웠다. 의사의 손을 거치기 전에 허준을 즐겨봐서 어느정도 기초적인 의학지식이 있는 내가 스스로 한번 가시를 빼봐야지 싶어서

비트코인 채굴하듯 발바닥 가시 채굴하기.

있는데 안 보여요. 분명 어제는 있었는데 없어요.


없는 가시를 구태여 찾아내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담긴 나의 자세가 굉장히 꼴뵈기 싫다고 도촬 하는 오빠의 지극정성에 감사를 전합니다. 발사이즈가 245m인데 340m로 만들어버린 오빠의 아이폰 사진 기술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확실히 뭔가가 있는 것 같아서 오빠에게 말해(애걸복걸하여) 조리원 근처에 있는 정형외과로 가기로 했다. 병원을 가기 전 의사 선생님에게 방치되어 거칠어진 나의 오른발을 보여줄 수 없어 급하게 오른발만 깨끗이 씻고 다리털도 야무지게 깎았다. 병원에 도착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자꾸 오빠가 말한 과대진료망상이 떠올랐다. 나의 발바닥을 보자마자 심각해진 의료진들이 바삐 움직이더니

수술을 시작하지. 메스.

환자분 마음의 준비하세요. 오늘 두 다리로는 못 걸어 나가실 겁니다.


머릿속에 온갖 불길한 생각과 두려움과 앞으로의 미래와 부모님의 슬픈 얼굴이 떠올랐다. 불치병이면 어쩌지. 독가시면 어쩌지. 가시가 아니라 유리조각이나 철사가 이미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고 있으면 어쩌지. 영원히 못 걸으면 어쩌지. 오빠가 시작한 가스라이팅 수준의 과대망상이 극에 치닫는 순간에 다행히 내 이름이 불려졌고 간호사 선생님이 나를 엑스레이 실로 보냈다. 


가시 하나 빼러 왔는데 엑스레이까지 찍나 싶었다. 촌에서 올라왔다고 과잉진료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의심병까지 생겨버렸다. 그래도 일단 하라는 대로 했다. 엑스레이실에서 잘생긴 선생님이 나오시는 걸 보는 순간, 그럼 그럼 무조건 엑스레이가 진료의 기본이지 싶은 마음에 잠시 품었던 과잉진료의심을 거두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기계 위에 앉아 다리를 올려두라 친절히 설명해 주셨다. 없는 병도 나을 것 같은 선생님 존재의 은혜로움과 환자를 대하는 따뜻한 인류애가 느껴졌다. 오른쪽 양말을 벗어 오른쪽 다리를 엑스레이 기계 밑에 올려뒀는데 양쪽을 같이 비교해봐야 한다며 왼쪽양말도 벗어 같이 올리라고 했다.

왼쪽발은 안 씻었는데. 판단 미스.

이런 이런.


ㅈ됐네.




오른쪽 발꿈치 쪽에 가시가 있다고 오른쪽만 찍는 거 아니냐는 나의 간절함이 가득 담긴 질문에, 시간 끄는 게 귀찮았는지 손수 나의 왼발을 당겨 기계밑에 가지런히 두고는 양말을 친히 벗겨주셨다 그리고 잠시 뒤 세상에 공개되어 버린 나의 더러운 발바닥과 신생아 머리숱과 맞먹는 몇 가락의 가늘고 기다란 발가락털과 슈가파우더 마냥 피부에 붙어있던 하얗고 뽀얀 각질, 쓰리콤보가 엑스레이실 잘생긴 선생님께 인사를 전했다.  



찰나에 나는 봐버렸다. 귀여운 캐릭터 양말 속에 꽁꽁 숨겨져 있던 나의 더럽고 불길한 왼발을 보고 0.03초 정도 잠시동안 흔들린 의사 선생님의 동공을. 

미처 마저 씻고 오지 못한 왼발바닥은 앞이 보이지 않는 나의 미래처럼 새까맣고, 발등과 발가락에는 미용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머리카락처럼 매가리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각질은 하얀 눈처럼 엑스레이 조명을 받으니 더욱 빛나보였다. 날씨가 추워져서 다리 관리에 소홀했다 정말이다. 오빠가 앞서 겁줬던 수술실에서 발바닥을 째고 대바늘로 집고 깁스를 기저귀 마냥 몇 주를 차고 있는 스토리보다 더 공포스러운 찰나의 1분이었다. 왠지 진료비에 웃돈을 더 얹어서 계산해야 할 것 같은 죄스러움이 들었다.


엑스레이 결과를 통해 다행히 쇠붙이 종류는 아닌 것 같다고 하셨다. 의사 선생님이 나의 발바닥을 여러 번 내려치고 만져보고 했는데 전혀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검은 자국이 있던 부분은 가시가 박혀있다가 빠져서 약간의 통증이 느껴질 수 있다고 우선 며칠 지켜보다고 했다. 결론은 아무것도 발바닥에는 없다는 것이다. 


참 신기한 것은 두 눈으로 직접 엑스레이를 보고, 의사 선생님에게 안심해도 된다는 말을 들음과 동시에 다 치유된 기분이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게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 같다. 한 다리로 절뚝거리며 들어왔다가 두 다리로 당당하게 걸어 나가게 하는 이곳은 분명 가시 맛집임에 틀림없다.


 

감사해요. 인천의 허준이여.

I am 신뢰예요.





끗.






+


싸늘하다 

조만간 손가락 하나를 잃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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