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네 집에서 오페어일을 한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외출해서 돌아와 굿나잇 인사하러 갔더니 아이들은 거실에 모여 티비를 보고 있었다. 엠마의 강요에 못 이겨 고개만 슬쩍 돌리고 의미 없는 Hey 인사만 하다가, 한인마트에서 사 온 30불어치의 한국과자를 꺼내는 순간 박수갈채와 자동기립을 해줬다.
어서 옵시오. 우리의 동양인 구원자여.
We love Korea.
막내 제임스는 내가 최고의 유모라고 안아주기까지 했다. 참 더러운 세상이다. 아이들 관심받을라고 돈까지 써야 하다니. 아껴먹으렴 피같은 돈으로 산 나의 소중한 양식이니까. 사실 나 먹을라고 샀는데 관심받을라고 얼떨결에 기부해버렸다.
며칠 뒤 엠마는 새벽비행 스케줄로 밤에 집을 떠갔고, 처음으로 혼자 아이들을 케어하는 날이었다. 뭔가 나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부담감에 새벽 5시부터 눈이 뜨였다. 7시에 도시락을 쌌고 (도시락이라고 해봤자 식빵에 잼 바르고, 과자 몇 개, 사과 한 개가 끝) 8시쯤 아이들을 깨웠다. 제임스랑은 어느 정도 친해진 것 같은데 이상하게 에이미랑은 불편하다. 내가 먼저 말을 걸면 이 년은 예쓰 or 노 대답만 하고 혹여나 웬일로 먼저 나에게 말을 걸면 대답할 수 없는 MZ 줄임말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난 그저 yeah nice 만 대답할 뿐이었다. 사춘기가 쎄게 온 외국인 여자애와는 그 어떤 대화도 공감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봤다.
" 헤이 에이미, 너 가수 누구 좋아해? 저스틴비버? 나는 찰리푸스 완전 좋아해, 너는 어때?"
" No one."
".. yeah nice. 그럼 혹시 넌 뭘 좋아하니?"
" Nothing."
"....... yeah nice."
이 년이 대화를 아주 절단 내버리셨다. 그래도 에이미와의 어색함이 싫어서 네이버로 외국인들이 좋아한다는 한국 계란빵 사진을 보여주면서 학교 마치고 같이 만들자고 꼬셨다. 하지만 이 깡년이 자기는 그런 거 만들 줄 모르시단다. 어 그래. 그냥 있는 거나 먹자 이년아. 넌 앞으로 내가 만들어주는 한국 간식 없어. 안 줘. 나랑 제임스랑만 먹을 거야 흥.
학교 마치고 집에 돌아온 에이미가 갑자기 깨끗한 옷으로 싹 갈아입고는 내 앞에 다시 등장했다. 아침의 치욕을 잊고 오래간만에 혀좀 놀려볼까 싶어 와우 에이미 너 이쁘다 공주처럼 입었네 뷰티풀 나의 작은 프린세스 오 마이갓 눈을 뗄 수가 없어. 쿨한 척 하지만 내 아부가 싫진 않았는지 아침에 말하던 계란빵 뭐시기를 같이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치명적인 에프킬라 같은 기집애. 하지만 기차는 이미 떠났단다. 안 만들어줘 특히 너한테는. 기차는 이미 떠났단다.
아직까지 핸드폰이 없는 아이들은 매번 아이패드로 유튜브 영상을 봐서 그런지 유튜버 원맨쇼 로망이 한가득이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내 핸드폰을 빌려 보기에도 민망한 1인 상황극 동영상을 잔뜩 저장해 놨다. 나는 잘 보이고 싶어 캐리어에 꽁꽁 숨겨뒀던 K-셀카봉을 요술봉 처럼 촤라락 꺼내서 보여주니 아이들은 떡실신.
홀리 쓋. 역시 삼성의 나라라면서 코리아 베스트를 외쳐줬다. * 때는 2015년입니다.
이렇게 나는 에이미 필요에 의해 친해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면서 피 말리는 하루를 보냈다.
하루는 휴가를 받아, 시내에 나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오니 웬일인지 에이미가 친한척하며 유튜브에서 배운 마술을 보여주겠다고 나를 거실로 이끌었다. 뭐 대충 손가락뒤에 이쑤시개를 테이프로 붙인 다음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이쑤시개가 사라지는 그런 별 시덥지도 않은 걸 마술이라며 보여줬다. 장님이 아닌 이상 다 아는 어처구니없는 그런 눈속임이었지만 난 립서비스를 풀코스로 해줬다.
오 마이갓 어떻게 한 거야? 요놈 요놈 너 완전 마술사구만. 어디서 이런 고급진 기술을 배운 게야. 혹시 해리포터 세요? 이 작은 지니어스 소녀야 나 완전 깜짝 놀랐어.
