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한 뒤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시청이나 도서관에서 시민들을 위해 제공해 주는 무료 참여 수업이 많다는 것이다. 대부분 평일 오전에 하는 수업들이 많아서 직장 다닐 때는 시도할 엄두도 못 냈고 우연찮게 시간이 맞는 걸 발견하면 항상 이미 모집이 끝난 상태였다.
하지만 올 한해는 여러 강연도 듣고 수업도 꽤 들었다. 무료임에도 불구하고 퀄리티가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루종일 하는 일 없이 집에서만 뒹굴거리는 나에게 그나마 바깥공기를 쐴 수 있는 (머리를 감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이자 목적을 제공해 줬다. 여느 때와 같이 12월에는 무슨 클래스가 있나 인터넷 서핑을 하던 중 집 근처에서 크리스마스 소품을 선착순 12명에게 무료 원데이 클래스를 제공한다고 했다. 이거다. 크리스마스 오타쿠인 나에게 이 수업은 마치 선물과 같았다. 대상은 초등학생 이상 일반 시민이라고 적혀있으니 유치하지 않고 나름 결과물도 좋을 것 같아서 엄청 설레었다.
오전 8시 40분부터 컴퓨터에 앉아서 네이버 시계를 켜놓고 9시 땡 하길 기다렸다. 별거 아닌데 떨린다. 왠지 인기가 많을 원데이 클래스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9시 땡 하고 2분도 되지 않아서 금방 접수마감이 되었다. 역시 일찍 일어난 부지런한 새가 먹이를 잡아먹는 법이다. 그렇게 나는 일요일이 되기를 기다렸다.
대망의 원데이 수업날, 10시 시작시간에 맞춰 9시 45분에 클래스에 도착했다. 뒤돌아서서 강사가 수업재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괜스레 헛기침을 하고 인사를 했는데 뒤돌아선 강사가 나를 보더니 한껏 밝은 얼굴로,
안녕하세요 어머님, 저기 출석부에 자녀 이름 찾아서 체크해 주세요.
..... 난데스까?
나 어머님 아닌데.
아주 작지만 조금은 불쾌한 목소리로 기분 나쁜 티 내지 않고' 저 어머님 아닌데..' 라 말끝을 흐렸더니 강사는 짧은 외마디로 아.. 하고는 이름옆에 사인하고 아무 자리나 앉으라 했다. 강사가 다시 준비물 정리를 할 때 슬쩍 출석부를 보니 머리가 하얘졌다.
선착순으로 기재된 출석부에 내 이름이 떡하니 1번으로 적혀있었고 그 밑으로 11명의 이름들이 줄줄이 굴비처럼 엮여있었는데 이름에서 느껴지는 초딩스러움이 A4용지를 뚫고 나왔다.
박하윤. 정예서. 노유주. 박서율. 김세인 등등등
21세기 이름을 가진 그들과 내가 하나로 묶이기에 내 이름이 너무 80년대스러웠다. 매번 내가 참여했던 다른 원데이 클래스 동기들의 이름은 최소 박경자, 최덕문, 김경식, 최미숙, 김금순 정도였는데 이번 원데이 클래스 동기들은 왠지 MZ 스럽다.
불길했지만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10시가 되자 교실로 뛰어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아니나 다를까, 어머님 손을 꼭 쥔 초등학생친구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익숙한 듯이 어머님들은 출석부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찾고 아이들은 내 옆으로 촥촥촥 착석을 했다.
하나둘씩 자리를 채우더니 아이들은 동시에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 아줌마 뭐야.
여기에 왜 앉아있어.
... 글쎄 나도 이런 곳인지 몰랐다니까.
강사선생님이 신청한 인원들 명수를 새는 것을 시작으로 수업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그 공간에서 12세 이상 인간은 나와 강사선생님 둘 뿐이었다. 강사도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건 기분 탓이겠지. 인원 체크를 다 하고 강사는 활기찬 목소리로 우리들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 어린이 친구들, 안녀어어엉.
우리 오늘 다 같이 재밌게 크리스마스벨을 만들어봐요오옹. 다들 준비됐나요오옹~?
강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 초등학생친구들의 우레 같은 함성과 폭풍 같은 박수갈채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현타가 왔다. 여긴 지금 어딘가. 나는 누구인가. 여기에 무엇을 위하여 왔는가. 나년 때문에 선착순에서 밀려 집에서 울고 있을 다른 초등학생 아이를 생각하니 죄를 짓는 것 같고 마음이 무거웠다. 이렇게 어린이를 위한 수업이었으면 참여대상에 정확하게 초등학생이라고만 적어두지 그 뒤에 붙은 일반시민에 혹해서 멋도 모르고 신청한 내가 병신이지 으이고.
다른 수업에서는 같이 참여한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아주 간단한 자기소개를 자주 시켰었다. 대충 이름이랑 왜 이 수업을 듣게 되었는지 정도의 가벼운 스몰토크였는데 혹시 설마 이 수업에서도 그러지 않을까 똥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했다. ㄷ자 모양으로 앉은 참가자들이 강사선생님의 손짓에 맞게 한 명씩 일어나서
안-녕하세요. 저는 브런치 초등학교 1학년 2반 여덞짤 박서율입니다.
