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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7시간전

엄마도 할머니가 된 건 처음이라 그래

오빠가 복직 전, 소중한 조카를 데리고 고향에 내려왔다. 올케는 직장맘이라 출근하고 오빠와 조카만 휴일을 보내려 왔다. 매일 보고 싶었던 조카와 드디어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집안 곳곳을 정리하고, 조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웠다. 이번 기회에 일주일 동안 조카와 더욱 돈독한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돌잔치 때 보고 2개월 만에 보는 건데, 매일매일 봐도 또 보고 싶은 내 하나뿐인 조카. 작디작은 인간에게 벌써부터 심쿵당해 버렸다. 나중에 내가 애 낳을 일 없으면 조카를 데려다 키우고 싶을 정도로 조카가 너무 사랑스럽다. 친척들 말로는 어릴 때 나의 모습과 똑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좋고 더 예쁘다. 오빠 자식이지만 내 자식이라 생각하고 다 주고 싶고 다 해주고 싶은 그런 마음을 알랑가 몰라.


하지만 하루에 몇 차례 하던 영상통화 속 사랑스러운 조카와 함께 생활하는 건 천지차이였다. 너무 힘들었다. 14개월 된 아기가 무슨 직장인처럼 매일 아침 7시 50분에 칼같이 일어나, 낮잠 시간인 12시까지 끊임없이 놀아달라고 조르는 것을 보며, 모든 엄마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쪼꼬만 한 인간이 지치지 않는다. 처음에는 낯을 많이 가려서 울기도 했지만, 3일이 지나자 고향집에 적응했는지 더 이상 울지 않고 잘 따라주었다. 하지만 그 대신 내가 병이 났다. 스트레스성 위염으로 가슴이 답답하고 쓰라렸다. 귀여운 조카를 보느라 안구가 즐거운 대신, 스트레스로 위가 찢어지는 고통을 얻었다. 나는 체력적으로 육아가 안 맞나 보다. 절대 안정을 취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부득이하게 조카를 엄마에게 맡기고 방에 누워 쉴 수밖에 없었다.


우리 남매를 키울 때는 어렵지 않았다고 하시던 엄마가 손주를 돌보면서는 어려워하셨다. 손주가 너무 작고 여려서 조심스럽고,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몰라 걱정이 많으셨다. 예전처럼 쉽게 안아주거나 업어주기도 체력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14개월 아기와 친해지는 방법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라 하셨다. 아기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함께 손뼉을 치면 좋아한다는 정보를 얻어 엄마께 동요를 불러주라고 말씀드렸다. 평소 노래를 잘 안 부르는 음치인 엄마는 동요도 못 부를까? 어떤 동요를 불러줄까?


고심 끝에 결정 내린 할머니표 동요는,


아침바람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엽서 한 장 써붙여서

구리구리 멍텅구리 가위바위보!


그것도

무한반복


맞는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권의 책을 읽은 사람보다 한 권의 책만 계속 읽은 사람이 무섭다는 말처럼, 한 동요만 불러대는 엄마는 정말 무섭다.

신난다, 강제 동요놀이

손을 빼버린다면, 손녀라도 가만두지 않겠다.

아침바람 강제 연행.


사실 저 가사가 맞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하루죙일 저 노래만 불러대서 그냥 저 대로 외워버렸다.

조카 밥을 먹일 때, 조카 기저귀 갈 때, 조카가 찡찡거릴 때, 조카가 그냥... 가만히 혼자 앉아 잘 놀고 있을 때, 엄마는 저 노래를 염불 외우듯 계속 불러댔다.


얼마나 불러댔으면 안방에 있던 아빠가 나와서 아는 노래가 그것밖에 없냐고 정말, 진심으로 짜증을 냈다. 나도 엄마가 '아침바-람' 소리만 내도 위장에 불이 붙었다가 동요가 끝나면 다시 위장에 붙은 불이 꺼졌다가를 반복할 정도로 동요는 나의 위염에 상당히 거슬렸다. '듣기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이라는 말이 있듯이 엄마의 단일화된 동요 울부짖음을 하루에 50번 이상 듣다 보니... 어서 조카가 집에 가버렸으면 하는 바람이 생겨버렸다.


조카가 온 지 6일째, 그러니까 엄마가 같은 동요를 숨 쉬듯 부른 지 3일째가 되던 날, 아빠와 나 그리고 오빠는 엄마에게 제발 제발 다른 노래를 부르라고, 차라리 애국가나 학교종이 땡땡땡을 불러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엄마는 오직 저 노래에만 손동작을 가미할 수 있다며, '울고 가는 저 기러기'에서 감정을 이입해 우는 척을 할 수 있고 '엽서 한 장 써붙여서'에서 손가락으로 엽서모양을 그리는 활동적인 동작을 할 수 있고, '구리구리 멍텅구리'에서 양손을 앙칼지게 굴리며 아이의 흥미유발을 할 수 있다며 참 좋은 동요라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조카는, 엄마가 그 동요를 불러줄 때마다 웃어준다. 그게 문제다. 엄마는 이유 없는 손녀의 웃음에 신이 나서 계속 부르는 것 같다. 참고로 우리 조카는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에도 웃는 그런.... 아무 생각 없는 14개월짜리 아기일 뿐이다.


조카가 졸려서 칭얼대니 엄마는 또,

슬쩍 아침바람 가스라이팅 시도.


손녀를 강제로 앉혀놓고 '아침바람' 동요를 부르려고 혓바닥에 시동을 거는 엄마가 보였다. 머리가 아파서 죽겠으니 제발 제발 다른 노래 좀 불러달라고 진심으로 부탁했다. 위염 때문에 얼굴이 반쪽이 된 나를 보며 엄마는 손녀도 손녀지만, 내 새끼도 지켜야지, 하면서 다른 노래를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곰곰이 생각하더니, 율동을 가미할 수 있고 음의 높낮이가 확실한, 그러면서 적절하게 감정을 싦을수 있는 신나는 동요가 이제야 생각났다며 엄청 좋아하셨다.


곧, 조용한 집안에 엄마의 두 번째 동요가 울러 퍼졌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사라져 간 전우야 잘 자라


...............?


어느 부분에서 율동을 가미할 수 있는 걸까.

도대체 어느 부분이 신나는 걸까.


엄마, 손녀가 울잖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나중에 조카가 커서,

나에게


고모, 전우의 시체가 뭐야.

피에 맺힌 적군이 뭐야


....라고 물을걸 생각하니 벌써 아찔하다.




어서 조카가 집에 갔으면 좋겠다.








* 사진출처 무한도전 나는 사나이 군대 편 박명수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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