힘껏 똥꼬 빨아줬다.
엄마 아빠, 나 정말 외국에서 열심히 돈벌고 있어요 흑흑흑.
너무 오바로크 했나 싶었는데 에이미년은 나의 리액션에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힝. 그래서 비장의 무기로 시내에서 사 온 한국과자를 (나만 몰래 먹을라고) 내어주니 그제야 활짝 건치미소를 보였다. 볼드모트 같은 독한 기집애.
엠마가 저녁을 하기로 한날, 에이미 기분이 상당히 들떠 보였다. 오랜만에 엠마가 영국할머니로부터 전수받은 홈메이드 햄버거를 하겠다면서 오후부터 바빠 보였다. 식사 도중 엠마가 나보고 왜 아직까지 애인이 없냐면서 애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은지를 줄줄이 읆어댔는데 수능 영어 듣기만큼이나 듣기 괴로웠다. 참고로 엠마는 영국 깡시골 출신으로 영국 사투리 억양이 굉장히 강하다.
사춘기가 온 에이미는 '남자친구' 단어에 깔깔댔고 나에게 특별히 뉴질랜드 남자친구를 소개해 주겠다고 제임스를 데리고 방으로 가서 자기들 끼리 쑥떡쑥떡 거리더니,
안녕하세요 분주씨,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소개받은 뉴질랜드산 풍선입니다.
....두둥, 풍선으로 뚝딱 뭔가를 만들어와서는 새로운 내 남자친구라며 강제합석시켰다. 이름이 뭐더라 Jimmy 어쩌고였는데, 33살에 직업은 정원사라 구체적으로 소개시켜줬다. 에이미년의 광활한 이마를 콱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한 트럭 가득이었지만 즐거운 분위기상, 하-하이 미스터 지미, 나이스 투 밋 유. 보시라 동양인 원맨쇼를.
엠마가 주방정리를 할 동안 아이들이 더럽혀논 거실청소를 해야겠다고 한마디 했더니 에이미가 자기방에서 뭔가를 가지고 와서 거실 테이블에 올려두고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아니야 에이미,
내가 할게 내 일이잖아. 플리즈 렛 미 두잇.
그랬더니 에이미가 날 병신 보듯 봤다. 알고 보니 저 걸레는,
짜자잔. 필통이랍니다 호로로로롤.
껄껄 민망해라. 에이미 깡년이 그럼 그렇지. 도와줄 리가.
나랑 에이미의 사이가 조금 염려스러웠던 엠마는 주말 동안 둘이 같이 베이킹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라 했다. 물론 내키지 않았지만 고용주의 부탁이니 억지로 에이미 옆에 붙어 서서 그냥 하는 거만 쳐다봤다. 에이미는 유튜버처럼 혼자 중계를 하더니 오늘은 초콜릿 퍼지 케이크를 만들 거라고 나에게 호응을 유도했다. 그리고는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레시피로 만들어본다면서,
자꾸 새로운 무언가를 추가하고 싶다고 이것저것 뒤적거렸다.
나에게 뭘 추가하면 좋을지 어차피 대답 듣지도 않을 거면서 물어보길래 속으로
나는 니 예의범절을 좀 추가하는 게 어떨까 싶었지만 그냥 셧더마우스 했다.
한시간동안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겨우 손바닥 한 케이크 꼴랑 한 개 만들었다. 엄청나게 달았지만 양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주며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케이크이라며 팔아도 되겠다고, 먹어본 케이크 중에 제일 맛있다고 입발린 말을 해주니,
"I know."
부글부글.
동양인의 한계치가 +1 상승함과 동시에 혈압도 +5 상승했습니다. 미워미워.
에이미와 나는 사이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딱히 나를 미워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좋아해 주는 것도 아니고. 여자의 미묘한 감정이란, 읽기가 어렵다. 하루는 에이미가 아파 학교 결석을 하고 하루종일 둘이서만 있어야하는 숨 막히는 날이 있었는데, 혼자 거실 식탁에 엎드려 뭔가를 끄적끄거리더니 피곤하다고 방에 들어갔다. 뭘 저렇게 열심히 적고 있었나 싶어서 몰래 봤더니,
뭘까. 도대체 뭘 그린 걸까.
오호라 독약을 만들어, 몰래 콜라병에 담아, 동양인 유모한테 주려는 독살계획인 걸까.
들켰다 에이미 기집애야. 앞으로 집에 보이는 콜라는 전부 버려야겠어.
이렇게
나와 에이미는 서로 서먹서먹해하며 9개월을 지냈다.
아직도 궁금하다. 에이미는 날 정말 싫어했을까.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