.....로 시작해서
안녕하세요. 저는 노처녀 어른학교 3학년 7반, 올해 삼십칠 짤 김분주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뿌잉뿌잉
...라고 말하고 철부덕 앉을 나 자신을 생각하니 올해 크리스마스선물로 산타할아버지가 마취총 한 발을 쏴줬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이제 와서 나갈 수도 없고 그냥 어서 2시간이 흘렀으면 좋겠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강사는 우리들의 개인적인 인적사항을 주고받는 걸 원하지 않았고, 본격적으로 재료를 나눠주고는 설명을 이어갔다.
열정적인 강사를 보고 있자니 나도 아이들 관련 일을 해온 터라 더 이상은 부끄럽다는 생각을 갖는 대신, 강사선생님이 어떻게 수업을 이끌어가고 아이들을 대하는지 보고 배워가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열심히 설명을 들었다. 중간중간 강사는 아이들의 참여유도를 하기 위해 쉬운 질문을 던졌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고사리 같은 손을 들고는 저요 저요 저요 를 외치며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맞추기에는 조금 어려운 질문을 했는데 어린이친구들이 어려워하니 강사는 곧이어 '선생님이 한번 맞춰보세요'라고 나를 지목했다. 그리고는
애들아아ㅏㅏ아 주목해라. 저 아줌마 드디어 입 연다.
얼마나 잘하는지 들어는 보자.
소란소란하던 아이들이 순간 침묵하더니 그들의 22개 눈동자들이 나를 향해 기대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저 여자는 어른이니까 알겠지. 어른은 다를 거야. 정답을 알고 있을 거야. 어서 답을 말해주시오 어른여자여.
... 어- 재활용이요.
소신껏 정답이라 생각하고 대답했는데 강사선생님이
땡!
아- 아쉽네요. 정답은 새활용입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하나둘씩
'네가 그럼 그렇지 틀릴 줄 알았다 이 아줌마야' ...라는 표정으로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힝.
우리 모두 설명에 맞게 집중해서 만들었다. 크리스마스벨이 마무리가 되어갈 때쯤 메리크리스마스라 적힌 레터링이 필요했고 그 재료는 강사테이블에 올려져 있었다. 색상이 금색 은색 두 가지로 누가 봐도 금색이 예뻤다. 하지만 참여자들 수와 비교해 보면 금색이 적었다. 강사가 앞에 나가서 하고 싶은 색을 선택하고 골라오라고 했다. 나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호다다다닥 뛰어나가 1등으로 금색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승리자의 마음으로 앉아서 다음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린이들은 나와는 달리 천천히 일렬로 줄을 선다음 '네가 먼저 골라' 서로 양보해 주며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참 부끄러운 어른이야.
금색은 이내 동이 났고 금색을 갖고 싶어 하던 어린이들이 금색으로 꾸미고 싶다고 찡찡거렸다.
나는 고민했다. 어른답게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들에게 양보하는 참된 어른이 될 것인가
아님 소신대로 금색의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도어벨을 만들 것인가.
나는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가.
어린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먼저인가. 나의 행복이 먼저인가.
제 결정은요.
브라보 마이 라이브. 아이 라이크 미, 아이 러브 미.
금색 안줘못줘. 주님 오늘 아이 한 명 울렸습니다. 지옥에 가겠습니다.
인생은 타이밍. 행복은 선착순.
어린이들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다. 얘들아 원하는 게 있다면 입만 가지고 말하지 말고 행동을 하렴. 이 세상은 가만히 있는 가마니에게는 잔혹한 곳이란다.
이렇게
못난 아줌마는 오늘도 자기애에 사로잡혀 그릇된 행동을 일삼습니다.
1시간이 걸친 작품활동이 끝나고 강사선생님은 우리들의 작품을 한 곳으로 모아 일종의 인증샷을 찍었다. 똑같은 재료로 똑같은 방식으로 만든 거라 사실 완성품이 샴쌍둥이 수준으로 똑같았지만 난 칭찬이 받고 싶었다. 강사선생님이 비록 나보다 어리지만, 원데이클래스 동기들이 나보다 최소 28년이나 어리지만, 내가 제일 잘했다는 칭찬을 듣고 싶었다.
대놓고 내 작품이 제일잘보이는 곳으로 위치를 바꿨다.
어서 날 칭찬해 줘요. 내 작품을 번쩍 들어 제일 잘했다고 초등학생들에게 선포해 주시오.
선생님 사랑이 고픈 곧 마흔 살 어린이는 이렇게 또 어린 시절 못 받은 관심을 구걸합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한 여자아이가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엄마에게 뛰어가더니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더니 자기들끼리 숙덕 거리는 것 같았다. 모르긴 모르지만 내가 예상하는 모녀의 대화는 이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