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동안 고향에 잠시 내려가 8일 머무는 시간 제외하면 이 집에서의 생활은 14일 남았지만 아쉬움보다 이 많은 짐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더 걱정이다.
나는 맥시멀리스트이다.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항상하는 소리가 '너네 집에는 없는 게 없네' 일 정도니까. 뭐든 사모으는 걸 좋아해서 쓰던 안 쓰던 쟁겨놓아야 마음이 편하다. 당장 필요해서 산 것보다 언젠가는 필요할 것 같아서 홧김에 사둔 게 대부분이고, 또 막상 필요할 때 집에 없으면 화가 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대로 사놔야 안심이 된다. 그래서 한두 개 충동적으로 사 모으다 보니 새것이지만 헌것이 된 물건들이 많아져버렸다. 버리자니 아깝고 다시 들고 이사 나가자니 이게 과연 쓰일까 싶은 의문이 들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안 쓰는 물건을 주변사람들에게 나눠줄까 싶기도 했는데 왜 그런 마음들 다 있지 않는가. 나 하기는 싫어도 남 주긴 아까운. 그게 지금 나의 심보다.
어쨌거나 소비할 수 있는 건 다 소비하고 짐 하나라도 줄여야 하는데 가장 시급 한 건 음식이다. 음식은 애매하게 다시 들고 갈 수 없으니 빨리 처리해야 한다. 14일 만에 집에 있는 모든 음식을 소비하고 갈 계획을 세웠다. 어차피 지금 벌이가 없으니 외식비 아낀다치고 14일, 3끼 전부를 만들어 먹어보기로 하고 식단표를 잘 짠다면 버리는 거 없이 맛있게 돈절약하며 42끼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명하고 알뜰한 나 자신 칭찬해 하지만 구차하고 구질구질한 느낌은 기분 탓이겠지?
일단 뭐가 있는지 알아야 메뉴를 정할 수 있으니 싱크대 찬장에 있는 물건부터 살펴봤는데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없는 소스가 없다. 자취생 치고 이렇게 소스가 많은 집은 나뿐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한참 이탈리아 요리를 배울 때, 삘 꽂혀서 샀던 소스만 18가지이다. 과거의 나년이 원망스럽다 꿈이 요리왕 비룡도 아니면서 요리선생님이 홈쇼핑처럼 홍보하는 건 홀린 듯이 다 사버렸다. 이뿐 아니라 다이어트할 때 먹었던 6종 샐러드드레싱부터 시작해 (2주 만에 대실패) 뭘 대단히 잘해 먹겠다고 양념갈비 닭갈비 소갈비 오리불고기 돼지불고기 등 양념소스와 토마토 로제 크림 알리오올리오 바질 스파게티 소스들 그리고 떡볶이 쫄면 짜장 마라 소스까지 있다. 소스에 밥만 비벼먹어도 42끼는 거뜬히 해결할 수 있겠다.
소스에서 넘어가 라면 창고를 열어보니 문을 여는 동시에 실성한 것처럼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나는 진작 몰랐는가. 왜 나는 우리 집에 미니 세븐일레븐 편의점이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을까.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라면들도 한가득이고 백반기행 식객 허영만도 아니면서 이 라면 저 라면 다 맛보겠다고 포켓몬 카드 모으듯 사 모았다. 요즘은 라면이 낱개로 팔지 않아 울며 겨자 먹기로 한 팩씩 사다 보니 집에 뜯지도 않은 라면 5팩과 먹다 남은 낱개 라면들이 가득 쌓여있다. 라면만 계속 먹는다고 가정했을 때, 27끼 해결이요.
이쯤 되니 싱크대 밑 찬장 정리하는 게 두려워졌다. 난 보이는 곳만 깨끗하게 정리하고 보이지 않는 곳은 언젠가는 치우겠지의 마음으로 냅다 집어넣고 쌓아두는 성향인데 이게 오늘 결국 나를 좌절시켜 버렸다. 스파게티 걸신이 붙었는지 스파게티면만 6 봉지가 있고 국수 소면에 당면, 곤약면까지 있다. 미쳤네 미쳤어. 분명 쇼핑할 때 귀신에 씌었던 게 분명한 게야. 술도 안 마시면서 해장한답시고 북어채와 황태껍데기까지 샀다. 말린 미역, 말린 표고버섯, 말린 고사리, 현미누룽지, 각종 수프들, 핫케이크가루 와플가루 밀가루 부침가루 감자가루 녹차가루 초코가루 아로니아가루 찹쌀가루 콩가루... 찬장에 있는 재료들만 해도 최소 70끼 해결이요.
사실 냉장고와 냉동고는 열어보지도 못했다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확인하는 게 두렵고 무서워서.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떡국 떡, 모둠떡, 찹쌀떡, 어묵, 만두, 피자, 식빵, 모차렐라치즈, 파마산치즈, 크림치즈, 체다치즈, 리코타치즈, 견과류, 냉동고기, 냉동 블루베리 냉동딸기 냉동망고 냉동야채, 냉동볶음밥 등 내가 무작정 집어 처넣은 찰나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몇 십 끼 해결 쌉 가능. 그 외에 방구석 여기저기 쑤셔 넣은 과자며 초콜릿이며 마른안주며 내가 만든 쿠키며 한가득이다.
내가 왜 이렇게 생각 없이 사 모으기만 했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푼 듯싶다. 자꾸 뭔가를 사서 쌓아두는 크기만큼 내 스트레스의 크기가 컸다는 뜻이기도 하다. 흔히들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면 사용하지 않았을 비용을 두고 시발비용이라고 한다. 필요해서라기보다는 홧김에 충동구매 해버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어서 그런지 단어가 주는 어감도 강하다. 난 2월에 이 집으로 이사 온 뒤로 정말 많은 시발비용을 썼다 어쩐지 작년 1년 동안 8개월을 벌었는데 통장은 텅 비어있다 그래도 나름 위로를 해보자면 음주가무로 몽땅 공중분해 시킨 게 아니라 이렇게 집안 하아아아아안가득 채워놨으니 쓸데없는데 돈을 낭비하지는 않았다 생각한다. 다만 차라리 시발비용으로 물건이 아닌 주식을 샀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 텐데. 뭐 어쨌거나 과거의 충동적인 나 덕분에 현재와 미래의 내가 배부르게 잘 먹을 수 있는 건 불행 중 다행이다.
소스로 42끼 + 라면 27끼 + 이것저것 70끼 + 냉동식품 몇 십 끼를 다 더 하면.... 137202654끼 해결 가능이요.
14일 만에 모든 음식을 다 먹고 이사 나가려면 하루 980끼씩 만들어 먹으면 되겠다 헤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