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뉴질랜드 10개월 동안 거의 제임스랑 붙어있었다. 그래서 제임스에게 가장 애착이 가고 애틋하다. 물론 나를 너무 귀찮게 하고 지치게 했지만 나의 뉴질랜드 삶의 9할을 제임스가 심심하지 않게 채워줬다. 내 뉴질랜드 사진첩 폴더의 대부분은 제임스 사진으로 꽉 차있을 정도로 그 아이와 추억이 많다.
제임스는 누나인 에이미와 맨날 싸우고, 엄마의 남자친구인 매트와 장남 스콧의 눈치를 엄청 봤으며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다가 짜증 내고 애교도 부리고 울다가 삐졌다가 아팠다가 감동을 줬다가, 암튼 복잡한 아이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제임스를 사랑하고 지금껏 그리워하는 이유는 제임스가 나를 진심으로 대해줬기 때문이다. 영어를 못해 미안하다고 했을 때, 제임스는 오히려 자기가 한국말 못 해서 더 미안하다고 해준 속 깊은 아이다. 스물아홉 살이던 나는 여덟 살짜리 선생님께 한 수 배우며 영어회화실력을 쌓아갔다 물론 대부분 새겨듣지 않고 흘렸지만.
제임스는 학교에 정을 붙이지 못해 눈치봐가면서 아픈척하며 결석하려는 개수작을 부리곤 했다. 내 눈에는 멀쩡해 보이는데 배가 아프니 머리가 아프니 매일 아픈 부위를 바꿔가면서 꾀병을 부리는데도 마음 약한 엠마는 그냥 학교 가지 말고 쉬라고 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제임스를 단 한 번도 병원을 데리고 간 적이 없다 꾀병인걸 알아서 그런 걸까.
제임스가 아픈 날은 나의 자유가 사라지는 날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같이 있어줘야 한다는 뜻인데 8세인 제임스의 요구 사항은 시시각각 바뀐다. 처음에는 다 받아주고 오구오구 해주다가 결국에는 영어 못 알아듣는 귀머거리 동양인 컨셉으로 제임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는 경지까지 되어버렸다.
제임스가 아침부터 아픈 날은 그나마 괜찮은데 꼭 학교 가서 정오쯤 아픈 척을 해, 멀리 시내에 나와있는 나에게 학교에서 연락이 온다. 엠마가 내 번호를 비상연락처로 학교에 알려줘서 웬만한 급한 일은 나에게 전화 온다. 처음에 학교 전화받았을 때는 너무 놀라고 걱정돼서 비싼 택시 타고 학교로 거의 울다시피 해서 뛰어갔는데, 이제는 이놈 또 이러네 싶어 시내에서 여유롭게 커피 한잔 호로록 마시고 천천히 마을버스를 타고 돌아 돌아 느린 걸음으로 데리러 갔다.
학교 보건실에 가면 한쪽 구석에 제임스가 세상 죽어가는 표정으로 웅크리고 앉아있는데 집으로 데리고 오면 표정이 싸악 바뀐다. 마치 군침이 싹도노 표정의 루피처럼. 이 집에는 규칙이 있는데 아파서 학교 가지 않는 날은 아이패드 및 TV시청, 간식 금지다. 아마 꾀병 부리는 제임스를 겨냥해서 만든 듯싶다.
어쨌거나 아픈 척하는 애를 먹여야 하니 뭘 먹고 싶냐고 물어보니까 뭔가가 먹고 싶은데 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애들이 아플 때 엠마가 만들어주는 오트밀죽을 만들어 주려고 하면 자기는 목이 아프니 뭔가 소프트한데, 뭔가 달콤하면서, 뭔가 말랑말랑한 팬케익 같은 걸 먹어야 나을 것 같단다. 결국 팬케익 해달라는 말이다. 그래서 팬케익 해준다 하면 자기가 팬케익 먹는 거 알면 가족들이 자기가 꾀병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고 (...꾀병 맞잖아) 나보고 팬케익 먹는걸 비밀로 하자했다. 정말 8세 다운 발상이다.
역시 팬케익은 코리안 외노자가 만들어야 제맛.
5분 만에 만들어서 5분 만에 먹고 증거 없애기 그리고 굉장히 흡족한 제임스.
꾀병+1포인트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제임스는 또 학교 안 가려고 이불 칭칭 감고 배 아픈 척하며, 열도 안 나고 정말 멀쩡한데 목소리만 모기만 하게 작게 내고 있었다. 이로써 아침에 에이미만 학교에 후딱 데리러 주고 어제와 똑같이 제임스와 10시간을 붙어 있어야만 했다. 매트가 출근 전에 제임스에게 괜찮냐 물으니 제임스는 기운도 없고 숨을 못 쉬겠다고 눈에서 나오지도 않는 눈물즙을 간간이 짜냈다. 숨은 존나 잘 쉬고 있구먼.
