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24일 남았다 이 집에 사는 것도.
여기 이사 들어온 뒤로 어쩌면 모든 게 다 틀어져 버렸다. 직장 근처 원룸 12층에 살고 있었는데 집주인이 급하게 집을 팔게 되었고 넘겨받은 사람이 거주하길 원한다고 해서 한 달 안에 나가달라고 했다. 언쟁하기도 귀찮고 어차피 여기는 널린 게 방이라 알겠다 하고 급하게 방을 알아보게 되었다.
근무시간이 길었던 기간이라 여러 방을 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그냥 앞이 탁 트인 남향이면 된다고 미리 부동산에 말해놨다. 마침 내가 원하는 날짜에 이사 나가는 방이 있다 해서 출근 전 잠시 들리기로 했다. 6층 복도 제일 끝집인데 할머님이 첫 입주부터 지금까지 오래 살고 계신다고 했다. 2시쯤 방문하니 창가로 햇빛이 나를 구원하듯 방안에 내리쬐었고 곳곳에 걸려있는 할머니 가족사진들과 할머니의 오래된 TV 소리가 왠지 정겹게 들렸다. 그때는 몰랐다. 이 모든 게 함정이었다는 것을.
예전방들을 구할 때 대부분은 비어있던 상태라 거주자 눈치 볼 필요 없이 구석구석 볼 수 있었는데 6층집은 내가 움직일 때마다 할머니가 다리를 절뚝절뚝 거리며 내 뒤를 따라다니면서 친절히 불편하게 신경 쓰이게 설명해 주셨다. 그래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생각하고 다른 방 보기도 귀찮아 바로 계약했다.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내가 계약한 게 지옥행 열차표라는 것을.
설레는 마음으로 처음 6층집 문을 딱 열었을 때 난 느꼈다. 아 나 ㅈ됐다. 할머니 짐이 가득 차 있을 때는 몰랐는데 짐이 싹 다 빠지니 그때부터 단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보이는 게 아니라 단점들이 덕지덕지 이곳저곳에서 자기를 봐달라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전 곰팡입니다 앞으로 당신의 공기를 책임질 역할을 맡았습니다.
반갑습니다 전 덜커덕 거리는 문입니다 저를 아주 세게 닫지 않으면 도둑님이 오셔서 다 털어갈 겁니다.
어서 오세요 저는 전등입니다 환영의 인사로 클럽 조명처럼 깜빡깜빡거리게 전등 1개를 뿌셔놨습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가스레인지입니다 요즘 화재가 무섭다고 해서 미리 1개는 고장 내놨습니다 화재는 이제 걱정 마세요.
어서 와요 저는 방바닥입니다 시공할 때부터 싸구려를 사용해서 당신이 걸을 때마다 바닥에 찍힘 자국이 생기니, 돈 물어내고 싶지 않으면 발가락으로 걸어 다니거나 기어 다니세요.
아 쓰면서도 열받네 다시 한번 집 계약서를 살펴보니 그 어디에도 주소가 지옥이라고 적혀있지 않았다.
할머니가 이렇게 까지 험하게 쓰고 가셨을 줄이야. 본인이 원해서 나가는 게 아니라 집주인이 쫓아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이미 잔금까지 다 치른 터라 물릴 수도 없었다. 내가 속다니. 천하의 내가 속아버리다니. 그래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액땜이라 생각하자 싶었지만 그건 액땜이 아니라 신호탄이었다 앞으로 나에게 펼쳐질 지옥에 대한.
짐을 옮기기 전에 청소를 시작했는데 일단 200장가량의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집주인이 나에게 덮어씌울 수 있으니. 뭐 곰팡이나 순순히 닫히지 않는 문에 대해서는 이미 집주인은 알고 있었고 바꿔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 집주인은 시골에 사시는 60대 후반의 아줌마로 성격은 투박하지만 좋으신 분이다) 제대로 안 알아보고 덜컥 성급하게 계약한 내가 죄인이니 누굴 원망하리오. 할머니가 방안 가득 액자를 걸어둔 이유가 곰팡이를 가리기 위해서였구나 젠장 난 또 가족을 그리워하는 쓸쓸한 할머니라 생각해서 마음을 썼는데. 도로 내놔 내 동정심.
그리고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냉장고다. 때려 뽀수고 싶은 빌어먹을 냉장고.
