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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Jan 26. 2023

우린 그날 그곳에서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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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초등학교 첫사랑 우진이를 성인이 되어 만나게 되니 이성은 사라지고 감성만 남아버렸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허무하게 끝나버린 첫사랑을 이렇게 마주하다니. 예상치도 못한 우연한 만남이 더욱 날 초조하지만 궁금하게 만들었다. 성인이 된 우진이는 여전히 키가 작았다 그래서 힐을 신고 있는 내가 (키 168cm + 힐 8cm = 2m) 우진이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목을 세네번 접어 귀가 어깨에 닿을 정도로 한껏 낮춰 걸었다. 둘이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나란히 걸었는데 그때 문득 우습지만 초등학생 시절에 이랬다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서로 좋은 감정이 있을 때 헤어졌기에 지금의 만남이 더 애틋한 게 아닐까.


' 그 걔같이 있어? 일단 헤어지고 나랑 만나 할 말 있어'라고 온 친구의 문자가 신경 쓰였지만 그 순간을 깨고 싶지 않았다. 못다 한 첫사랑의 연장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도 있었기에.

그렇게 우진이와 나는 세계맥주집에 들어갔고 간단하게 달달한 맥주를 시켰다. 이미 우진이는 취했지만 내 정신이 멀쩡했기에 괜찮을 거라 단순하게 생각했다 아니 나는 그 당시에 우진이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그 순간의 우리는 13살의 아이들이었으니까.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으니.


그렇게 또 몇 잔을 나눠 마시며 서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우진이가 느끼하게 나를 쳐다봤다. 다정스러운 동창의 눈빛이 아닌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듯한 끈적한 눈빛. 이 새끼 뭐지 싶었지만 딱히 이상하진 않았고 그냥 혼란스러웠다. 그러자 갑자기 우진이가 내 손을 덥석 잡고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갔다. 손을 빼야 하나 어째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저분하게 더듬었다기보다는 살며시 손을 포갰고 우진이 손바닥이 술기운 때문인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가만히 있는 내 모습이 긍정의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우진이는 다음단계를 실행하였다.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의자를 내 쪽으로 끌고 가까이 붙어 앉고는 왼손이 허전했는지 허리를 감쌌다. 이게 뭐지 지금 뭐 하는 거지 이 새끼 원하는 게 뭐야 싶은 찰나에 우진이가 내 등을 여러 번 더듬었다 (더듬었다고 해야 하나 훑었다고 해야 하나) 반갑다 친구야의 느낌의 등 토닥거림이 아닌 브라자를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의 의지가 담긴 더듬더듬. 


그제야 나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13살의 첫사랑 우진이가 아닌 그냥 20살의 건장한 남자 우진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움에 어찌할지 몰라 가만히 있는 태도가 우진이에게는 허락이고 기회였나 보다. 혹시 내가 우진이에게 여지를 줬다가 괜히 발뺌하는 걸로 보일까 봐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우린 7년이 지나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갑자기 이런 저돌적인 태도를 보이는 우진이가 나는 한없이 부담스럽고 징그러웠다.


다시 핸드폰을 켜, 친구의 연락을 핑계로 이제 그만 나가자고 했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우진이가 많이 취했는지 (취한 척을 하는 건지)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기분이 굉장히 이상하고 찜찜했지만 그렇다고 우진이를 나 몰라라 버리고 갈 수 없으니 우진이를 부축하고 학교 쪽으로 다시 걸어가는데 술에 쩌든 우진이가 내 귀에 대고 주술을 하듯 속삭였다. 오늘 기숙사 안 들어가고 싶어. 멘트보소 장인일세. 내가 자취하는 걸 아는 우진이는 계속 내 자취방이 궁금하다느니 술 마시고 기숙사 들어가면 룸메가 싫어하니 어딘가 가서 술을 깨고 들어가야겠다느니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헛소리를 해댔다. 보통의 여자라면 지금 이 상황에 어땠을까. 


나에게 우진이는 첫사랑 소년이었는데 우진이에게 나는 그냥 성인여자였나 보다. 우진이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귀에 대고 숨소리를 불어넣었고 뒤섞인 술냄새가 내 귓불을 스칠 때마다 나의 인내심에 빨간불이 켰다 꺼졌다 반복했다. 난 우진이를 반가운 마음에 우정으로 다가갔는데 우진이는 날 어떻게 해볼 마음으로 다가왔나 보다. 술집에서 학교로 되돌아오는 그 짧은 8분가량의 길이, 우진이를 첫사랑이라 가슴속에 품고 지냈던 7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그러다 아까 헤어진 몇몇의 모임 회원들을 마주쳤고, 그들에게 우진이를 던져버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그 사람들을 안 만났어도 우진이를 기숙사 벤치에 두고 가버릴 생각이긴 했지만.