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배고프다고 노래를 불렀고, 뭔가 드라이하지 않고 촉촉한데 달진 않으면서 적당히 짜고 따뜻한 걸 먹으면 배가 아프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참 구체적이네. 그냥 라면이 먹고 싶다고 말해.
금쪽같은 엠마 새끼 제임스 새끼. 미워할 수가 없어.
오구오구.
배부르게 먹은 제임스는 심심했는지 옷 갈아입고 나와서는 같이 놀자고 했다. 아픈 거 아니냐니까 움직여야 몸이 빨리 치유된다면서 나를 마당으로 끌고 갔고 본인 그네 타는 거 구경하라고 했다. 제임스가 그네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5분이나 가만히 보고 있으니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지루해 거실로 들어가려 하니 자기가 그네 타다가 죽어도 (갑자기?) 나는 신경 하나도 안 쓴다고 자기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도 안 되는 가사에 이상한 음을 붙여 염불처럼 읊조렸다. 질린다 너란 남자.
아이패드 금지령에 제임스는 할 게 없어 그네 타다가 비눗방울 불다가 나무에 매달렸다가 트램펄린 탔다가 뒷구르기했다가...보기만 하는 건데도 나 너무 힘들어. 거실 유리문을 확 닫아버리니 어느새 어디선가 물총을 주워와서는,
빵야빵야.
유 다이 유 다이 공격개시.
물총이니 망정이지. 제임스가 성인이었으면 진짜 총을 쐈을지도. 호달달달
저 새ㄲ.. 표정 보니 진심이다 그래서 나는 한 시간이나 더 제임스랑 자아알 놀아줬다. 그리고 소름 끼칠 정도로 다시 배고프다고 뭔가 달콤하면서 뭔가 따뜻하고 뭔가 말랑말랑한 거 먹어야 나을 것 같다고.... 어제의 데자뷰. 정말 돼지런한 놈.
하루는, 학교 갔다 와서 심심한 제임스가 장난감 칼을 내게 주더니 히어로 게임을 하자고 했다. 자기는 영웅 배트맨이고 난 악마인데 내가 자기를 죽일라고 쫓아오는 나쁜 악당 역할이고 자기는 도망치다가 결국엔 멋있게 나를 죽인단다. 무슨 이놈의 집안은 틈만 나면 게임을 빙자해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야. 설명만 들었는데도 재미없어서 아주 매몰차게 제임스에게 대답했다
" 쏘리 제임스, 노잼."
그러자 그새 삐져서 자기 방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역시나 3분 뒤에 다시 나에게 와서는 이번에는 내가 좋아할 만한 슈퍼맨 게임을 하자고 했다. 내가 슈퍼맨이고 자기는 암살자인데 슈퍼맨이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 나쁜 길로 빠지게 되고, 그런 나를 자기가 쫓아와 죽이고 세상을 구한다는 시나리오다. (.....) 결국 아까랑 같은 거. 어떻게든 날 죽이고 영웅이 되고 싶다는 거잖아.
안 한다고 하니 2차로 또 삐졌다. 결국 혼자 장난감 총 들고 와서 빵야빵야거렸다. 혼자 노는 게 심심했는지 서서히 눈치를 보고는 내쪽으로 총을 들고 슬금슬금 걸어와 나에게 총을 겨누고는,
" Hey, Kim, 돈 어딨어, 내놔. 안 주면 쏜다"
" in your pocket."
" 노 농담, 돈 어딨 냐고!."
" in 변기통. 꺼내가."
" 컴온, Kim, 돈 어디에 뒀.. 어.(제.. 제발 놀아줘)"
" 니 똥구멍에."
"..... I hate you"
3차로 삐짐.
3번 거절하니 미안해 다시 불러서 같이 놀자고 했다. 그랬더니 자기가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고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재밌는 걸 찾았는데 그걸 보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물론 혼자 본다는 말.
난 그냥 가만히 지를 쳐다보라는 거.
혼자 이어폰 끼고 혼자 영상 보며 혼자 낄낄 거리면서 나 보고는 옆에서 그런 자기를 보고 있으라 했다. 뭐 하자는 건지. 가만히 앉아있기 뻐근해서 일어나려고 하면 지금 재밌는 파트가 나온다면서 꼭 봐야 한다고 watch this watch this 거리며 나를 일어나지 못하게 붙잡았다. 아 물론 재밌는 파트를 혼자 이어폰 끼고 혼자 영상 보며 혼자 낄낄거렸지만.
