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직장생활을 하던 중 예상치도 않게 몸이 아팠다. 병명은 3차 신경통이랬다. 가만히만 있어도 번개 맞은 것처럼 아프고, 차라리 땅에 묻히면 덜 아프겠지 싶은 마음이 들정도로 너무 괴로운 병이었다. 처방받은 약으로 신경을 조절해 고통은 줄었지만 몇 개월을 집에서 은둔생활을 하다보니 우울증이 왔다. 푸른 자연에서 맑은 공기 마시며 재밌게 살면 몸이 씻은듯 나을 것 같아서 덜컥 뉴질랜드행을 결정했다. 자연 is 뉴질랜드니까.
그렇게 일사천리로 뉴질랜드 위킹홀리데이 1년을 계획하고 호다닥 뉴질랜드 오클랜드로 떠났다. 호주에서 노예처럼 돈을 벌었으니 이제는 돈을 적게 벌더라도 워라밸을 즐기며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 검색하던 중 '오페어'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오페어란 외국인 가정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대가로 숙식과 일정량의 급여를 받는 일이다. 자유시간에는 어학 공부를 하고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일종의 문화프로그램으로 분류된다는 점에서 나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를 오페어로 고용한 집은 두 이혼가정의 만남으로 창조된 동거가족으로 정말 특이하고 복잡했다. 엄마 측인 엠마는 영국인 스튜어디스로 장남 18세 스콧, 12세 에이미 그리고 막내 8살 제임스 등 세 자녀를 가졌고, 남자친구인 매트는 뉴질랜드사람으로 직업은 교사, 초등학생 두 자녀를 둔 과묵한 남자다.
엠마는 매트와 결혼하지 않고 매트의 집에서 동거생활을 했으며 (작년에 결혼했다고 소식 들음) 내가 오페어로 일하는 그 해에 둘이 처음 살림을 합쳐서 그런지 아이들은 엄마의 남자친구인 매트와 그다지 친해 보이지 않았다. 엠마네 아이들은 2주에 한번, 주말 동안 친아빠의 집으로 갔고, 전 와이프가 키우는 매트네 두 딸은 엠마네 아이들이 없는 주말 동안 아빠와 시간을 보내러 집으로 왔다.
어후 복잡하다 복잡해.
외국인들은 이혼과 재혼에 있어 쿨하다고는 들었는데 전남편이 아이들을 픽업 와서 전 부인의 현 남자친구와 맞담배를 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걸 직접 보고 있자면 쿨하다 못해 춥다 추워.
나는 엠마가 고용한 사람으로 엠마네 세아이들만 케어하면 되고, 특히 8살 제임스를 집중적으로 돌봐줘야 했다. 뉴질랜드는 법적으로 14세 미만 아동이 혼자 집에 있으면 부모가 아동학대로 처벌을 받는다나 뭐라나 그래서 성인이 꼭 집에 있어야 한다. 내가 아이들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케어해야 되는 건 아니고 그냥 집에 '있기만' 하면 되는 꿀 빠는 일이었다.
오페어들은 각자의 가정에서 방 한 칸을 제공받는데 그 가족의 경제 사정에 따라 머무는 방의 컨디션은 천차만별이다. 오페어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독일인 오페어집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대저택에 사는 의사 부부가 호스트로 방 개수만 어마어마했다. 제공받은 방에는 화장실도 있고, 오페어 방크기만 해도 엠마네 거실만 했다. 내가 머물렀던 집은, 매트가 교사인 관계로 학교 안에 있는 작은 사택이었는데 집도 좁았지만 내 방은 굉장히 더 많이 아주 좁았다 힝. 얼마나 작았냐면 침대 때문에 성인 세명이 서 있을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오페어 첫날, 몇 시에 일어나야 할지 몰라서 새벽 6시 눈이 번쩍 뜨였다. 역시 노예근성 못 버린다. 7시쯤 주방에서 소리가 들리길래 벌떡 일어나서 호다닥 뛰쳐나갔더니 엠마가 매트 출근준비를 도와주고 있었다. 일찍 일어난 나를 보고 왜 벌써 일어났냐고 하길래 애들 도시락 때문에 일어났다니까 가서 더 자라고 했다. 떠밀리듯 방에 다시 들어왔지만 너무 신경 쓰이는 주방 덜커덕덜커덕 소리. 8시까지 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 주방으로 돌진했지만 엠마가 그새 벌써 도시락을 싸뒀다.
내가 할랬는데.
내가 한다고 했잖아 이 년아.
기회를 안주네.
내가 한댓짜나!!!
해지 말랬잖아ㅏㅏ아아ㅏㅏㅏ, 그르지 말랬잖아!!!