전화를 받자마자 친구는 화부터 냈고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무턱대고 그 친구에게 우진이의 이상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뭔가 수치스럽고 내 소중한 첫사랑이 깨부수어질 것 같은 마음에 최대한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진 친구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니 내가 아는 우진이가 정말 맞는지 하는 의심부터 들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친구 말은즉, 우진이가 그런 분야 유명했고 이미 모임사람들은 쉬쉬거리며 내색은 안 하지만 다 알고 있다고 했다. 뭐 별명이 그들 사이에 이미 쎅미남이라 몰래 불리어졌을 정도니 (수에 자). 우진이는 모임에서 사람들과 더 이상 잘 어울리지 않고 새로 온 여자하고만 이야기를 하고 꼭 모임 끝무렵에 둘이 사라졌으며 그 후로 그 여자는 더 이상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한다. 한마디로 상습 여자 신입생 킬러. 그 둘이 뭘 했는지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더듬는 손스킬을 봤을 때 아름답게 끝나지는 않았을 거라 다들 예상했다 한다. 매번 같은 레퍼토리로, 동정심을 유발해 술 마시며 친해져 단둘이 2 차가고 나 오늘 집에 안 갈래 스킬 시전한 뒤 둘이 얼레리꼴레리 먹튀 후 잠수. 그러고 나서 또 다른 사냥감 물색. 난 그저 우진이에게 새로 들어온 하루밤 먹잇감이었다. 변한 우진이의 변태취객 코스프레에 정내미가 떨어져 마음 같아서는 초등학교 6학년 2반 친구들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우진이 만행을 알리고 싶었지만 똥 밟은 셈 치고 그냥 잊기로 했다. 그 후로 나는 모임에 가지 않았고 소문에 의하면 우진이가 군대를 갔다고 한다. 군대 가서도 신병에게 더듬이스킬 쓰면서 나 오늘 불침번 안 설래 드립치진 않겠지?


우진이 성격이 변한 걸까 아니면 술이 우진이를 변하게 만든 걸까. 그날의 우진이는 결코 강압적이거나 무섭지는 않았지만 만약 그날의 분위기에 취해 우진이의 느끼함에 취해 우진이 술냄새를 따라갔더라면 이 이야기의 엔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날 내 기억 속의 소중한 첫사랑을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비록 지금은 추잡해진 기억이 되었지만. 궁금하다 우진이도 나처럼 깨져버린 첫사랑의 기억이 슬프고 안타까운지. 그 후로 대학을 다니는 몇 년 동안 우진이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마주치더라도 웃으면서 우진이를 대할 자신도 없었지만.


오랜만에 책장에 잠들어있던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봤다. 긴장한 듯한 무표정의 어린 우진이가 그곳에 있고 그 바로 뒷장에 우진이를 좋아했던 어린 내가 있다. 종이 한 장의 차이로 우린 마주 보지 못하고 서로의 뒤에 존재했다. 그렇게 알고 살아야 했다. 졸업앨범처럼 우린 그저 서로의 기억 뒤편에 조용히 머물러야 했다. 우진이를 순수했던 소년으로 평생 그렇게만 알고 있어야 했는데 그날의 호기심과 반가움이 내 첫사랑을 망가뜨려버렸다.


지금에 와서 초등학생 시절의 풋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우습지만 좋아하는 감정을 처음 알게 해 준 그 시절의 우진이 덕분에 지금까지 내 사랑도 건강하게 잘 자랐다. 그날 우진이를 만난 게 잘못이었을까 아님 첫사랑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우주대법칙을 깨닫는 경험이었을까. 요즘 다시 궁금해진다. 우진이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여전히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더듬고 다니진 않겠지. 밥은 먹고 다닐까. 소식이라도 듣고 싶은데 우리 둘 사이에는 연락의 교집합이 없다. 사실 SNS가 잘 발달된 지금 사회에서 어떻게든 찾아내려면 찾을 수는 있지만 또다시 상처받을까 봐 덜컥 용기가 나지 않는다. 첫사랑은 그저 첫사랑으로 간직해야 한다 호기심에 굳이 다시 꺼내 이리저리 만져보면 그 본질의 모양이 변해 망가져 버리게 되니까. 






우진아

나는 너의 아주 오래된 소문이 될 거 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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