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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Jan 28. 2023

반짝이는 건 다 비싼 법이야 2 (Feat.데이트비용)

29

커피값을 내려고 정혁이가 주머니를 더듬거리더니 지갑을 놓고 왔다며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기 미안한데.. '

나는 남자가 돈을 다 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기에 그냥 내가 계산했다 그래봤자 만원 정도 되는 부담 안 되는 금액이었다. 민망해하던 정혁이에게 괜찮다며 우리 둘 다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 건데 남자라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비용을 전부 내는 건 상대방이나 나나 부담스러우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정혁이에게 잘 보이려고 한 말은 절대 아니고 내 신념이 그렇다. 하지만 그 말을 했으면 안 되는 거였다. 그 말 한마디가 정혁이에게는 자유를, 나에게는 큰 짐을 앉겨줄지 상상조차 못 했다.    


정혁이는 지갑을 들고 오겠다며 기숙사로 뛰어갔다 왔고 (역시 뛰는 것도 잘생겼어) 우리는 저녁식사를 하고 각자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번갈아 가면서 데이트 비용을 내며 우리는 꽁냥꽁냥 달달한 연애에 행복했다. 친구들은 정혁이를 이빨요괴라고 놀렸지만 어느 시점부터 정혁이의 왕덧니도 근사해 보였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자 정혁이가 돈이야기를 넌지시 나에게 흘렸다. 그는 전공책도 비싸고 어쩌고 저쩌고 해서 돈이 많이 든다며 부모님께 손 벌리기 미안해서 용돈을 아껴 써야겠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나 역시 부모님이 매달 용돈을 입금해주셨고 지출이 많은 달은 추가로 돈을 더 받았기에 금전적으로 부족한 편은 아니었지만 딱히 사치하지도 않았다. 굳이 저런 이야기를 나에게 왜 하나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자존심 상한 것도 무릅쓰고 여자친구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은 짠한 마음도 동시에 있었다.


하루는, 나는 밤샘 과제를 정혁이는 밤샘 시험공부를 하던 중 출출해서 24시간 맥도널드에 가자고 했다. 정혁이가 메뉴판을 쓱 보고서는 '나는 더블 불고기버거 세트' 말하고는 자리로 가서 앉는 거였다. 순간 뭐지 싶었는데 어찌 됐든 내가 맥도널드를 가자고 한 거니 계산은 내가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쪼잔하게 몇 천 원에 신경 쓰지 말자 싶어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둘이서 햄버거를 먹으며 새벽데이트를 즐겼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데이트 비용을 계산을 하는 게 당연한게 되었다. 비율로 따지면 10번 중 8번은 내가 냈다고 해야 하나. 계산할 때마다 그냥 나를 빤히 쳐다보거나 나에게 슬쩍 계산서를 건넸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한 적은 없지만 데이트 뒤 항상 내 지갑은 텅텅 비어있었고 행복한데 행복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정혁이 앞에서 티 내진 않았지만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늘. 

이런 모습이었다. 너덜너덜. 터벅터벅.빈털털털터얼r


그리고 정혁이는 말버릇처럼 '넌 돈이 많으니까'를 문장마다 꼭 뒤에 붙였고 내가 쇼핑을 한 날이나 친구들과 놀러 간 날이면 매번 철없는 아이취급을 하며 돈돈 거렸다. 이것이 가스라이팅인가. 니돈 내 거니까 너 쓰지 말고 나한테만 써 내 돈은 내 돈, 니돈도 내 돈 이런 느낌. 아마 자격지심에 그렇게 일부러 밉게 말한 거라 나는 이해했다. 그러다가 나도 본격적인 전공 수업에 들어가면서 재료비가 어마어마하게 들다 보니 예전과는 달리 여유가 없어졌다. 그렇다고 나도 정혁이처럼 남자친구한테 돈 없다고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 특별히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데이트 비용이 신경 쓰이기 시작하는 시점에야구게임장으로 데이트를 갔는데 정혁이가 공을 더 많이 치는 사람이 저녁밥을 쏘기로 했다(본인이 이길 거라는 확신으로) 물론 정혁이에게 나는 상대가 안 되는 시합내기였지만 그래도 오기가 생겼다. 정혁이는 살살 봐줄 테니 나보고 먼저 시작해 보라 인심 쓰듯 순서를 양보했고 나는 저어어엉말 최선을 다했다. 하늘도 나를 도왔는지 빠르게 회전하며 나오던 야구공의 실밥의 개수가 보일 정도로(그 당시는 정말 보였다) 마치 슬로우가 걸린 것처럼 내 눈에는 공이 정확하게 보였고 연타로 잘쳤다. 그 당시의 희열이란. 기분이 째진다는 말을 몸소 실감했다. 난 또 내 시력이 4.0인 줄. 


