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탄 Feb 22. 2023

평등한 밥상머리 ‘껌빈전’

베트남의 서민식당 ‘껌빈전(Cơm bình dân)’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음식은 무엇인지 물으면 대부분 '(phở, 쌀국수)'라고 생각할 것이다. 의 유래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100여 년 전 프랑스 식민시절 북부지역 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고기 국물에 면을 넣어 먹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퍼는 1950년대부터 베트남 전역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고, 건더기는 적되 고기 국물을 듬뿍 마시면서 허기진배를 채울 수 있다는 이유로 대표적인 서민음식으로 사랑받게 되었다. 그러나 ‘쌀 한 톨’조차 귀했던 과거 배급제 시절까지는 몰라도, 요즘에는 퍼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기에는 실상 허기가 져서 든든하게 먹어야 하는 점심이나 저녁 식사 메뉴로는 적합하지 않다. 특히나 밥을 산더미처럼 쌓아 먹는 베트남의 노동자들에게 퍼는 아침 출근길 전에 급하게 배를 채우거나, 점심 저녁 간단히 요기를 하는 음식이란 느낌이 더 크다.


오늘날 하노이에서 퍼를 대신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은 바로 ‘껌빈전(cơm bình dân)’이라고 불리는 서민 식당일 것이다. 껌(Cơm)은 ‘밥’, 빈전(Bình dân)은 ‘보통 사람’이라는 뜻으로 ‘껌빈전(Cơm bình dân)’을 풀어 말하면 ‘보통 사람들의 밥’이라는 의미이다. 실제 요즘 하노이의 일반 노동자들이 점심시간 가장 많이 애용하는 곳은 바로 이 껌빈전 식당일 것이다.


껌빈전 식당은 하노이의 골목골목마다 있다. 특히나 공장이나 사무실이 모여있는 곳이라면 그 뒤 편엔 늘 껌빈전 식당이 줄지어 늘어선 껌빈전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껌빈전의 가장 큰 매력은 원하는 것을 골라 먹을 수 있는 뷔페식이라는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주인 맘대로 그날의 메뉴를 정해내어 주는 ‘백반 뷔페’ 정도랄까. 껌빈전 식당에는 대부분 이름이 없다. 물론 간판에 크게 '껌빈전(cơm bình dân)'이라고 쓰고 그 아래에 주인 이름이나 고향 이름 등을 작게 넣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식당의 이름을 따로 부르지 않는다. 최근에서야 체인화되는 요식업이 늘어나고 일부 고급화된 채식 껌빈전도 브랜딩 되지만, 대체로 껌빈전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보통의 식당이다.


껌빈전 식당이 가장 붐비는 시간은 낮 12시부터 12시 30분 사이다. 보통 점심장사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점심시간 이외에 식당을 찾으면 문이 닫혀 있거나, 팔고 남은 식은 반찬을 먹게 된다. 붐비는 점심시간, 문이 없는 식당 입구에 들어서면 종업원은 다짜고짜 접시 한편에 모락모락 갓 지은 밥을 수북하게 담아준다. 두당 한 접시다. 도시락 싸 오는 동료들과 같이 먹으려는 회사원들을 위해 일회용 용기에 포장해 주기도 한다.


푸이엔 성 시장 안의 어느 껌빈전 노점


‘저걸 정말 나 혼자 다 먹어 치울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밥이 수북하게 쌓인 접시를 받아 들면, 이제는 반찬을 고를 차례다. 다시 내 접시를 받아 든 종업원은 프로페셔널의 손길로 내가 요청하는 반찬을 접시 한편에 세팅해 준다. 많지도 적지도 않을 정도의 적당한 양을 빠르게 담아낸다. 육류부터 채소까지 보통 베트남 가정집에서 먹는 다양한 반찬들이 적게는 5~6가지부터 많게는 10가지도 넘게 준비되어 있다. 종류는 가게마다 다르며, 같은 식당이라고 해도 매일 다른 반찬을 내어놓는다. 지역별로도 차이가 있다. 바다가 가까운 마을이면 육고기보다 해산물이 더 많고, 고산지대로 들어가면 고기보다는 풀 종류가 더 많은 편이다.. 그리고 가끔은 운 좋게도 그 지역의 특산물로 된 반찬을 만날 수 있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은 3~4가지의 반찬을 고르고, 원한다면 양을 더 요청하기도 한다.


밥과 반찬을 수북이 담은 접시를 받아 든 손님은 빈자리를 찾아 앉는다. 가게가 붐비는 시간은 인근 노동자들의 점심시간과 같기 때문에 테이블의 옆자리와 앞자리에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혼자 와서 한 끼를 때우고 가는 사람들도 많은 까닭에 처음 보는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거나 몸을 부대끼며 먹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리에 앉으면 종업원이 채소를 데치고 난 맑은 국물인 그날의 국을 가져다주고, ‘짜다(Trà đá)’라는 통얼음 띄운 차를 요청할 수도 있다.