그렇게 어색하게 엠마 옆에서 뻘쭘하게 기웃거리고 있는데 아이들이 아침밥을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침밥이라고 해봤자 토스트에 잼 발라먹는 게 다지만. 아이들도 아직은 내가 어색한지 자기들끼리 눈빛 교환만 하고 딱히 아무런 리액션은 없었다. 말조차 안걸어줬다. 하루아침에 집에 동양 여자가 떡하니 서있으니 이상할 만도 하다. 나는 엠마네 역대 3번째 오페어였는데 동양인은 처음이라 아이들이 어색해 할수도 있다고 미리 귀뜸을 해줬다.
12살인 에이미가 아침에 기분이 좋았는지 주방에서 핫코코아를 타서 지꺼, 지 동생 거랑 지 엄마 꺼만 타서 호로록 마셨다.
나는? 저기요 나는요?
동양인은 입이 아니라 주둥이인가요.
이 기집애가 사람차별한다. 싹이 보이는 미래의 인종차별주의자 같으니. 하지만 사랑으로 이해해 주기로 했다. 나와는 첫날이라 어색해서 그랬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에이미 계집애는 주구장창 나를 못마땅해했다. 에이미가 비록 나를 못 받아들이더라도 나는 친절하게 토스트를 해줘야지 싶어서 정성껏 잼을 발라줬다. 침을 뱉을까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어린애 데리고 뭐 하나 싶어서 포기했다.
아이들의 학교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큰 도로 하나를 같이 건너주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었다. 엠마와 아이들을 함께 보내주고 집으로 돌아와서 나를 고용해 준 엠마에게 고마운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 외국인들이 환장한다는 신라면을 끓여다 바쳤다. 잘 보여야 된다는 수능시험급 압박감에 물조절을 실패해버렸다.1일분 라면에 3인분 수준의 물을 넣어버렸다. 빨간 국물에 유유히 떠다니는 라면조각들. 께름칙해하며 숟가락으로 국물 몇 번 깨작깨작 퍼먹던 엠마의 새파랗게 질린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앞으로 주방 가스불 손댈 생각 하덜덜 마시오의 눈빛. 그때 바로 해고 안당한게 다행이다.
오후가 돼서 다시 엠마와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에이미는 리어리더 연습을 한다고 엠마와 다른 곳으로 갔고, 나와 제임스만 집으로 걸어 돌아왔다. 제임스는 옷을 벗어던지고는 간단한 간식을 먹으면서 나보고 옆에 앉아보라고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는 자기 책장에서 4세 연령 수준의 영어단어책을 들고 와서는 같이 연습해 보잔다.
"Hey, do you know 코끼리?"
"응."
"두유 노 레빗?"
"아이 노 아이 노."
"이번에는 어려운 걸 낼 거야. 두유 노 악어?"
"..... 이 새끼가."
그만하소. 적당히 하소. 1절만 하소.
나의 인내심은 여기까지다.
나 대학 나온 여자야.
나 대학 나온 여자야.
뉴질랜드까지 와서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두유 노' 드립을 듣고 있다니. 8살 제임스가 동양여자에게 4세 수준 영어단어 가르쳐주는 선생놀이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엠마의 등장에 눈치를 보더니 갑자기 내가 자기한테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해서 친절히 도와줬다며 개똥 삶아 먹는 소리를 해댔다. 그에 감동한 엠마의 우리 새끼 우쭈쭈 하면서 흐뭇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존심 상하긴 하지만 8살인 제임스는 정말 영어 잘하긴 한다.
제임스는 학교 이외에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여러 학원을 다니는 한국아이들에 비해 제임스는 따로 가는 곳도 없고 하교 뒤 주야장천 집에서 아이패드나 만지작 거리며 시간을 때운다. 더군다나 엠마가 매트집으로 이사 오는 바람에 강제전학을 한 케이스라 아이들은 친구가 없었다. 아마 내가 그들의 유일한 친구이자 하인이었을 듯.
게임이 제임스의 유일한 낙이라서 그런지 그는 극도의 흥분과 미친 날뜀과 연속 하이파이브 구걸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람 지칠 때까지 요구했다. 아마 게임을 너무하더니 성격에 문제가 오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진단해 본다. 하지만 나는 잘보이고 싶어 몇번이고 옆에서 오 쿨 굿 굿 따봉 브라보 너 잘한다 영혼 없는 관심을 보여줬고, 관종인 제임스는 그런 나를 좋아해줬다.
그렇게 엠마네에서의 첫날이 지나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꿀 빨 것 같이 쉬워 보이던 오페어일이 손이 많이 가는 제임스와 인종차별하는 에이미 그리고 호시탐탐 내 음식을 노리던 첫째 아들 스콧 때문에 하루하루가 피곤 해질 것이라는 것을.
어린 주인님들 납신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