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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Dec 06. 2023

소개팅 상대로 박사님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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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마지막일지도 모를 소개팅을 번개불에 콩 굽듯 해치웠다.

예전 직장에서부터 인연을 맺고 있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인에게 남자를 소개해달라고 부탁을 해논 상태에서 전 남자친구와 갑작스레 문자를 주고받게 되었고 오가는 문자들 속에 서로 애틋했던 옛 감정이 다시 살아났다나 뭐라나. 다른 남자를 소개받을 수 없는 상황에, 지인이 소개받을 남자를 찾았다고 연락이 와서 곤란하다고 한다. 그러다 갑자기 이 추운 겨울날 혼자 외로워 울고있을 내가 생각났다고 했다.


응 그건 핑계고. 그냥 유일하게 결혼 안 한 사람이 나뿐이라 그런 것 같다. 말이 좋아 나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거지 본인이 욕먹기 싫어서 나를 억지로 소개팅자리에 떠밀어보낸것같다. 나를 생각해준게 어디냐며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렸다.


사람일은 모르니까 나가서 일단 만나보라고 애원... 이 아닌 협박... 도 아닌 친구로서의 부탁이라며 의리에 약한 나의 여린감정에 호소를 하는데 어찌 거절할수 있으리오. 마침 매년 그랬던 것처럼 크리스마스를 절친 노처녀 H와 보낼 생각하니 아찔하고 쓸쓸하고 애처롭고 뭘 할지 뻔히 아는 식상한 루틴이 지겹기도 해서 한번 만나보기로 했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 싶은 기대와 함께 소개팅자리에 나갔다.




유난히 추운 주말이었다. 커피숍에는 겨울 추위를 피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가장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남자를 기다렸다. 약속시간 정각에 맞춰 남자가 나타났다. 상아색 얇은 니트를 입고 무테안경을 쓴 멀끔한 인상의 남자였다. 차가워보였지만 똑똑해 보였다. 올해는 이놈과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수 있을것 같은 첫눈만큼의 설레임이 느껴졌다. 커피를 받아와서는 자리에 앉았는데 분위기가 어색했다. 눈이 마주쳐서 멋쩍게 웃었지만 왠지 아무 말이나 해야 할 것 같은 밑도끝도없는 책임감이 쏟구쳤다. 탐색전인지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경에 김이 서린채로 커피를 호로록거리고 있었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걸까. 주변에서 들려오는 대화소리만 우리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나는 말이 많은 타입이라 조용한 게 싫고 민망하다. 그래서 정적을 깨고 하는수 없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요즘 날씨가 춥죠?


어색할 때는 날씨 이야기가 최선이다. 어렵지도 않고 본격적으로 아가리를 털기 전에 혓바닥 준비운동하는 주제치고 날씨만큼 좋은 게 없다. 분명 상대방은 '네, 갑자기 많이 추워졌네요. 겨울 좋아하세요?'라 물으면 겨울을 좋아한다고 대답해야지. 눈을 좋아한다고 덧붙이면서 크리스마스를 1년중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고는 크리스마스때는 주로 뭘하는지 되물어봐야지.. 마인드맵 펼쳐가듯 대화의 뿌리를 그려나가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에..


 .... 대화가 절단 났습니다.


요놈 보소. ai도 니놈보다는 길게 대답하겠다.

소개팅녀로 내가 못마땅한 건지, 숫기가 없는 건지 대화는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단칼에 절단되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 나는 신경쓰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카페에 사람이 많네요.


캬. 나 년 센스보소. 이 한 문장이면 대화의 문을 열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넘쳐. 그럼 상대방이 '그러게요.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네요.' 라 대답하겠지. 나는 또 바톤을 이어받아 온난화부터 시작해 북극곰들이 서식지를 잃어가는 슬픈 이야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푸바오의 중국 상환 등등등으로 이야기의 물꼬가 트일 것이라 기대했다.  


네. 많네요.

커피 한모금 호로록.



..뭐지? 이 남자.

나에 대한 도전인가.


나대는걸 싫어하지만 조용한게 더 싫은 나이기에 또 꿋꿋하게 끝말잇기하듯 대화를 이어갔다.


올해는 유난히 추위가 빨리 온것같아요.


.. 안녕하세요 김날씨충 입니다.

알고있는 단어가 날씨와 추위밖에 없는것처럼 나는 계속 날씨날씨 거렸다. 이정도의 노력이면 상대방이 불쌍해서라도 한번쯤은 길게 말해주겠지.


아.네에-


이런 ㅆ.

그냥 내가 싫다고 차라리 말을 해라 말을.

기상캐스터 마냥 기상 정보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건 헛대답뿐이었다.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이 정도의 무안함을 느낀 내가, 상대방 남자의 뺨을 후려쳐도 이건 정당방위다. 소개해준 친구가 전 남자친구랑 하하 호호 웃고 있을 장면을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라 귀싸대기 한방으로 상대방 남자의 무테안경을 알 없는 안경으로 만들어줄까 잠시 고민했었다. 이놈은 만만치 않은놈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도전했다. 삼고초려를 뛰어넘은 사고초려의 마음으로.





쉬는 날은 주로 뭘 하세요?


누가보면 내가 이 남자한테 매달리는줄.

