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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Dec 30. 2022

내 집 찾아 삼만리 Part 1

06


나는 대학생 때 처음 집에서 나와 혼자 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6년 동안 열몇 차례 정도 이사를 다녔고 한 철 메뚜기 마냥 이 집 저 집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어릴 때는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 혼자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에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들떠 그저 즐겁기만 했다. 철없던 시절의 나에게 집이란 공간은 그저 친구들을 불러 모아 밤새 광란의 파티를 할 수 있는 개념으로만 이해했던 것 같다. 그러다 대학 졸업을 하고 외국에서 살게 되었고 6평이던 나만의 보금자리가 점점 좁아서 아파트의 방 한 칸, 그리고 2층 침대의 2층인 0.4평의 공간으로 까지 점점 줄어들어 갔다. 꿈과 야망은 점점 커지는데 내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은 반비례적으로 좁아졌다.


한국으로 돌아와 직장을 구하고 다시 6평 남짓 공간으로 삶의 영역을 옮긴 게 벌써 7년이 되었다. 현재까지도 6평의 공간에서 몸을 비비며 살고 있지만 어쩜 나의 꿈은 6평 크기만큼 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넓고 큰 집이 좋고 그런 집에 살아야만 행복하고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한 번도 넓은 집에 살아본 적 없는 나는, 만약 내가 좋은 집에 살았다면 지금과 다른 삶을 걷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이따금씩 품기는 한다.  



나의 첫 빌린 집은 대학교 1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원룸은 굉장히 좁았고 세탁실과 쓰레기장을 공용으로 사용해야 되는 구조였다. 나는 매일 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오래된 세탁기 소리를 들어야만 했고, 방음이 되지 않아 옆 집에 사는 남자와 일상을 공유해야 했다. 집에 가만히만 있어도 고스란히 들리는 옆집 남자의 은밀한 사생활. 하루는 은진이가 왔다가 다음 날은 민지가 오고, 민철이랑 술을 마시고 조별과제로 괴로워하는 소리까지, 벽을 두고 있지만 마치 옆집 남자가 내 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모든 대화가 선명하게 들렸다. 분명 우리는 다른 공간에 있지만 함께 생활하는 기분이었다. 아마 원룸 벽을 세울 때 시멘트를 쓰지 않고 ‘내 이웃과 벽을 허물고 살아가라’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모기장을 세운 게 틀림없다.


그리고 당시 바퀴벌레가 자주 출몰했는데 바퀴벌레는 죽을 때 몇 천 개의 알을 깐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주워듣고 소독이랍시고 바퀴벌레가 즉사 한 곳을 라이터로 지졌다. 샛노란 K-장판에 바둑이 강아지 무늬 마냥 새까맣게 표식을 남겼는데 나중에 들은 바로는 엄마가 장판 값을 물어줬다고 한다. 나는 그날 15만 원짜리 바퀴벌레를 태워 죽인 셈이다. 건물의 뒤쪽에는 남자 고등학교가 있어 어두운 원룸 앞쪽 좁은 골목에 소위 말하는 불량 청소년들이 무리 지어 담배를 피곤했다. 시간이 맞아 그들이 삼삼오오 모여 나쁜 짓을 할 때 그 앞을 지나가게 되면 괜스레 눈이라도 마주쳐서 시비 걸릴 까봐 가자미 마냥 눈을 최대한 밑으로 내려 깔고 후다닥 지나갔다. 아 찌질 했던 나의 못난 흑역사여.    


그렇게 2년간 지내다가 학교 기숙사에 살게 되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에 사는 게 처음이라 모든 게 새롭고 좋았다. 단 하나, 룸메이트 L 양 빼고. L양은 신입생이었고 소위 말하는 오타쿠 같은 소녀였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굉장히 사랑했고 바깥 외출을 거의 하지 않은 은둔형 인간이었다. 똑단발 버섯머리에 두꺼운 뿔테 안경을 썼으며 말끝마다 ‘~한다능’이라는 본인만의 세상 말을 사용하여 나는 그녀를 능이버섯이라 불렀다. 같이 지내는 1년 동안 큰 트러블 없이 지냈지만 능이버섯은 항상 침대 위에 뿌리내려 앉아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곤 했다. L양은 항상 나를 철없는 동생처럼 내가 무슨 말을 하던 우쭈쭈 거리며 세상 인자한 미소를 띠고서는 틈만 나면 자꾸 나를 가르치려고 했다. 독버섯 같은 년.    


대학교 4학년때는 기숙사에서 나와 학교 근처 고시원에서 지냈다. 능이버섯 덕분에 나는 타인과 지내는걸 굉장히 불편해하고 신경이 많이 쓰인다는 걸 깨닫고 혼자 살 수 있고 비교적 저렴한 여성전용 고시원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낮에 고시원을 알아보고 계약할 때까지는 몰랐다 고시원이 굉장히 이상한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그곳은 유흥의 메카인 대학가 중심가에 위치했고 지하는 클럽, 2층은 술집, 3층은 노래방 4층은 PC방 5층은 당구장 6-7층은 고시원인 상당히 의도를 알 수 없는 곳이었다.


금요일 밤이나 주말에 동네 마실 나가듯 대충 입고 고시원 건물 밖을 나가는 날이면 바지 위에 브라팬티를 입은 냥 출입구 쪽에 바글바글 모여있던 화려한 파티피플들의 멸시괄시 어린 눈빛을 애써 모른 척 지나가야 만 했다. 그것보다 견디기 힘든 건 새벽마다 들려오는 클럽의 시끄러운 비트와 음악에 홀린 사람들의 단체 합창 소리였다. 클럽을 자주 가진 않았지만 그 당시 웬만한 클럽 노래는 다 섭렵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것이 소위  방구석 1 열이지 싶다. 비트에 몸을 맡긴다는 말처럼, 벽을 타고 올라오는 움칫 움칫 둔탁한 비트소리에, 몸은 고시원에 있지만 나의 바이브는 클럽의 여느 사람들처럼 DJ를 향해 손을 뻗어 위아래로 흔들고 있었다. 그렇게 점차 클럽 소리에 익숙해져 갔고, 주변이 조용하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나는 클럽의 엠프 소리에 귀가 멀어갔다.       



매일밤 관짝 같이 좁은 고시원 침대에 누워 창가를 바라보곤 했는데 창가 모서리 쪽에는 옆 동네 고급 아파트가 보였다. 매일 밤 클럽 노랫소리에 취한 채로 나는 언젠가는 저런 곳에 살고 말리라 수백 번이고 다짐했다. 평범하지 않았던 3번의 이상한 숙소 생활이 나를 더더욱 내 집 마렵게 만들었다. 물론 나름 즐거운 일도 많았고 지내는 동안 시원하고 따뜻하게 잘 지냈지만 어쩜 그곳에서 느끼던 수많은 감정들이 지금의 나로 단단하게 만들어 주지 않았나 싶다. 가끔은 소음 가득한 새벽의 알코올 섞인 공기와 CCTV 마냥 나를 관찰하던 능이버섯의 궁금증 가득 찬 눈빛 그리고 고등학생들에게 삥 뜯기지 않기 위해 발바닥에 불붙은 것처럼 후다닥 집에 뛰어들어갔던 그때가 그립다.



103호 옆집 남자

능이버섯 소녀

클럽피플들

 

다들 잘 지내시죠?

전 여전히 집 없이 이 집 저 집 떠돌며

무탈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 살아서 한번은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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