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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Feb 17. 2023

나에게 중간이란 없다

엠마네 식구들은 딱히 친구가 많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은 자기 식구들끼리만 논다. 아주 간혹 친구나 친척을 초대하긴 했는데, 그들을 케어하는 게 내 일은 아니라서 크게 신경 쓰진 않지만 다른 약속이 없으면 나도 눈치껏 그들과 놀아주긴 했다. 내가 머무는 동안 대략 다섯팀정도 엠마네 집에 놀러 왔고 잊을 수 없는 두 아이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가장 기억에 남은 방문자는 비위 맞추기 어려운 Brain이다. 브라이언은 엠마의 조카로, 4살이 된 남자아이다. 하필 내가 쉬는 날 집에 놀러 왔고 대충 인사만 하고 방에서 영화 보고 있는데 엠마가 내 방위치를 알려줬는지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문을 열어보니 브라이언이 똘망똘망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나를 향해 배시시 웃고 있었다. 


아, 이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순수한 영혼이여.

 너무나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내 방 침대로 올라와 방방 뛰면서 같이 놀자고 했다.

사실 말이 같이 놀자는 거지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이거랑 놀자 저기서 놀자 등 상당히 많은 걸 요구했고, 억지로 놀아주는 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고용주 엠마의 눈빛이 뒤통수로 느껴져서 이왕 놀아주는 김에 제대로 놀아줘야겠다 생각하고 브라이언이 원하는 대로 다 해줬다. 비위를 아주 잘 맞춰줬다.


하지만 점점 나도 지쳐갔고, 마침내 브라이언은 제임스방에서 장난감 칼을 들고 와서는 날 찌르는 시늉을 했다. 그냥 허허하고 웃어줬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대뜸 자기는 지금 플레잉을 하고 있는 거라고 자기를 존중해줘야 한단다 참나. 돌려 말했지만 결국 맞장구쳐달라는 말이다. 오냐 찰지게 한번 맞장구 쳐줄 테니 드루와 드루와.


브라이언이 다시 진지하게 칼로 나를 베는 시늉을 했다 으아아악아 사람 죽네 아엠 다잉

장히 만족해하는 브라이언. 동양인의 죽어가는 리액션이 재밌었는죽어버린 나를 확인사살하듯 또 칼로 찔렸다. 으악 으악 으아아악 플리즈 썸바디 헬프 미 으아아아아ㅏㅏㅏ아엠 다잉잉잉. 그러자 브라이언은,


... too much


아오 젠장. 내 어느 장단에 춤춰주리오. 께름칙하게 곁눈으로 흘겨보고는 갑자기 재미없다고 바닥에 엎드려있는 나 마당 한가운데 버려두고 총총걸음으로 지 엄마한테 달려가서는 엠마집은 지루하다고, 미스 코리안은 노잼이라며 찡찡거렸다. 나는 마당에 혼자 덩그러니 치질검사 자세로 엎드린 채 버려졌다.

돈 벌기 힘들어. 

침대밑에 숨겨둔 와인을 처음으로 병나발 분 날이었다.






에이미는 최근에 전학 와 친구가 없는데, 어쩌다가 같은 반 여자아이 린과 친해졌는지 종종 그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마찬가지로 친구가 없는 제임스도 린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마치 자기도 친한 친구인척 옆에서 거들었고, 엠마는 언제 린을 데리고 집에 오라고 했다.


린은 중국계 뉴질랜드인으로 부모님은 중국인이지만 린은 중국말을 잘 못한다고 말하면서 나에게 중국말을 할 수 있는지 에이미가 웬일로 관심을 보였다. 나는 한국인이라서 언어가 다르다고 말하니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무시 쌩. 부글부글. 엠마는 나에게 제임스는 손님만 오면 극도의 흥분을 하기 때문에 린이 놀러 오면 제임스를 분리시켜 달라 신신당부했다. 고작 몇 주 살아본 결과, 관종인 제임스가 어떻게 나올지 뻔히 보이는 상황이다.


그리고 며칠 뒤, 에이미가 린을 데리고 왔다. 시선 내려 깔고는 인사 안 하는 게 에이미년이랑 똑같다. 오자마자 주방으로 가서는 남의 냉장고 문을 열어보고는 뭐가 먹고 싶다느니 배고프다느니 나 들으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넌 나한테 월급 안 주니까 말은 안 들엉.


엠마 부탁대로 제임스한테 여자애들끼리 놀게 빠져주자고 하니 그새 삐져서 괴성을 지르며 화장실로 뛰어가서는 문 잠그기 스킬을 선보였다. 안 그래도 린의 똥 씹은 표정에 화나있던 나는 제임스의 예의 없는 행동에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이 집에서 한 번도 보인적 없는 분노와 쌍욕을 분출해 버렸다. 성격장애 마냥 입에 고삐가 풀려서 30년산 욕쟁이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아오 f**k. s**t.

f**ing s**t. Are you f**king crazy?

what the f**k 삐ㅣㅣㅣㅣㅣㅣㅣ


지금생각해 보니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분노였다. 상황에 대해 말해보자면 우리나라에 일하러 온 크로아티아 식모가 한국 초딩 2학년이 화장실문을 쾅 닫았다고 그 자리에서 ㅆ아오 ㅈ같은. ㅈ같은 씨바아아알 하면서 더 미쳐 날뛰는 상황.


멀찍이 서서 나를 쳐다보던 첫째 아들 스콧의 표정은,

저 ㄴ 정상 아냐.


어쨌든, 금방 풀린 제임스와 (나도 금방 풀림) 에이미, 린에게 오후 간식으로 오레오 셰이크를 만들어줬다. 다 같이 식탁에 앉아서 조용히 먹고 있는데 에이미가 뜬금포로 나에게 린과 둘이서 중국말로 대화해 보라고 했다. 내가 중국말 못 한다고 어제 분명 말했는데 에이미년은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나 보다 아니지 처듣고있지도 않았나 보다. 그래도 제임스와 에이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아는 중국단어 다 나열했다.


니하오마 (안녕하세염)

시팔름아?(식사 좝수셨나요)


중국말 발음을 빙자한 내 진심이다 이놈아. 근데 린이 내 말을 못 알아듣고 (당연히) 자꾸 션머? 션머?(什么=what) 거렸다. 그러든가 말든가 대화가 되든가 말든가 나는 계속 어렴풋이 어디선가 주워들은 아는 중국어를 줄줄이 읆었다.


이싼나알? (얼마나 멉니까)

찌찌 빠빠 (엄마 아빠)

피엔이 이 디얼바 (조금만 깎아주세요)

청룽, 워아이니 (사랑해요 성룡)


린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지기 싫었는지 계속 중국어로 '너 지금 뭐라 하는 거야?" 말했지만 린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안 쓰고 무작정 일방통행으로 중국어처럼 들리게 한국어를 어눌하게 말했다. 나 년은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다. 워스 한궈런 오직 마이웨이 직진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에이미는 굉장히 흡족한 표정을 지었고, 엠마가 집에 오자마자 나와 린이 중국어로 대화했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하지만 나 때문인지 뭐 때문인지 린은 그날 이후로 엠마집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에이미 친구 하나 해치웠으. 참으로 고단한 외노자 김씨의 삶이다.

엠마네 아이들보기 지치셨나요?

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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