그때 할머니가 TV를 크게 들어놓은 이유가 이거였구나. 할머니가 귀가 어두워 TV를 크게 틀어놨다고 생각해 딱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게 아니라 냉장고 소음을 덮기 위해서였다. 뱉어내 내 측은지심. 노래를 부를 때도 호흡을 단전에서 끌어올리면 크고 우렁찬 목소리가 나는 것처럼 냉장고 밑바닥에서 부터 끌어올리듯 깊게 울러 퍼지는 냉장고 소음은 감히 글로 표현이 안된다. 지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냉장고를 진동모드를 해둔 것처럼 15분 간격으로 10분씩 소음이 났다. 지이이이이ㅣㅣㅣ이잉. 이건 못 참아. 바로 동영상 촬영을 여러 차례 해서 집주인에게 보냈다. 지이이잉이이이이이이ㅣㅣㅣㅇ 하지만 집주인은 오히려 자기 집 냉장고 소리가 더 크다며 자기 집 냉장고 동영상으로 되받아치셨다. 뭐지 이 아줌마.
냉장고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물어봤더니 전문기사가 와서 직접 봐야지만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시며 A/S 기사를 예약하라 했다. 물론 출장비가 드니까 집주인이 허락이 필요했고 매일 몇 차례 냉장고 소음 동영상을 보내니 (나도 정상아냐) 집주인이 지쳤는지 기사를 대신 예약하셨고 기사 방문과 동시에 본인도 오셨다.
문제는 기사가 냉장고를 살펴보고 소음도 들어봤지만 이건 냉장고 고장이 아니라 노후 때문에 발생되는 거라 교체를 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했다. 냉장고 그 자체의 쓰임에는 문제가 없어 사용은 가능하다 하니 그 설명을 들으시곤 집주인은 그봐 이년아 고장 난 게 아니잖아 그냥 계약대로 살거라의 눈빛으로 나를 한심한 듯 쳐다보시곤 "사는 동안 편~안하게 내 집이다 생각하고 지내세용 호호" 하시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기사와 유유히 떠났다. 혹시 두 분이 친척인가 하는 2번째 합리적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냉장고 소음이 낮에는 바깥소리에 묻혀 나지막이 들리다가 고요한 밤이 되면 바리깡으로 내 구랫나루를 미는 것처럼 오히려 귓가에 크게 들렸다. 벽에 핀 곰팡이도, 한 번에 절대 닫히지 않는 문도, 옆집 음치 남자가 매일 부르는 성시경 노래도 냉장고 소음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에겐 2가지 옵션이 있었다. 그냥 참고 살거나 거금의 돈을 써서 다른 집을 구하는 거나. 나는 불쌍하게 첫 번째를 선택했다. 쌩돈을 쓰는 건 억울하고 다시 알아보는 것도 귀찮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다이소에 파는 주황색 귀마개였다. 신기하게 그 쪼그만 게 나름 큰 역할을 했고 점점 세게 귓구멍에 밀어 넣을수록 냉장고 소리는 들리지 않아 밤에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덕에 나는 몇 개월 동안 외이도염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의사가 귀마개 하지 말라 제발 자기 말 좀 들으라고 야단을 칠 때쯤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돈주고 혼나는건 싫어.
나를 미련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도 나름 이 집에서 이사를 못 나간 이유가 있다. 2월에 떠밀리듯 급하게 이사를 했고 이 집이 씨발점이 되었는지 (시발점이 맞는 단어인 거 저도 압니다) 3월부터 직장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나의 첫 번째 글 '퇴사해버렸지 뭐야' 참고바람) 생각지도 않게 4월에 퇴사를 결심했기에 돈을 모아야만 했다. 이사 한 번이면 돈이 몇십이 들고 중간에 계약해지를 하면 손해를 많이 보는 걸 알고 있기에 천 원짜리 귀마개에 의지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냉장고는 돌아간다 하지만 더 이상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퇴사했기 때문이다. 직장때려친 그 순간부터 모든 게 다 아름다워 보이고 모든 게 노래처럼 싱그럽게 들리기 때문이다 는 오버고, 겨울이면 냉장고 주변 온도가 낮아서 냉장고쿨러가 덜 작동하여 소음이 덜하다고 A/S 기사 아저씨가 알려줬다. 이 과학적 사실을 알아냈기에 집 안 공기을 굉장히 차게 유지하기 위해 나는 보일러를 일체 돌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드디어 외이도염 염증약을 끊게 되었다!
다만 대신 감기약을 2개월째 달고 살고 있다.
#감기약#이빈후과VIP#여기가지옥인가#지옥행열차
#분노#절망#좌절#슬픔#고뇌#번뇌#할머니저한테왜그러셨어요
* 집 구할 때 꼭 체크해야 할 사항 알려드립니다 피와 살이 되니 꼭 메모하세요.
냉장고 전원 켜서 확인하기, 낮밤 두 번 방문해서 주변 소음 및 바깥 빛공해 확인하기, 수압 확인하기, 문 잘 닫히는지 확인하기, 4면 벽지/곰팡이 여부 확인하기, 옆집 사람 음치여부 확인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