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내가 1년의 휴학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대학교 3학년 시절의 이야기이다. 디자인과는 학교 정문 바로 옆 건물 한 채를 다 사용하는데, 과제에 찌든 우리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햇볕을 쬐는 죄수들처럼 계단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정문을 통해 걸어오는 학생들을 구경하곤 했다.
그날 우연히 내 눈에 띈 남자가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황토색 조끼를 입은 댄디한 스타일의 남자. 멀리서 봤는데도 내 눈에 꽃힐정도로 아름다웠다. 저 정도의 외모면 학교 다니면서 한 번쯤은 봤을 텐데 그날 처음 본 걸로 봐서 신입생이라 생각했다. 오호라. 평생소원이었던 연하남과의 러브러브 부끄부끄 역사를 한번 적어 내려 갈 수 있겠어. 어리고 잘생기면 다 오빠야. 그날 이후 그 남자는 내가 가는 곳마다 자꾸 눈에 띄였고 점점 의식이 되기 시작했다 . 심지어 나랑 같은 기숙사에 살고 있어 급식소에서 밥 먹고 있는 모습도 몇 차례 목격했다. 그리하여 티나지않게 구석에 숨어 훔쳐보는 스토커짓까지하게 되었다. 눈에 자꾸 밟히니 짝사랑은 더 깊어져만 갔고 정문에서 그를 본 지 한 달째가 되던 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그냥 돌진하기로 했다. 용기 있는 자가 꽃미남을 차지하는 법이니.
어떻게 접근해야 부담스럽지 않을까 친구와 밤새 고민을 했다. 덜컥대고 전화번호를 물어봤다가 면전에 대고 까이면 마음의 상처는 물론이고 다시는 기숙사밥을 못 먹을것 같은 창피함에 차라리 내 번호를 주기로 했다. 본인이 마음에 들면 연락이 올 것이고 그게 아니면 내가 깔끔이 마음정리 하면 될 테니.
계획을 실행하던 날, 최고로 예쁜 옷을 입고 화장도 완벽하게 하고 남자 홀리는 향수로 샤워를 한 뒤 스타벅스 커피에 아기자기한 귀여운 쪽지를 붙였다 ' 그쪽이 마음에 듭니다. 연락 주세요 010-****-****' 나란 여자 당돌하지만 매력 있어 훗. go자가 아닌 이상 백 프로 연락 오겠지 싶었다. 급식소에서 친구와 점심을 먹고 있던 그 사람에게 당당하게 걸어가 테이블에 커피를 촥 하고 내려놓고는 캣워크로 걸어 나왔다. 이상하게 그 날은 세상 모든 남자를 다 가질수 있을것 같은 자신감이 화려하게 내 몸을 감쌌다 그리고는 끝없는 기다림. 같이 계획을 세웠던 친구와 핸드폰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밤까지 기다리는데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이정혁입니다. 쪽지보고 연락드려요'
왔쓰. 됐쓰. 물었쓰. 게임 끝났쓰.
너무 바로 답장을 하면 없어 보일까 봐 10시간보다 더 긴 10분을 기다렸다가 쿨한 척 답장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문자를 주고받았고 정혁이가 대뜸 질문을 했다
'제가 여자친구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쿨하게 직진하신 거 아니에요?ㅎㅎ'
뭐지 이 흥미로운 전개는. 여자친구가 있는데도 나에게 연락한 거면 넌 쓰레기고 없는데 저렇게 말한 거면 나를 떠보는 거니 나도 강하게 나가야만 했다. '사귀고 싶다고 말한 적 없는데요?' 그렇게 보냈더니 머쓱했는지 나의 당돌함에 놀랬는지 여자친구 없으니 연락하고 지내자고 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나의 핵직구 매력이 좋았다나 뭐라나.
연하라고 생각했었는데 정혁이는 나보다 2살이 많았다. 꽃미모 동안의 공대생오빠. 상상이 현실이 되다니.
완벽했다. 매너 있고 인성도 바르고 그냥 다 좋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3일째 되는 날, 그가 보낸 문자가 굉장히 의외였다.
'근데, 그날 급식소에서 너무 빨리 나가는 바람에 얼굴을 제대로 못 봤는데 잠깐이라도 우리 볼까?'
