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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Nov 21. 2023

시력 0.1이 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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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눈이 나빴지만 더 나빠졌다.

한해 한해 갈수록 늘어나는 숫자는 나이와 몸무게고 줄어가는 숫자는 키와 통장 잔고 그리고 시력이다. 안경을 맞추러 갔을 때 시력이 많이 좋지 않다고 꼭 안경을 쓰고 다니랬는데 왠지 안경을 쓰면 눈이 작아져 못생겨보여 잘 쓰고 다니지 않았다. 불편은 한순간이지만 외모는 오래가기 때문이다.


밤새 껌껌한 방 안에서 핸드폰을 매직아이 하듯 뚫어져라 가까이서 몇 시간씩 보다 보니 시력이 0.1로 떨어졌다. 곤두박질치는 내 주식만큼이나 시력이 계속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이제와 부랴부랴 안경 쓴다고 시력이 좋아질 것 같진 않고 하루종일 미디어 세계에서 허우적대며 급 노화되어버린 피로한 안구에 휴식을 줄 겸 동네 뒷동산에 마실을 나가기로 했다. 맨얼굴을 세상에 내보이기 두려워서 마스크를 꼈더니 금세 나의 뜻뜻한 콧김에 의해 안경에 습기가 차올랐다. 불편해 불편해. 자연을 쌩 두 눈 한가득 담기 위해 과감히 안경을 벗고 제대로 뵈이지도 않는 눈뜬 장님상태로 밖을 나갔다.




날이 차웠다. 얼마 전까지 더웠던 거 같은데 어느새 가을을 건너뛰고 겨울이 온듯했다. 엄마말로는 아파트 뒤쪽 산책로가 아주 멋들어지게 리모델링되었다고 시간 나면 꼭 가서 내가 낸 세금이 잘 쓰였는지 보고오라 했다. 그게 오늘이다. 이 칼바람을 뚫고 자체 세금조사단이 되어서 민원거리가 없는지 잘 살펴보리라 마음먹었다.


나, 동네순찰대원으로써 동네를 잘 살펴보리라.


길을 나서는데 왠 하얀 비숑이 가게옆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에 강아지를 밖에 두다니, 동물애호가로서 신경 쓰였지만 주인이 근처에 있겠지 싶어 가던 길을 마저 갔다.


오후 3시, 어중간한 시간이라 그런지 산책로에는 사람이 없었다. 천천히 겨울 햇볕을 쐬며 걷고 있는데 주머니 속에 언제 넣어뒀는지 알 수 없는 사탕이 손끝에 잡혔다. 저혈당이 와서 길바닥에 쓰러지기전에 얼른 사탕을 까먹고 주변에 휴지통이 없나 두리번거렸다. 없다없어. 우리나라는 거리에 휴지통이 없어도 너무 없다.  


사탕껍질이 끈적끈적해 주머니에 다시 쑤셔 넣기도 싫고 그렇다고 길바닥이나 수풀에 슬쩍 버리기도 싫다. 손에 쥐고 몇분을 걷다가 저 멀리서 쓰레기자루가 보였다.


오 쓰레기통인가 보다.

역시 우리 동네는 살기 좋은 동네야.

개똥을 모아주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오빠네 강아지 개똥을 담아 올걸 그랬다.


쓰레기통은 없지만 개똥자루는 있는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사탕봉지를 넣어도 되나 안 되나 고민을 하며 앞에서 서성거렸다. 마대자루가 꼭 개똥을 위한 자루인건지, 아님 다른 쓰레기도 버려도 되는건지 알수없어 고개를 자루안쪽으로 들이밀안에 어떤것들이 있나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내 뒤로 자전거 한대가 지나갔다. 찰나에 봤지만, 자전거를 몰고가는 할아버지의 표정을 잊을수없다. 시력은 안 좋지만 할아버지 표정은 읽을 수가 있다.


저 ㄴ은 뭐 하는 년이지. 동네사람들 여기 개똥서리꾼 있어요.

...하는 그런 표정.



아니예요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그런거.




심심찮게 강아지 산책을 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그래서 저런 자루를 설치한걸까. 내 세금이 잘 쓰이는 것 같아서 뿌듯하다. 사람들이 개똥을 안 치우고 그냥 가서 그런 걸까 아니면 누군가가 개똥을 어딘가에 알뜰하게 쓰려고 저렇게 모으는 걸까. 이런저런 궁금함을 가득 앉은 채 개똥자루를 뒤로 하고 또 걸었다. 이번에는 또 다른 표지판이 눈에 보였다.

개보고 하는 말인가. 사람보고 하는 말인가.

혼란하다 혼란해.


개똥은 되지만 니똥은 안돼.

개똥인척 사람똥을 개똥바구니에 쓰윽 넣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의문이 든다.

머리를 비우러 산책 나갔다가 머릿속만 더 복잡해진다.




나간 김에 마트에 잠깐 들러서 초콜릿과자를 하나 샀다. 앞서 마트에서 나온 할머니가 8초남은 신호등을 건너느라 총총걸음으로 뛰시더니 곧이어 박스꾸러미에서 뭔가가 툭 - 떨어졌다. 눈이 안 좋아 멀리서는 그게 뭔지 자세히 보이진 않았는데 묵직하고 둥근 모양이 꼭 동전주머니나 열쇠꾸러미 같았다. 나중에 할머니가 길거리에 떨어뜨리고 온 사실을 알게 되면 속상하지 않을까 싶어서 '저기요 저기요' 외치며 뛰어갔다. 정의의 동네순찰대원으로써 우리동네 할머니가 속상해하는걸 볼순 없지 그럼그럼.


저기 할머니 여기 뭐 떨어뜨리셨어요

할머니이이이-

저기요 여기 떨어뜨리셨다구요요오오오.

달걀 주워가세요.

제가 주워주기에는 너무 묽어요.

손가락 사이로 넘쳐흘러요.


분실물로 마트에 갖다주기위해 손으로 쓸어담기에는 너무 고된일이다.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아까 봤던 강아지가 아직도 가게옆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주인 놈 용서 못해.

날씨가 더 추워지는데 이 정도면 동물학대 아닌가 싶기도 하고 혹시 버리고 간 게 아닐까 걱정스러운 마음뿐이었다. 동물애호가로서 참을 수 없다. 묶여 있는 강아지를 풀어주거나 유기견센터에 전화를 해야겠어. 동네순찰대원으로써 동물이 괴로워하는걸 보고있을수만은 없지 그럼그럼.


쭈쭈쭙.

이리와. 옳지. 쭈쭈쭈.



가까이 가서 보니 생각보다 컸다,

김 씨, 안경 좀 제발 끼고 다니세요. 왈왈왈.

남의 농기계 추위 걱정하지 말고 본인 안구나 걱정하세요.





동네순찰대원은

안경이 필요하다.





끗.






+

분명히 강아지 였다구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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