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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Dec 26. 2022

잉여인간의 분주한 백수 생활

02


퇴사를 해도 기상 시간은 변함없다. 

늦은 시간까지 푹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서 할 일없이 이불 안에서 빈둥거리며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일할 때 소원이었는데 막상 놀게 돼도 기상 패턴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쉴 줄 모른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쉬는 방법을 몰라서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 그 누구도, 그 어디서도 잘 쉬는 법을 알려준 적이 없다. 


열심히 살며 돈 많이 벌고 회사생활 사회생활 잘하는 법에 대해서만 떠들어대지 정작 혼자서 잘 쉬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그래서 난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대학 졸업 후부터 한번 도 아무것도 안 해 본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늘 바쁘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해서 일부러 더 치열하고 바쁘게 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막상 24시간, 365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시간과 자유를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야 하는지 모르겠다. 무엇을 ‘잘’하면서 ‘잘’ 쉬어야지 오늘 하루 ‘잘’ 보낼지가 고민스럽다. 


이놈의 ‘잘’ 병이 또 도졌다. 

아무도 관여하지 않는 나만의 삶인데 나는 그냥 ‘잘’ 보내고 싶다.



바쁜 삶이 당연한 듯 살아오다 보니 한가한 시간이 불안하다. 뭐라도 해야 할 것처럼 의미 없는 바지런함이 6평 남짓 좁은 나의 공간을 채운다. 핸드폰 없이 먼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하루 종일 불안한 기분으로 이것저것 손대본다. 괜스레 책상에 앉아 사놓고 읽지도 않았던 먼지 쌓인 책들을 꺼내 손가락으로 파도타기 하듯 스르륵 페이지만 넘겨보다 아차하고 급하게 노선을 바꿔 영어문제집을 꺼내본다. 올해는 자기 계발에 힘써야지 하며 차곡차곡 트로피처럼 모아뒀던 영어문제집을 뒤적거려 보다 어느 놈부터 끝내줄까 고민하던 찰나에 책꽂이에 꽂아둔 2월까지 열심히 썼던 다이어리에 눈이 간다. 그래 그때는 이렇게 열심히 살았지 하면서 다이어리를 쓰며 정리했던 그날그날의 감정을 주마등처럼 되새김질해 본다. '역시 퇴사하길 잘했어' 다시 한번 스스로의 결정을 옳은 선택이라 안도감을 잔뜩 심어둔 뒤 따뜻한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앞으로의 인생계획을 짜야지 하면서 따뜻한 물을 올린다. 물이 끓을 동안 조용한 공백을 메울 음악을 검색하기 위해 검색의 파도에 올라타 이것저것 누르며 알고리즘에 정신이 팔리다 보니 아뿔싸 팔팔 끓었던 물은 다시 차갑게 식어버렸다 마치 내 열정처럼.


이러면 안 되지 하며 시계를 보니 벌써 3시가 되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 데 시간이 반나절이나 흘렀다니 다시 각성을 하기 위해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부자들을 꼭 하는 하루 루틴을 검색하여 집중하며 듣는다. 몇십 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십분 공감하고는 나도 내일부터 이때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겠노라며 데일리 리포트를 쓰기로 다짐한다. 왠지 첫 시작은 예쁜 노트에 하고 싶어 책장을 뒤적거렸으나 죄다 앞 몇 장 쓰다만 노트들 뿐이다. 나의 새 인생을 이 딴 노트에 적을 순 없지 문구점에서 감성이 흠뻑 젖어있는 예쁜 노트를 고르고 골라 구매한 뒤 다시 책상에 앉는다. 부자로 직행할 수 있는 신비로운 길이 있는 것처럼 기대감에 부풀어 노트의 첫 페이지에 글을 썼다.


2022년 … 나의 글씨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왜 악필인 건가. 예쁜 노트 위에 새 삶이라는 위대한 첫발을 내딜려는 찰나에 나의 악필이 발목을 잡다니 빈 노트를 꺼내 갑자기 글씨연습을 한다. 펜을 종류별로 꺼내서 여러 문장을 적어보지만 예쁜 손글씨 쓰기 독학은 무리다. 다시 컴퓨터를 켜서 글씨 잘 쓰는 법을 검색하곤 20개 정도 영상을 마스터 한 뒤 시계를 보니 어느덧 8시, 평소에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집에서 놀 때는 나를 추격하듯 빨리 따라잡는다. 오늘 하루 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피곤하니 푹 잔 다음 내일부터 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해야겠다 다짐하고 침대에 누워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부자들의 시간관리법, 성공하기 위한 하루계획 등을 검색하여 플레이 리스트에 차곡차곡 담아 자장가 마냥 재생시킨 뒤 오늘은 연습에 불과한 날이라며 내일부터 아니 앞으로는 위대한 하루하루가 펼쳐질 거라 결의에 찬 마음으로 잠이 든다.




그리고 마법처럼

오늘과 똑같은

분주하지만 

한 게 아무것도 없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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