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학기 개강을 앞두고 요즘 정신이 없다. 2월은 전화 문의가 유난히 많은 달이라 하루 종일 수화기를 붙잡고 산다. 재원생 학부모의 전화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비재원생 학부모의 문의다. 내 말 한마디에 등록 여부가 갈리니, 목소리는 최대한 부드럽게, 태도는 최대한 공손하게 낮춘다. 이 시기만큼은 내 기분보다 남의 비위를 맞추는 게 일이 된다.
얼마 전, 예비 초등학생 아들을 둔 한 어머님에게서 문의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지긋해 연세가 꽤 있으신 듯했다. 학원 프로그램과 수강료를 물었고, 나의 상담이 마음에 드는지, 하원 셔틀버스 노선은 어떻게 되는지도 물어보셨다. 대화를 듣다 보니 우리 학원이 끝나면 아이가 바로 태권도 학원으로 이동해야 하는 일정인 듯했다. 요즘 맞벌이 가정이 많다 보니, 학원에서 다른 학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어머님도 우리 학원을 마치고 20분 안에 태권도 도장에 도착하는 스케줄을 염두에 두신 것 같았다.
처음엔 셔틀버스 정류장을 물어보셨지만, 지리를 잘 모르시는 듯했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내가 직접 위치를 파악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태권도 학원 이름을 여쭤봤다.
“어머님, 아이가 태권도 도장으로 하원하면 되는 걸까요?”
고객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최대한 공손하게 물었다.
“예예, 우리 애는 태권도 박사예요.”
…응?
뜬금없이 아이의 태권도 실력을 자랑하길래, 일단은 맞장구를 쳤다.
“아, 그렇군요~ 그래서 아이는 어디로 하원하면 될까요?”
다시 한 번,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다.
"우리 애는 동아대 태권도 박사 입니더ㅓㅓㅓ"
....뭐야. 어쩌라고?
그게 영어학원 하원하는거랑 무슨 상관이라는 거요.
앞선 뜨뜨미지근한 반응이 마음에 안 드셨는지, 어머님은 또다시 자녀의 태권도 실력을 자랑하셨다.
하지만 봄학기 모집이 더 중요하니, 나는 자세를 낮춰 아까와는 달리 밝게 맞장구쳤다.
"우와, 대.단.하.네.요. 아이가 태권도를 참 잘하나봐요. 호호"
잠시 3초 정도 침묵이 흐른 뒤, 어머님은 또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어.. 우리애는 동아대 태권도 박사니까, 하원할수 있죠?"
…참, 대단한 아들을 두셨다. 초지일관, 태권도 박사 과시 중이시네.
늬예늬예. 아들님이 동아대 태권도 박사라면, 라면 하나 끓일줄 아는 나는 5성급 호텔 미슐랭 셰프입니다요.
…라고 말할 수 없어서, 일단 “네, 가능합니다”라고 답했다.
어머님과는 대화의 결론이 날것 같지 않아, 곧바로 인터넷 지도를 켜고, 우리 학원 근처 태권도 학원을 전부 찾아봤다.
그리고 순간, 소름이 돋았다.
.....아,
아드님이 태권도 박사가 아니군요.
동아대 박사 태권도와 동아대 태권도 박사의
단어의 순서만 바뀌었을 뿐인데, 어감은 생각보다 크게 달라진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내공은...
나는 아직 한참 모자란가 보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