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잘 보는 편은 아니지만 꼭 건강프로그램은 다시 보기로 하루 날 잡아서 챙겨본다. 건강제품을 대놓고 광고하는 상술임을 알지만 의사가 나와 이런 몸뚱이를 가진 사람은 이 제품을 먹지 않으면 곧 죽습니다 식의 협박을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장바구니에 온갖 비타민을 쓸어 담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건강프로그램은 영양제 자체보다는 식품을 주로 홍보하는데 나와 똑같은 성격을 가진 엄마도 의사가 방송에서 좋다고 흔들어 대는 건 무조건 사서 밥상에 올린다. 미역물로 지은 보리밥부터 시작해 단감이 들어간 김치, 당귀식초, 와일드망고, 아로니아가루 등 밥상의 색이 화려해지고 음식에서 싱기방기한 맛이 나면 엄마가 뭔가를 주워듣고 왔다는 것이다.
천성이 게으르고 움직이는걸 극도로 싫어해서 운동이랍시고 숨쉬기 운동밖에 하진 않지만 매년 새해 소원이 건강하고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건 20년째 같다. 나의 DNA에는 고혈압과 높은 콜레스테롤이 내재되어 있지만, 건강하고 싱거운 초록음식을 먹고 매일 운동을 할 바에 비타민 몇십 알을 틀어먹는 쪽을 택하고 싶다.
요즘은 의사나 약사가 각 증상에 따른 약 소개를 해주는 영상을 쉽게 접할 수 있으니 굳이 운동을 하지 않고도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오장육부 이외에 혈관, 뼈, 근육, 머리카락 등등 각 신체 기관마다 필요로 하는 영양제의 성분이 다르니 챙겨 먹어야 할 약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미리 저축하듯 차곡차곡 몸 안에 약을 쌓아둬야 나이 들어서 덜 아프지 않을까 싶은 단순한 생각에 비타민을 섭취하기 시작한 게 벌써 11년이 되었다.
이때까지 약값으로 쓴 돈도 천만 원 넘지 않을까 싶다. 사실 효과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딱히 약이 몸에 쫙쫙 달라붙어 민들레 홀씨마냥 몸이 가뿐한 느낌은 없지만 약을 이렇게나 많이 챙겨 먹고 있으니 그나마 이렇게라도 살고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약을 끊을 수가 없다.
아침 눈떠서 공복에 섭취하는 유산균 2종과 밀크씨슬로 시작해, 아침식사 후, 점심 식사 전후, 저녁식사 후, 잠들기 전 복용해야 할 개수도 많고 종류도 다양하다. 종합비타민 한 알이면 된다고 하지만 그러기에 이놈도 챙겨야 되고 저놈도 챙겨야 돼서 종합비타민 대신 나는 일일이 영어 알파벳 붙은 비타민은 다 복용한다 거기에 오메가 3, 프로폴리스는 물론이거니와 눈에 좋다는 루테인, 피부에 좋다는 펜토텐산과 코큐텐, 방광염 예방에 좋다는 크렌베리, 수면에 도움을 준다는 멜라토닌과 레몬밤, 콜라겐, 마그네슘, 지방분해에 좋다는 녹차추출물, 위염예방에 좋다는 카베진과 폴리페놀 등등 종류만 해도 20가지가 넘는다. ** 삐용삐용 주의하세요 과도한 영양제 섭취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약사와 상의하세요.
지금 그나마 양보해서 20가지 정도로 줄였다. 그전에는 흰가운 입은 사람이 방송에서 좋다고 하는 건 닥치는 대로 다 사서 먹어봤다. 한 영양제를 오래 복용하면 좋지 않다고 해서 몇 개월씩 끊었다가 다시 복용하는 패턴을 반복하니 딱히 몸에 이상반응은 없다. 그렇다고 딱히 건강하지도 않다. 뭐든 장기 섭취는 간에 해롭다고 하여 잠시 모든 영양제를 중단해볼까 했지만 오히려 간에 좋은 약을 추가로 복용할 정도로 영양제를 버릴 수가 없었다.
영양제맹신에서 오는 플라시보 효과도 어느 정도 있다고 본다. 매 시간마다 약을 한 움큼 틀어 먹는 걸 보고 직장동료가 나는 별사탕을 약이라 속이고먹여도 몸이 좋아진다고 믿을정도로 심각한 믿음에서 오는 거짓 반응이라고 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순 없다. 사실 운동 부족에서 오는 몸에 대한 죄책감을 영양제 과다 복용으로 덮으려는 이유도 한몫하기 때문이다.
100세 시대라 했다. 정말 그렇다. 나의 증조할머니는 103세까지 사셨고, 작년엔 친할머니도 100세까지 사시고 평온하게 돌아가셨다. 종합해보면 나는 장수유전자가 태어날 때부터 세팅이 되어있다는 뜻이고 오래 살 거라는 건 이미 과학으로 증명이 된 셈이다. 그래서 어차피 혼자 늙어갈 처지라 쓸쓸히 방에 앉아 외로움을 달래고자 TV나 보려면 눈이 좋아야 하고, 허리가 아파 휠체어라도 타게 된다면 셀프로 쭉쭉 밀수 있게 팔이라도 튼튼해야 한다. 또 이뿐 이겠는가. 반찬이 없어 생쌀을 씹어먹어야 할 상황이 온다면 위아래 이라도 온전해야 하며, 안 그래도 늙어 볼품없는 외모를 가릴 수 있는 머리카락이 몇 가닥이라도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골룸이 되고 싶지 않다구)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내가 20가지의 영양제를 꾸준히 챙겨 먹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재테크고 노후준비 아니겠는가.
난 이미 모든 만인의 염원인 '무병장수'에서 '장수'는 정해졌으니 '무병'만 이루면 된다.
100세라는 도착점에 두 발로 걸어가느냐 기어가느냐 혹은 들것에 실려가느냐는 오늘 내가 복용하는 비타민에 달렸다. 20가지 영양제 용사들이여, 오늘도 나에게 힘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