나의 이 질문에 남자는 이전과는 다른 눈빛으로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주로 새를 보러 드라이브를 하거나 새 관련 다큐멘터리를 본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새를 좋아해서 마리를 키웠고 유튜브로 새(bird) 동영상을 즐겨본다 했다. 특이한 취향이지만 흥미로운 대화였다. 한 문장이상 대답해준게 어디야.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주거니 받거니가 되었다. 어릴 때 독수리 오형제 만화를 감명 깊게 봐서 독수리의 용맹함에 반해 좋아하게 되었다가 결국은 모든 새의 매력에 빠졌다나 뭐라나. 그 말을 듣고 나는,


저는 어릴 때 호빵맨을 재밌게 봤는데 그래서 그런지 호빵마니아가 됐어요 히히.


.... 라고 농담을 던졌는데.

이 년이 뚫린 입이라고 막말하네.

그거랑 그거랑 같냐. 에라이 퉤.



웃자고 한 이야기인데. 한심스럽게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안경알을 뚫고 나온다는걸 느꼈다. 대화가 다시 끊기지 않게 나는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무슨 새를 가장 좋아하냐고 남자가 좋아할 만한 주제를 던졌더니 남자는 그새 기분이 풀려서 어쩔 때는 어떤 새가 좋고, 어쩔 때는 이 새가 좋고 어쩌고 저쩌고. 대학생 때 들었던 필수교양만큼이나 알아듣기 어렵고 지루했다. 누군가가 그랬다. 사랑과 감기 그리고 하품은 숨길수 없다고. 자꾸만 터져나오는 하품을 참기위해 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콧구멍은 벌렁거렸다. 나의 지루함을 알아챘는지 남자는 핸드폰으로 새를 검색해서 여러종류의 새를 보여줬다. 특히 남자가 요즘 많이 찾아보고 있다는 동박새인지 동작새인지 초록색 참새 였는데 귀엽긴 했다. 잠시 반짝이는 나의 눈빛에 남자는 신이 나서 이새 저새 검색하더니 이놈은 서식지가 어딘지 이놈은 주로 먹는 먹이가 무엇인지 등등 묻지도 않는 이야기를 1절 2절 10절까지 해댔다.


어이쿠 박사 납셨네.

윤무부 새 박사님도 소개팅 자리에서는 안 이러십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것처럼 봉인되어있던 남자의 혓바닥을 풀어버렸다.


이..이제 그만.

처음에 너무 장단을 맞춰준탓에 브레이크가 고장한 트럭처럼 남자의 새사랑이 질주 해버렸다. 관심 없어. 관심 없다고요. 나는 새고 나발이고 모르겠고 그냥 집에 가고 싶다고요.





사실 나는 새 트라우마가 있다. 새가 무섭다. 호주에서 살았을 때 공원길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데 내 주변으로 비둘기만한 새가 맴돌았다. 불길함을 느끼고 나는 전력질주를 했지만 그 새 역시 나를 따라왔다. 머리 위에서 날던 새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나를 향해, 그것도 내 얼굴 쪽을 향해 낮고 잽싸게 날아왔다. 내가 옆으로 피하지 않았으면 그 새랑 딥키스를 할 뻔했다.


그날 분명히 봤다. 그 새 눈빛이 반쯤 돌아있었다. 나중에 호주친구 말로는 풀숲속에 둥지를 숨겨놨거나 낮은 나무에 둥지를 틀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동양인을 싫어하는 인종차별주의새 였을거라 말했다. 내가 풀숲을 가로질러 가는 바람에 나를 새알약탈자로 생각해서 공격을 했을 수도 있다고, 눈코입이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걸 다행으로 여기라고 했다. 그날 이후로 난 새 트라우마가 생겨버렸다. 


여전히 아무도 안 믿지만.

그날 그 새랑 눈이 마주쳤었다. 정말 눈알이 돌아있었다.


남자에게 나의 경험담을 이야기 해주고 싶었지만 그 새의 종이 무엇인지 왜 그렇게밖에 나를 공격할수 없었는지 등등 후토크가 두려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 그렇게 새충과 날씨충의 숨 막히는 소개팅이 피날레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시간 20분 정도 지나 저녁시간이 가까워졌고 분위기상 그대로 헤어지거나 저녁을 먹으러 가야 됐다. 식사 자리에까지 새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남자가 슬쩍 내 눈치를 봤다. 남자는 아직 못한 새이야기가 백과사전만큼이나 까마득히 남아있어 이빨이 간질간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필수교양학점을 C를 받은 나로서는 도저히 더 이상은 새이야기에 맞장구 쳐줄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사요나라. 새(bird) 용사여.

저녁으로 닭고기나 오리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궁금하긴 했다. 조류 애호가는 조류요리는 안먹으려나. 왠지 억지로 내가 고른 식당에 끌려가서는 닭볶음탕이나 오리불고기 음식 앞에서,

흐어어억ㅓㅓㅓㅓㅓㅓ엌.

이것은 새도감 127 페이지에 3째줄에 나오는 한국 토종닭이 아닌가. *사실무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부디 아픔없는 그곳에서 편히 쉬렴. 인간이 제일 잔인해. 분주씨 그렇게 안봤는데 너무하시네요.


메뉴에 비해 과한 감정을 차마 눈뜨고 봐줄 자신이 없었다.

통곡과 오열 2단콤보를 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 식사를 권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커피숍 앞에서 다음 약속을 기약하는 마음에도 없는 말만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새대가리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가스라이팅 수준의 새 이야기를 들어줄 재목이 아니였나보다.


앞으로 조류만 보면 이 남자가 생각날 것 같다. 당분간 치맥을 끊어야겠다.








아니 글쎄. 새 눈알이 정상이 아니었다니까.







+

응원해주신 댓글들,  마음들 감사합니다!

가정에 평화와 지갑에 풍요가 깃들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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