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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Dec 31. 2022

내 집 찾아 삼만리 Part 2

07


그냥저냥 대학생활을 마친 나는 좋은 기회로 외국에 살게 되었다. 숙소를 구하기 전 공용 숙소인 백패커에 몇 주간 머물렀고 세계 각지에서 여행 온 파란 눈 외국인들과 친구 할 생각에 부풀어 있었는데 빌어먹을 백패커는 아시아인들끼리만 방을 배정해 줬다. 지금은 BTS를 선두로 하여 여러 케이팝 아이돌들이 한국 위상을 높여주고 한국 드라마, 음식, 영화가 세계인의 인정을 받아 모두들 한국을 우호적으로 대해주지만 내가 외국에 살았던 그때는 두유 노 싸이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직접적인 인종 차별을 당한 적은 없으나 은근 아시안인들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분위기였고 그럴수록 동양사람들은 단단하게 똘똘 뭉쳐 다녔다. 나는 수도권에서 온 한국인 2명, 일본인 2명과 방을 썼는데(여성 6인실) 덕분에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신기한 대화 체제가 형성되었고 말보다는 손짓 발짓으로 가족오락관 게임 마냥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이어갔다. 백패커에 머무는 동안 나의 영어는 늘 제자리였다 아니 더 퇴화했다고 해야 하나 오히려 서울말이 더 늘었다. 하지만 내가 영어를 그나마 할 줄 알아 항상  문제가 생기면 다들 나를 찾아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들의 눈에는 내가 대단한 뭐라도 되는 거처럼 영어박사라 불렀고 난 은근 그들의 칭송을 즐겼다. 장님들이 사는 나라에서는 애꾸눈이 왕이라도 된 것처럼. 사실 나도 외국인들 앞에 서면 어버버인데.


첫 집을 only 외국인 셰어하우스로 선택했고 2명의 외국인과 같이 지냈다. 같은 방을 쓰던 미스 콜롬비아와 미스 인도는 서로 성격이 너무 안 맞아 자주 부딧치곤 했는데 새벽 출근을 하는 미스 인도는 하루 2번씩 방에서 손이 여러 개 달린 신께 향을 피워 기도를 하는 종교의식을 치렀고 밤에 출근하는 미스 콜롬비아에게 그녀의 의식은 상당히 거슬렸나 보다. 매번 종교의식에 인도 노래를 틀어 처음에는 미스 콜롬비아가 소리를 낮춰달라 거칠게 요구하더니 결국 전화통화로 다른 콜롬비아인에게 그들의 언어로 시끄럽게 통화를 하며 방해하기 시작했다.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어감상 험담을 실시간으로 한 것 같다. 인도 종교음악과 콜롬비아의 디스랩이 섞인 인종대환장의 시간들이 날 너무 지치게 만들었다. 그나마 같은 층에 살던 미스터 스웨덴의 꽃다운 외모를 보는 낙으로 견디며 살고 있었는데, 날아다니던 바퀴벌레를 보고 ‘홀리 쉿’을 연발하며 나보고 잡아달라고 내 등 뒤로 숨는 그 순간 그 집에서 떠나야겠다고 다짐했다.


두 번째 집은 아르바이트를 하던 커피숍 근처로 잡았고 여기 역시 외국인 셰어하우스였다. 집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가격이 저렴해서 돈이 조금 모일 정도로만 지나다가 갈 목적으로 살게 되었다. 룸메이트는 미스 중국이었고 낮에는 대학교를 다니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마주칠 시간은 거의 없어 독방이나 다름없었다. 항상 그녀에게서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시큼콤콤한 냄새가 났는데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도 냄새의 깊이와 농도에 따라 그녀가 몇 시간 전에 방에 머물다 갔는지를 유추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중국 특유의 향신료 향과는 달랐다. 그녀의 체취가 내 코를 후려칠 때마다 나는 데오드란트를 선물로 사줄까 생각도 해봤지만 괜히 우호적인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를 망칠까 봐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코가 그녀의 냄새에 마비되어 익숙해질 때쯤 예상했던 알바 금액이 모였고 나는 미련 없이 그 집을 나왔다.

 


한국 정부에 굉장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한국인 유학생, 낮에는 하루 종일 잠만 자고 밤에 클럽 나가던 본투비 섹시 영국언니, 나를 굉장히 잘 따랐지만 뒤통수쳤던 한국 동생, 발가벗고 방을 활보하던 유럽언니, 나만 보면 음흉한 건치 미소를 보내던 옆방 호주아저씨 등등 저마다의 생활 패턴과 다양한 성격을 가진 여러 사람을 거쳤고, 벽이나 카펫에 작은 흠집이라도 날 까봐 매의 눈으로 쉐어생들을 주시하던 예민미 오지는 집주인, 허락 없이 방에 들어와서 이것저것 만져보던 변태 집주인, 한국의 썩어빠진 교육환경을 귀 따갑게 욕하며 자녀의 조기유학을 선택한 집주인을 거쳐 마침내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외국에 살 던 몇 년 동안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개월을 지내면서 대략 열몇 번의 집을 옮겨 다녔다.


외국에서는 생활은 항상 불안했다. 집 한 채를 빌리는 건 너무 비싸고 생판 처음 보는 사람과 같이 방을 나눠 쓰기엔 불편하고 피곤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온전히 나만의 집을 갖고 싶다는 꿈이 간절하게 된 게. 발 벗고 누울 공간은 있지만 마음은 늘 쫓기는 것처럼 초조했다. 내가 머무는 공간이 나만의 것이 아닌 돈을 준 시간만큼 빌린 공간이라 생각하니 항상 신경이 날카로웠다. 한국에서는 한 달 30만 원이면 혼자서 지낼 수 있어 외국에서의 삶보다는 심적으로 여유로워졌지만 여전히 잠시 머물다 갈 집이라는 생각에 조심스럽긴 매한가지이다.




누구의 허락을 받지 않고 벽에 구멍을 숭숭 뚫어 액자를 걸어도 되고 바닥에 찍힘 자국이 생겨도 벌벌 떨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나만의 집이 갖고 싶다. '자가세요?'의 물음에 '눼에'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짜릿함을 느끼고 싶다고.  얼마 전 뉴스 기사에서 평균 14년 동안 돈 한 푼 안 쓰고 모아야 내 집 마련이 가능하다고 했다. ‘의식주’의 ‘주’를 위해서 ‘의식’을 포기하고 산다는 게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현실인가. 영혼을 끌어모아 집을 산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하는데 내 영혼의 값어치가 그 정도의 비싼 값이라도 나가면 다행이지 싶다.


얼마 전 마트에서 구입한 청경채에서 민달팽이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곤충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내가 없이 꿈틀꿈틀 거리며 청경재에 몸을 숨기는 민달팽이를 보니 너도 나처럼 집이 없구나 싶은 측은지심과 동병상련을 느끼며 '노숙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곤 양지바른 곳에 놓아주었다. 험한 세상 잘 살아나가길 바라며.



혹시 모르지.

노숙이가 나에게 은혜 갚는다 치고 어디선가 집문서를 물어다 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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