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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Jan 11. 2023

두 노처녀의 극강의 밸런스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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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친구인 H와 함께 있으면 정말 즐겁다. 언제나 마음만은 처음 우리가 만났던 고등학생 시절의 소녀처럼 별 거 아닌 일에 즐겁고 웃음이 헤퍼진다. H가 직장일로 인해 나와 함께 1년을 동거한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즐거웠던 1년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낮엔 각자의 삶에서 열심히 일하고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같은 천장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왜 이 게임을 시작했는지,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화의 빈 공간만 생기면 어김없이 ‘맛대맛’ 게임을 하곤 했다. 여기서 우리가 하는 맛대맛 게임은 밸런스 게임으로 알려져 있는 양자택일 형식의 게임으로 그냥 뜬금없이 2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되는 유치한 게임의 일종이다. 하지만 이게 뭐라고 나와 H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대답에 꽤나 신중했다. 


처음에는 아주 간단한 질문으로 시작했다. 

예를 들어 ‘강동원 vs 변요한’ 그냥 자기 취향에 맞는 선택을 하면 하면 되었고 점점 갈수록 극강의 난이도가 되어 버렸다. ‘250cm 거구 강동원 vs 130cm 요정 변요한’에서 출발하여 ‘100평짜리 집에서 앉아서 자기 vs 1평짜리 집에서 쪼그려 자기’를 거쳐 ‘월급 3000만원 받고 매일 사장 똥꼬 핥기 vs 월급 100만원 받고 사장이 내 똥꼬 핥아주기’로 ‘카레 맛 똥 vs 똥 맛 카레’ 급의 괴로운 선택을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굳이 대답을 안 해도 되는데 우리는 마치 누가 뒤통수에 총을 겨누고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정해진 시간 안에 대답해야 하는 강박관념에 상당히 괴로워하면서 선택을 하곤 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린 곧 마흔이다. 


상대방이 대답을 선뜻할 수 없는 정도의 극한의 문제를 내야 출제자도 즐겁다. 사실 나는 이 게임이 너무 재미있어 직장 동료에게 몇 번 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그들은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잊지 못해 그 눈빛.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처럼 같이 맞장구를 쳐줘야 신나서 할 텐데 한쪽이 일방적으로 혐오감을 표출해 버리니 재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맛대맛 게임은 H 하고만 하기로 다짐했다. 이때까지 1년 동안 H와 내가 한 맛대맛 게임 중에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던 주옥같은 극강의 예를 몇 가지 적어본다.


더 나은 버릇은? 말할 때마다 트림 vs 걸을 때마다 방귀 

목말라서 죽기 직전이라면? 축구선수가 일주일 신은 양말 빤 물 vs 비둘기가 목욕하고 간 물   

더 나은 돈벌이는? 10억 받고 라이브방송에서 똥 누기(단 카메라가 엉덩이 클로즈업) vs 1만 원 받고 집에서 똥 누기(카메라가 생생한 풀샷 찍음)

살인 사건이 났다면? 5억 주고 '그것이 알고 싶다' 팀 부르기 vs 5만 원 주고 '수사반장' 최불암 부르기

더 나은 선택은? 매일 한 마리씩 바퀴벌레 섭취(단백질 냠냠) vs 바퀴벌레 백 마리랑 같이 동거하기

노래를 불러야 한다면? 나체에 KF94 마스크 쓴 채로 노인정에서 트로트 부르기(할머님들 죄송해요) vs 나체에 눈만 가린 채로 성당에서 캐럴 부르기(하느님 죄송해요)


어느 하나 정상적이지 않고 억지스럽지만 음주가무를 즐기지 못하는 노잼 듀오인 H와 나로서는 맛대맛만큼 허송세월을 보내기 좋은 게임은 없다. 상대방이 괴로워하는 걸 보는 재미라 할까 항상 어떤 병맛으로 친구를 괴롭힐까 고민하는 시간마저 즐거웠다. 상대방의 기발한 역대급 질문에 감탄하고 질문 수준에 질투한 적도 있으며 가끔씩은 희망 회로 가동을 위해 생각만 해도 행복한 망상 버전의 게임도 하곤 했다. 


당신의 배우자는? 천억 대의 재산을 가진 차가운 인기남 vs 평범하지만 나밖에 모르는 따뜻한 존잘남

다시 태어난다면? 아무리 먹어도 장윤주 몸매 vs 안 씻어도 김태희 외모 

좋은 거? 크지만 단거리용 vs 작지만 장거리용 ** 판사님 전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눈떠보니? 아빠가 백종원 엄마가 오은영 vs 아들이 BTS

소개팅 상대로? 싹수없는 손석구 vs 머리 없는 원빈(머머리 죄송해요)


매일밤 옆집 사람이 대화를 들을까 봐 조마조마하면서도 끊을 수 없는 마약 같은 게임이었다. 파도 파도 금이 계속 나오는 채굴장처럼 우리는 마르지 않는 서로의 아이디어에 기립박수를 보냈으며 가끔씩은 나잇값을 하자고 이제 이런 저질스럽고 부끄러운 행동을 멈추자고 말해놓고는 그 다음날 약속이나 한 듯 또다시 세상의 이런 일이 급의 맛게임을 이어갔다.  



2년이 지나 지금은 각자 따로 살고 있어 서로의 밤은 더 없이 고요하지만

가끔씩은 수다 떨던 지난 밤들이 그립다.

오랜만에 친구한테 문자를 했다.


초능력을 갖는다면? 
매일 황금알을 낳지만 똥꼬에 피 마를 날 없음 vs 다이아몬드 눈물을 흘리지만 마동석한테 1분씩 매일 처 맞아야 함



친구에게서 답장이 왔다.

우리 이제 그만할 때 되지 않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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