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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Feb 16. 2023

엄마의 남자친구와의 불편한 동거

나를 고용한 엠마네 식구들은 이제 그려려니 하며 지냈는데, 엠마의 남자친구인 매트랑은 불편했다. 매트와 나는 딱히 대화를 길게 나눈 적도 없고, 본인집에 총총거리며 살고 있는 내가 여간 신경 쓰였을 것이다.


그는 특유의 뉴질랜드 사투리를 쓰는데 매트 억양이 가장 알아듣기 어려웠다. 입을 안 열고 말하는 건지 혀가 없는 건지 항상 우물우물하면서 속삭이듯 말해 나는 알아들은 척을 하고 제임스에게 여러 번 되물었다. 제임스야 방금 저 사람 뭐라는 거얌. 근데 놀랍게도 엠마도 가끔 매트 억양이 알아듣기 어렵다는 말을 했다. 다행이다 나만 귀머거리가 아니라서.


내가 매트를 안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매트가 제임스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그걸 또 행동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엠마는 함께 동거하는 여자친구일 뿐이고, 엠마의 세 남매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없으니 굳이 가족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같이 지내다 보면 '저 인간 참 냉정하네' 생각이 자주 들었다. 특히 제임스에게만 엄격하고 함부로 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엄마인 엠마도 매트의 그런 태도를 느꼈겠지만 엠마가 매트를 너무 사랑했기에 알고도 넘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내 새끼 제임스 흑흑. 내가 우리 제임스 욕하는건 괜찮은데 남이 욕하면 화나는 그런 마음이라고나 할까.


하루는 내 방에 있던 서랍장이 고장나 엠마에게 이야기했더니 매트와 함께 2시간 뒤쯤 이케아에서 서랍을 사왔다. 되게 조립이 간단해 보이는데 매트는 하루죙일 서랍장을 붙잡고 있었다. 

어이구 그 팔에 달린 근육이 아깝다. 


몇시간에 걸쳐 겨우 완성된 서랍장. 보기보다 겁나 만들기 어렵다고 대단한 척하는 매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엠마와 에이미는 나에게 장난으로 서랍장 쓸 때마다 매트에게 감사하라며 말인지 방귀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눼예뉘예. 서랍장 한번 열 때마다 매트가 있는 쪽으로 절 한번 올리겠나이다. 됐냐.




매트네 집은 학교 사택으로 학교 안에 있다. 교사인 매트는 쉬는 시간마다 집에 들러서 담배를 폈고, 그때마다 집에 있는 나와 마주치고는 서로 어색한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나는 혼자 여유롭게 쉬면서 아이들 간식을 몰래 훔쳐먹고 싶고 매트는 한가롭게 마당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싶은데 서로의 존재가 어색하고 한 공간에 있는 게 불편했다. 식기세척기를 돌리고 커피 한잔 내려 내집마냥 낄낄거리며 유튜브를 보고 있었는데 매트가 조용히 나에게 와서 한마디 했다.


"Umm.. you don't really need to stay home all the time.

You are free to go out. Just do whatever you want to do.

You are now a part of our family, not here for just work. I want you to be happy."


매트의 의도를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아이고 이 년아 이 년아 또 집에 있냐? 좀 나가라. 집에 맨날 붙어있지만 말고 제발 좀 나가라.

집에 올 때마다 니가 있어서 집주인인 내가 매우 불편데스요.  꼴뵈기시름요.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모른척하고 집에 있기 뭐해서 그 날부터 밖으로 나돌았는데 '제임스'라는 변수를 생각못해 시내까지 나갔다가 급하게 학교 전화받고 집으로 온 적도 많다. 나가도 나간게 아니고 집에 있어도 있는게 아닌 외노자의 서러움.


매트가 서서히 더 불편해질 때쯤, 내 마음 편하고자 매트 환심을 사고 싶어 캐리어를 뒤적거려 보니 일본 친구한테서 받은 동양스러운 일본 담배가 있었다. 애연가인 매트에게 나 잘봐달라 뇌물을 건네면서 일본친구가 줬는데 난 흡연자가 아니라서 너 줄게라고 쿨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정작 나는,


"나는 일본친구. 담배 선물. 와따시와 담배피는거 아니요. 너한테 줄것 지금. 돈워리 비해피."

"...... "

저 동양년은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것인가.

영어인가 일어인가 한국어인가. 하나만 해.


이렇게 나와 매트는 더욱더 한 발자국 멀어졌다. 나 이 정도로 영어 못하는 거 아닌데 이상하게 매트 앞에서는 긴장이 돼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말하면서도 내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건지 제멋대로 움직이는 주둥이를 줘 고 싶었다. 정작 담배를 받은 매트는 매우 기뻐했지만 엠마는 내가 자기 달링에게 독을 줬다며 나를 노골적으로 째려보고는 매트가 폐암으로 일찍 죽으면 자기는 어쩔 거냐고 징징거렸다. 어후 에이미가 이상한 게 엠마 탓이었군. 역시 피는 못 속인다.



엠마가 야간 비행 스케줄로 집을 비운날, 매트가 웬일로 엠마네 애들한테 슈가파우더가 잔뜩 뿌려진 달달한 도넛을 줬다. 학교 급식에서 남은 거 들고 온 건가 의심도 잠깐 했는데 생각해 보니 나는 안 줬다. 나만 안 줬다. 내가 그게 먹고 싶다기보다는 같은 자리에 있는데 나만 안 받은 게 민망했다. 지가 고용한 사람 아니라고 안 주는 건가 싶기도 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암튼 정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매정한 새끼같으니.


애들 재우고 방에 조용히 짜져 있는데 몇 주 만에 처음으로 매트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나에게 뉴질랜드만 있는 초콜릿이라며 먹어보라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당장 본인 앞에서 먹고 먹방 유튜버같은 과한 리액션을 해주길 바라는지 방문 앞에서 떠날 생각을 안 했다. 이미 양치를 해서 내일 먹겠다고 하고 조심히 받아 들어 자세히 보니.

저스트 4개.


새것도 아니고 달랑 4개 남은 버리기 직전의 초콜릿. 먹고 떨어지라는 건가.

갑자기 왜 주는 거지? 나만 도넛 안 준 게 신경 쓰여서 뭔가는 줘야겠다 싶어서 급한 마음에 쓰레기통을 뒤지셨나.

자기 딴에는 큰 용기를 냈을 것 같다. 4개 남은 초콜릿 봉지를 부끄러워서 어찌 줄생각을 했을까. 기분이 묘하게 찝찝하고 뭔가 언짢았지만 한입 베어 물어보니

으허허ㅎㅓ엌  ㅈ..존.. 맛탱. 눈이 뒤집히는구만.

이것이 뉴질랜드 대기업 자본주의 맛이구나. 

고마워요 매트씨. 입안에 퐝퐝 터지는 상큼한 파인애플즙처럼 내 마음도 퐝퐝.


에이미 다음으로 불편했던 매트와는 좀처럼 친해지지 않았다

마지막날, 엠마네 식구들이 나에게 굿바이카드를 써줬는데, 이제껏 나에게 덤덤했던 매트의 비뚤비뚤한 글씨로 적은 한마디가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ありがと(아리가또)


개새ㄲ.. 나 한국사람이라고. 몇번을 말하니.

열받아서 혈압상승. 너도 노답이네.



혹시 에이미가 매트딸이 아닌가 의혹을 지울수가 없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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