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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Jan 25. 2023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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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정의는 무엇일까.

보기만 해도 가슴 떨리고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는 무한정의 기다림을 느껴본지도 꽤 오래됐다 그러다 문득 첫사랑이란 단어를 되새겨봤다. 처음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느끼는 간지러운 두근거림을 말하는 것일까 아님 이 사람이 아니면 죽을 것 같은 처음 느끼는 간절한 뜨거움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에게 첫사랑은 누구였을까.

난 '처음'이라는 단어를 보면 말랑한 느낌이 든다 세게 쥐어버리면 망가질 것 같은 여린 그런 거. 여기에 '사랑'이라는 단어까지 붙여졌으니 얼마나 아름답고 말랑하고 소중한 사랑일까. 모두에게나 처음은 있고 처음이기에 서투르고 대부분은 실패로 끝난다 어떻게 보면 첫사랑이 실패로 끝났기에 다음 사랑을 만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배우고 성숙해지는 듯하다 그래서 첫사랑은 필요하고 소중하다.


두근거리는 감정이 사랑이라면, 나에게 첫사랑은 초등학교 같은 반 남자아이 우진이 인 듯싶다. 우리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같은 반으로 시작해 서로를 알게 되었고 6학년이 되어 다시 한 교실에서 만났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모르던 4학년때를 지나, 여자친구들하고만 노는 게 즐겁던 5학년을 거쳐 이성에 처음 눈 뜬다는 6학년이 되었고 그때 우진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우진이는 쌍꺼풀 없는 피부색이 조금 짙은 축구선수 st로 말수가 별로 없는 아이 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저냥 평범한 초등학교 남자아이였다. 4학년때는 키가 비슷했는데 6학년이 되면서 내가 조금 더 커졌다 (내가 더 덩치가 컸던 기분 같은 기분, 옆에 나란히 서면 내가 사촌누나인 것 같은 기분) 왜 갑자기 몇 년 동안 봐오던 우진이가 좋아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물먹은 물감이 하얀 도화지에 천천히 물들듯, 보라색 같던 우진이가 내 하얀 감정에 자연스럽게 물들어 나의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은 늘 연보라색이었다.


나는 좋아하면 대놓고 티 내는 성격이라 우진이를 좋아한다고 소문내고 다녔고 중간 과정은 자세히 생각나지 않지만 우진이도 나를 좋아했던 것 같다. 사귀자고 서로 말한 적은 없었지만 우린 분위기상 공식 커플이었다. 정말 손도 한 번 안 잡아보고 단둘이 만나 본 적도 없지만 분명 우린 커플사이었다. 그 당시 공책에 편지를 적어 매일 서로 교환하는 펜팔이 유행했는데 나랑 우진이도 유행에 맞게 사랑의 펜팔을 주고 받았다. 대략 내용은 너 오늘 실내화 주머니가 멋지더라 너랑 딴 아이랑 이야기 하는거 보니 질투난다 너랑 짝지 하고 싶다 오늘 급식 먹을 때 근처에서 먹었다 등 민망하고 부끄러운 내용들로 가득한 데스노트급의 어린 날의 치부지만, 그 당시 우리는 꽤 진지했다. 지금도 그 펜팔을 가지고 있으면 좋겠지만, 사춘기가 쎄게온 중학생 시절에 중2병이 제대로 와서 펜팔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신기하게 우진이는 펜팔에서는 강렬한 사랑꾼이었는데 실제로는 인사도 잘 못하고 대화도 거의 안 하는 부끄럼쟁이 었다. 순수했던 90년대에는 데이트의 의미도 몰랐고, 뽀뽀는 상상도 못 할 징그러운 어른짓이라 여기고 우리는 그저 좋아한다는 단 하나의 표현울타리 안에서 서로를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1년 동안 펜팔에서만 좋아하는 감정을 나눴고, 말 몇 마디 못 섞어보고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나는 여중으로, 우진이는 남중으로 가게 되었고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그렇게 서로를 자연스레 잊어버렸다. 이렇게 아름답게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우진이를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되었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련하고 말랑한 추억으로만 남겨지게 그날 그 장소에서 우진이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16년 전, 대학생이 된 나는 타지에서 대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우연히 친구와 고향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타지에서 외롭게 대학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해 같은 고향사람들과 친목을 쌓는 그런 술자리 모임 같은 거. 지하로 내려가는 술집이었는데 열몇 명이 모여있던 그 장소 그곳에 우진이가 있었다. 7년 만에 봤지만 멀리서도 나는 우진이알아봤다 왜냐하면 어릴 때 모습 그대로였거든 얼굴도 키도. 달라진 게 있다면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거 하나. 순진하고 조용했던 우진이는 말도 잘하고 적극적인 (키 작은) 남자가 었다. 슬프게도 우진이나를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어찌 됐든 우리는 옆자리에 앉아 오랜 시간 동안 옛날이야기를 나눴다. 13세의 여학생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우진이가 여전히 좋았고 터질듯한 심장소리가 옆에 앉은 우진이한테 들릴까 봐 노심초사했었다. 우리를 나머지는 빠르게 흘러갔지만 나와 우진이만 멈춰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우진이와 눈 맞추며 어린 시절 순수했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니 피리소리에 홀린 것처럼 우진이에게 빠져버렸다.


그러다 한잔 두 잔 마시던 우진이가 취했다. 까무잡잡한 우진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게 보일 정도로 많이 취했다. 모임이 서서히 끝나는 분위기 었고, 가방을 들고나가려는 찰나에 우진이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우리는 조금만 더 같이 있자. 멘트 지리고 분위기 오지고. 이 능구렁이 같은 놈. 여자의 마음을 쥐락펴락 하다니. 합격. 사실 우진이는 이상형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감정이 안개가 피어오르듯 가슴속을 서서히 흐리게 만들었고 알 수 없는 감정이 쏟구쳤다. 고민하던 찰나에 먼저 나간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 그 걔같이 있어? 일단 헤어지고 나랑 만나 할 말 있어' 

문자가 신경 쓰였지만 나는 옛날로 돌아간 그 감정이 좋아서 폰을 꺼버렸다. 다른 술집으로 장소를 옮겼고 그곳에서 나는 다른 우진이와 마주하게 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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