한 접시의 가격은 지역에 따라, 가게 위치에 따라, 혹은 식당이 신식이냐 구식이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3~40,000동(1,500~2,000원) 정도다. 그간 내가 가장 저렴하게 먹었던 식당은 17,000동(850원) 짜리였고, 가장 비싸게 먹었던 고급(?) 껌빈전 식당은 50,000동(2,500원)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반찬의 가짓수를 더할 경우나, 일부 식당에서 그날의 스페셜 반찬을 추가할 경우 돈을 더 내기도 한다. 추가 요금은 5,000(250원)~20,000동(1,000원) 정도다. 십여 년간 물가 상승으로 인해 껌빈전의 가격도 많이 올랐다. 그러나 여전히 시골에선 가격을 유지하고 있는 껌빈전들도 있다. 최근 하노이에 늘어나고 있는 고급화된 채식 껌빈전은 9만 동(4,500원)까지 있다. 사실 이건 껌빈전이라기보다 추가 요금이 없이 먹는 뷔페에 가깝다.


베트남 서민들을 위한 음식 '껌빈전'


내가 베트남에서 먹어본 껌빈전 식당 중 가장 맛있었던 곳은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Quảng Ngãi) 성 공단지역에서였다. 지역 조사를 하러 며칠 동안 출장을 갔었는데, 휑하니 식당을 찾기 힘든 공단 주변을 뱅글뱅글 돌다가 허름한 껌빈전 식당 하나를 간신히 찾게 되었다. 고를 수 있는 반찬의 가짓수는 많지 않았지만, 고기와 생선과 계란과 채소들까지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은 내 침샘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무엇보다 하노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 접시 17,000동(850원)의 가격이 너무도 훌륭했다.


따듯한 접시를 받아 들고 나무 의자의 빈자리에 앉아 허겁지겁 허기를 채우는데, 식당 바로 앞 매 마른 대로변에 공단을 오가는 커다란 덤프트럭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야속하게도 문 없는 식당에서 내 식탁 앞에 흙먼지가 휘날리는 그 상황은 여러 번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나는 손으로 접시를 가리며 흙먼지로부터 내 끼니를 사수해야만 했다. 내 주변에서 밥을 먹고 있던 공장 노동자들은 이 상황이 익숙한지 나를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나는 이미 흙먼지 잔뜩 묻어있는 그들의 옷을 보고는 이내 머쓱해져서 따라 웃고 말았다. 밥 반, 먼지 반이었던 그때 그 따듯한 식사가 정말 맛있던 것으로 아직까지 기억되는 건 왜일까. 역시 국가를 막론하고 공사장 옆 함바집의 백반은 다 맛있는 것일 수도, 아니면 땀 흘려 일한 노동자들 옆에 앉은 나도 덩달아 밥이 꿀맛같이 느껴진 걸 지도 모르겠다.





껌빈전은 노동자들의 음식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고향에 두고 홀로 하노이에 있는 외국계 회사에 다니며 월급 700달러를 받는 젊은 기러기 아빠 황(Hoàng)부터 하노이에 올라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간신히 대학을 졸업한 후 월급 300달러를 받는 베트남 회사에 이제 막 취직하게 된 당돌한 아가씨 짱(Trang), 조그만 주택을 짓는 건축 현장에서 몇 달 동안 다른 인부들과 함께 일하고 먹고 자고 하는 일용직 노동자 밍(Minh) 아저씨, 아들은 꼭 대학에 보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주 7일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쎄옴(오토바이 택시) 운전을 하는 하(Hà) 아저씨, 옷 가게 문 앞에서 월급 90달러를 받고 주차관리 일을 하는 주정뱅이 흥(Hưng) 아저씨까지. 껌빈 잔 식당에 가면 이 모든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다.


하노이는 여전히 무섭게 변화하고 있고, 고향을 떠나온 보통의 노동자들은 이 큰 도시가 버겁기만 하다. 혼잡한 아스팔트 위를 열심히 달리고는 있지만, 왜인지 저만치 앞서가는 사람들과의 격차는 점점 벌어진다. 아직도 기어가 없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과 30년 된 혼다 오토바이를 모는 사람들은 새로 뽑은 최신형 외제차의 속도를 따라가기가 벅찰 뿐이다. 그러나 평일의 점심시간, 적어도 이 밥상머리에서 만큼은 모두가 같아진다. 벤츠를 몰고 다니는 어느 회사의 중역도,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길거리의 노동자도 이 껌빈전 식당에서는 누구나 같은 의자에 앉아 살을 부대끼며 똑같은 접시에 원하는 음식을 골라 담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한 접시의 껌빈전, 그것은 어쩌면 평생을 다른 속도로 달려야 하는 그 도로에서 잠시 내려와 모두가 똑같이 쉬어 갈 수 있는 ‘평등의 음식’ 일지도 모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