그리고 정혁이 순서가 되자, 정혁이는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이게 뭐라고) 나라를 되찾으러 가는 독립투사처럼 비장해 보였고 온몸의 근육을 방정스럽게 탈탈 풀며 이 악물고 나를 이기려고 하는게 눈에 보였다. 아오 씨벌 정 떨어져. 물론 예상한 대로 정혁이가 이겼고 밥은 내가 샀다. 운동 후 먹는 밥이 최고 맛있다고 우왕우왕쩝쩝거리는 정혁이를 보고 있자니, 먹는 게 '처' 먹는 걸로 보이기 시작하면 그 관계는 이미 끝이라는 문장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그게 재밌었는지 다른 날 또 정혁이가 포켓볼로 밥값내기를 하자고 했다. 정혁이에게 말은 안 했지만 당구장을 하던 삼촌 덕에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포켓볼 실력을 쌓아왔기에 이길 자신있었다 아니 이겨야만 했다. 그렇게 둘이 당구장에서 핑크빛 연인의 느낌 하나 없이 마치 한일전 수준으로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초 집중을 했다. 나는 체면 필요 없이 신고 갔던 예쁜 신발도 던져버리고 맨발로 당구대를 돌아다니면서 큣대를 마법사 지팡이 마냥 흔들어 댔다. 


물론 내가 연속으로 이겼고 마지막 하나 남은 8번 공을 정확히 구멍에 밀어 넣는 순간 정혁이는 나라를 왜놈에게 뺏긴냥 머리를 감싸며 크게 좌절했고 (도대체 이게 뭐라고) 나는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리곤 둘이 밥을 먹으러 갔는데 새까맣게 먼지가 뒤덮인 내 발바닥을 보니 현타가 왔고 밥을 먹는둥마는둥 시무룩해 있는 정혁이가 신경쓰였다. 쪼잔한새끼. 돈쓰는 게 억울한걸까 내기에서 진게 억울한걸까. 나는 우리의 데이트가 더이상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한 번 금이 가버리면 걷잡을 수 없이 깨져버리는 얼어버린 호수처럼 나와 정혁이와의 관계도 늘 차갑고 아슬아슬했다.


학교 방학으로 우리는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정혁이는 얼굴이 보고 싶다고 영상통화를 하자고 했다. 당시 영상통화가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반통화료랑은 달리 비용이 조금 더 나갔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보고 싶으면 본인이 전화를 걸면 되지 항상 영상통화를 걸어달라고 했다. 영상통화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요금은 올라가는데 정혁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나도 어느새 연애에 있어 사소한 돈계산을 하고 있는 게 싫었다. 


통화할 때마다 개학하면 어디 가서 뭐 먹자, 커플 아이템으로 뭘 사자 어딜 가자 등 간접적인 요구를 했고 그게 '우리' 같이 하자의 의미였는지 '니'가 다 부담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점차 돈을 안 쓰려는 정혁이의 모습이 좋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이 새끼가 나를 호구로 보나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 시점에, 문자로 '너랑 맞는 여자 만나' 달랑 하나 보내고는 부끄럽지만 문자로 이별을 고하고 정혁이와의 끈을 놓아버렸다.


나는 관계에 있어 '돈'을 생각해 버리면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다. 일방적으로 대접받는 것도 굉장히 부담스럽고 신경 쓰이지만 내가 만약 상대방에게 호의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감사한 마음으로 받긴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해서 꼭 커피를 사던지 작은 선물로 되갚는다. 너무 기브 앤 데이크의 칼 같은 계산일지는 모르지만 난 그렇게 해야 한다. 빚지는 기분이 싫을 뿐이다. 물론 일방적으로 내가 다 내는 것도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긴 하지만 나의 성의에 대해 당연한 마음을 갖는 게 아닌 최소한의 감사 인사라도 해주면 그걸로 나는 끝이고 뒤끝 없다.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거지인가 보다.  


처음에는 정혁이의 잘생긴 외모가 좋아서 시작된 마음이었지만 난 그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을 좋아했고 존경했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 다만 그의 빈주머니를 감싸앉기엔 우리 아빠가 이건희 회장이 아니었던 게 문제지.


그 시절의 정혁이는 나를 물주호구로 본 건지 아님 정말 집안 사정이 안 좋았는지 알 수 없다. 단 한 번도 정혁이한테 금은보화를 바란 적은 없지만 그래도 적어도 서로 공평했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돈 없으면 연애를 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 서로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맞춰 가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친구들이 우스갯소리로 잘생긴 남자와 만나려면 역시 돈이 많이 든다며 나의 연애를 비웃곤 했는데 정혁이를 그렇게 변하게 만든 게 내 잘못도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다. 처음부터 데이트 비용은 남자가 내야 된다고 여우처럼 굴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듯이 내가 너무 퍼줘서 정혁이가 버릇없는 금쪽이가 된 거겠지 누굴 원망하겠어. 그렇게 한순간 타올랐던 꽃미남과의 비싼 연애는 나에게 큰 교훈을 주고는 아름답지 못하게 끝났다.

 




거 참 사랑 한번 지독하게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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