그리고 내가 움직일 때마다 배고프다고 간식을 달라고 보챘는데, 내 몸에서 돼지고기 냄새가 나나 싶은 생각을 하게끔 내 면전에 대고 코를 킁킁거리며 맛있는 거 해달라고 찡찡댔다. 엠마가 아이들 살찐다고 웬만하면 설탕 많이 들어간 거 주지 말고 과일을 챙겨주라고 했는데 제임스는 설탕중독이라 입에 단 게 안 들어가면 텐션이 급격하게 높아진다 그래서 제임스는 매일 시급한 당치료가 필요하다.
초콜릿을 주면 말 잘 듣고, 아이스크림을 주면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초콜릿 아이스크림에 휘핑크림까지 올려주면 내 발바닥도 핥을 기세였다. 한 번은 엠마가 멀리 출장 간 날, 아이들을 셧다마우스 시킬 겸 한국식 파르페를 만들어줬다. 밑에 과자 깔고 3색 아이스크림 한 스쿱씩 퍼서 넣고 휘핑크림 엄청 올려 거기에 빼빼로, 초콜릿, 젤리, 마시멜로 꽂고 마지막 화룡점정으로 무지개빛 스프링클을 뿌려주니 이것들이 내가 해준 거 중에 제일 요리다운 요리라고 했다.
파르페에 콘푸라이크라 속이고 코딱지를 뿌릴껄 그랬어.
못한 게 한이다.
제임스는 학교 가는 날 보다 안 가는 날들이 더 많았는데, 하루는 내가 쉬는 날이라 이미 친구들과 약속 잡고 놀러 가기로 했었다. 아침부터 외출준비를 하는데, 에이미가 내 방문을 두드리고는 제임스가 아프다고 했다.
이런 ㅆ.
오늘만은 안돼 안돼.
제임스방에 가보니 또 아야아야 드립. 오늘은 못 참아. 그래서 처음에는 제임스를 달래도 보고 꼬셔도 보고 했는데 너무 아파서 걷기만 해도 설사가 나올 것 같다고 하면서 구토하는 시늉을 했다. 뇌랑 입이랑 따로 노는 듯했다. 지 말대로라면 똥꼬를 막아야지 입이 아니고.
오늘 학교 가면 내일 제임스가 좋아하는 셰이크 10개 만들어준다고 하니 잠시 흔들린 듯 보였으나 그래도 아파서 학교 못 간다고 했다. 아주 잠깐 정말 제임스가 아픈가 싶었지만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고는 거짓임을 확신하고 생전 부탁하지 않았던 스콧에게 가서 일렀다.
졸업 인터뷰 준비로 바쁜 스콧도 나의 뜬금포 부탁(애원)에 흔쾌히 제임스를 혼냈지만 그날은 제임스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배짱을 내밀었다. 심지어 스콧이 친아빠한테 전화해서 일러바친 상황.
제임스의 아빠도 화가 나서 네가 이러는 거 지겹다 너의 무책임한 행동이 가족들을 언해피 하게 한다 너 때문에 Miss Kim이 못 나가고 집에 있어야 해서 기분이 안 좋다 등 상황이 나 때문에 제임스 너는 길가에서 똥을 지리더라도 학교에는 꼭 가야지 Miss Kim이 편하다의 상황으로 가는듯했다. 내가 죄인이요 아동학대자니까. 하지만 이런 심각한 상황에 나는 이게 뭐라고 또 몰래 사진 찍기 (나도 정상아냐)
결국 스피커폰으로 친아빠한테 랜선 혼구녕이 난 제임스는,
강제연행.
풀죽어 고개를 푹 숙이고 억지로 끌려가듯 가는 게 안쓰러웠지만, 꾀병임을 알기에 쓰미마셍. 짠한 마음에 내일 제임스 보면 맛있는 거 많이 해줘야지 생각하고 풀 메이크업에 신상 드레스 쫙 입고 저어어어 멀리 버스 타고 배 타고 버스 또 타고 외출했지만, 3시간 만에 제임스 학교에서 또 전화가 왔다.
ㅆㅣ.. 바알
강제 학교 소환.
오페어는 어찌 됐든 아이들이 우선이기 때문에, 버스 타고 배 타고 또 버스 타고 와 제임스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고 무서울 정도로 시작된 제임스의 뭔가 달콤하면서 뭔가 따뜻하고 뭔가 말랑말랑한 거 드립. 아오 빡쳐.
작년에 엠마와 매트 결혼사진이 업데이트되었길래 안부 인사를 하니 답장이 왔다.
엠마네 가족한테 나 쫌 잘한 듯.
보고 싶다 모두들. 멀리서 봐도 비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더욱더 비극이었던 나의 뉴질랜드 생활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이 되었고 지긋지긋했지만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되돌아가 같은 일을 할 수 있냐고 물으면 나는 흔쾌히 예쓰라고 대답할것 같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