참 애매했다. 내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데 3일이나 문자를 주고받는 건 뭐지. 내가 그냥 여자라는 이유로 연락을 한 건가 여장관리 당하는 건가 아님 그냥 한번 보고 싶어서 둘러서 말하는걸까. 마음은 복잡했지만 어차피 한 번은 만나야 될 사이였고 마침 그날 친구 생일파티가 있어 외출할 겸 잠시 얼굴만 보기로 했다.
멀리서 기숙사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정혁이가 보였다. 사실 나도 그렇게 가까이서 본 게 쪽지 건네주던 그날 급식소 이외에 처음이라 떨렸다. 정혁이가 내 실물을 보고 반하든 쫑내는 빨리 결정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다가올 운명을 마주칠 준비를 했다.
그날 밤은 모든 게 완벽했다. 공기 습도 온도 날씨 계절 그리고 기숙사 정문을 비추던 은은한 주황색 가로등불빛 마저. 핸드폰을 보고 있던 정혁이에게 다가갔다. '저기 안녕하세요' 고개를 든 정혁이의 얼굴이 조명에 비춰 잘생긴 외모가 더욱 빛이 났다. '아. 안녕하세요' 씩 웃던 정혁이를 보면서 나는 흠칫 놀랬다. 그때처음 정혁이의 입술 안에 숨겨진 윗니아랫니를 봤다. 항상 멀리서 무표정한 모습만 보다가 입술이 활짝 개방된 걸 본 건 처음이었는데 예상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저건 뭐지. 보통 사람의 윗 치아가 도도도도도도 → 이런 가지런한 느낌이라면 뭐랄까 정혁이의 치열은 도레도 도↗미↘도도 느낌. 덧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앞니라고 하기에는 앞니가 3개 일순 없잖아. 모든 게 완벽했던 그날 밤 단 하나, 정혁이의 왕덧니는 내 계획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정혁이가 갑자기 싫어지거나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생각과는 다른 외모에 조금 흠칫 한 건 사실이다 (눼눼 저는 외모지상주의입니다) 그래도 잘생긴 본판은 어디 안 가.
그렇게 2분 정도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나는 생일파티에 갔고, 정혁이한테 계속 문자가 왔다. 뭐 대략 놀랬다 예쁘다 언제 집에 들어가냐 이런 사소한 내용들. 내가 예상보다 괜찮았는지 (땡큐♡) 정혁이의 문자 답장 속도와 횟수가 달라졌다 대답만 하고 되물어 보지 않았던 무심함 가득한 문자들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다정한 문자로 바뀌었다. 그날 이후로 정혁이는 연쇄 질문마가 되어 계속 하루에도 몇 십 번씩 나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또 우리는 연락을 주고받다가 정혁이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했다.
첫 데이트를 하는 당일, 먼저 나와 기다리던 정혁이가 보였다. 역시 잘생겼어. 브라보. 그깟 왕덧니가 정혁이를 향한 내 마음을 막을 순 없지 그럼 그럼. 키가 작은 건 이미 알고 있는 터라 나도 굽이 전혀 없는 플랫슈즈를 신고 땅바닥에 붙어 걸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혔지만 정혁이를 위해 이깟 발바닥쯤은 희생할 수 있었다. 옆에 나란히 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아 정말 잘생겼어. 흐뭇했다.
그렇게 둘이서 카페에 들어갔다. 흡연이 가능한 카페였는데 정혁이가 나에게 담배를 펴도 되는지 정중하게 물었고 나는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신여성이라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피라 했다. 그렇게 마주 앉은 정혁이 담배에 불을 붙였고 그 불이 붙는 찰나 라이터 불빛에 살짝 비친 정혁의 얼굴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짜릿해 늘 새로워. 연기를 내뱉을 때마다 고개를 살짝 돌리는 모습에 간다 간다 뽕 간다. 이것이로구나. 우리 미래의 아이들의 얼굴은 이미 아빠를 닮아 완성형이겠구나.
이야기하다 보니 정혁이는 미래 계획도 확고하고 말할수록 멋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같이 있어보니 왕덧니도 서서히 괜찮아 보이기 시작했다. 데이트가 끝이 날 무렵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앞서 나가던 정혁이가 나를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